김승덕 글로벌 큐레이터의 예술적인 삶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김승덕 글로벌 큐레이터의 예술적인 삶

1세대 큐레이터이자 글로벌 문화예술인인 르 콩소르시움의 김승덕과 나눈 이야기.

BAZAAR BY BAZAAR 2022.12.03
 1세대 큐레이터이자 글로벌 문화예술인인 르 콩소르시움의 김승덕이 프랑스 문화훈장 슈발리에장을 받았다. 그러나 파리와 디종을 오가며 이어진 우리의 긴 대화는 예술훈장이 아니라 예술적인 삶을 향했다.
올 10월 중순의 파리는 현대미술계의 중심에 선 꽤 각별한 풍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작금의 글로벌 미술시장과는 보폭이 달랐던 프랑스 태생의 아트페어 피악(FIAC)이 물러앉은 자리에 명실상부 최고 스타인 아트바젤이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며 내세운 이름, 파리 플러스(Paris +)는 꽤 적절했다. 페어 무대인 그랑팔레 에페메르뿐만 아니라 예술적 자존심과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유수의 미술관 등의 기관들은 문화도시의 위용을 되찾기 위해 합심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갤러리들도, 컬렉터들도, 미술 관계자들도, 관객들도 모두 파리 이상의 파리를, 예술 이상의 예술을 경험한 것이다. 21세기 버전의 벨에포크를 예고하듯 전 도시에서 나부끼는 아트바젤 깃발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디종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파리에서 기차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 디종은 부르고뉴 지방의 중심지이자 ‘예술과 역사의 도시’답게 명소들을 품고 있다. 13세기 건축의 걸작 노트르담성당, 프랑스에서도 손꼽히는 디종미술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리베라시옹광장 등으로 향하는 길을, 곳곳의 금색 올빼미가 안내한다. 하지만 디종의 과거가 아니라 예술이 그려내는 동시대를 만나고자 한다면 르 콩소르시움(Le Consortium)만 한 곳이 없다. 이곳 역시 파리를 강타한 ‘예술 폭풍’에서 자유롭기는 힘들었지만 말이다. “아트페어는 평소 인터넷으로 보던 전시를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귀한 기회죠. 차바랄라 셀프(Chabalala Self) 개인전과 드로잉 전시 때문에 우리도 페어 하루 전날 브런치 행사를 열었어요.” 이날 짧은 여행에 기꺼이 동행해준 큐레이터 김승덕이 말했다.
지난 1977년 자비에 두로(1956~2017)와 프랑크 고트르가 의기투합해 대안공간으로 시작한 르 콩소르시움은 1995년에 에릭 트롱시가, 2000년에 김승덕과 스테판 므아동이 공동 디렉터로 합류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작은 책방에서 공장으로, 2011년 반 시게루가 디자인한 건물로 형태를 달리하는 동안(지금은 얼마 전 작고한 클로드 뤼토의 작품이 흰 벽을 장식하고 있다), 르 콩소르시움은 혁신성과 전위성을 갖춘 영향력 있는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에 안주하거나 구조에 얽매이지 않은 이들은 지난 45년 동안 동시대를 반영하는 좋은 작가를 찾고, 통찰력 있는 이슈를 세상에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2000년 쿠사마 야요이 전시, 2005년 발렌시아 비엔날레, 2007년 문화수도 릴 «플라워 파워» 전,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2015년 한묵과 이응로 2인전 등의 글로벌 프로젝트를 통해 김승덕은 르 콩소르시움의 시야를 넓히고, 반경을 확장하며, 활동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주체로 주목받았다. 그녀는 “더욱 중요한 건 르 콩소르시움 전시를 계기로 퐁피두미술관에 이응로의 작품이 소장되었고, 2017년 소장품 전시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라 덧붙였다.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예측 불가함이 바로 우리가 전시를 하는 이유다.” 2017년 〈뉴욕 타임스〉는 ‘예술계의 다음 큰 일을 조용히 예견하는 레이더 아래의 미술관(The Under-the-Radar French Museum That Quietly Predicts Art’s Next Big Thing)’이라는 제목으로 르 콩소르시움을 다루었다. 지난 전시 목록을 보면 이 제목은 더 명확해진다. 신디 셔먼, 리처드 프린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제니 홀저, 한스 하케, 다니엘 뷔렌, 마우리치오 카텔란, 댄 그레이엄, 아네트 메사제를 비롯해 초창기 실험에 동참한 작가들은 미술사를 이끌고, 더 많은 작가들이 ‘유럽 첫 기관(미술관) 전시’ 등 유의미한 타이틀을 얻어갔다. 아나키스트이자 철학자 샤를 푸리에의 책을 비롯해 일 년에 70~80권의 책을 내는 출판사 레 프레스 뒤 레엘(Les Presses du Reel)과 피에르 위그, 필립 파레노, 샤를 드 모,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등 실력자들이 설립한 영화제작사 안나 샌더스 필름(Anna Sanders Film)도 연계 운영하는 르 콩소르시움은 미술을 넘어 문화예술계의 인덱스를 제시하는 곳으로 통한다. 김승덕은 남다른 선구안의 비결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남들이 하지 않지만 우리가 첫 번째 관객이 되어 보고 싶은 전시, 책,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 2018년 광주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베트남에서 베를린까지»전 이후 김승덕은 한국을 찾지 못했다. 나 역시 3년 만의 프랑스 출장이었으니 어쨌든 만남은 성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프랑스 문화예술훈장인 슈발리에장을 받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은 이 만남에 강력한 명분을 선사했다. 이우환, 임권택, 정명훈, 윤정희, 백건우, 봉준호 등의 예술가와 경영인들이 그간 예술훈장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이것이 무대 뒤의 현직 큐레이터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콩소르시움의 활동을 향한 공식적인 인정이기도 하거니와 예술의 가치를 탐구하고 알리는 데 삶을 건 한 명의 문화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김승덕은 영예로운 훈장보다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다. 미술계 이야기는 일상으로 옮겨왔고, 계획과 조언으로 건너갔다가, 하소연과 위로를 돌아 번번이 예술로 귀결되었다.
지난 2015년 샤르자 비엔날레에서 첫 인사를 나눈 후 우리의 관계는 줄곧 예술과 삶, 일과 일상을 넘나들며 지속되어왔다. 지금도 김승덕은 종종 자신을 설레게 하는 예술가의 존재와 생각할 거리를 전하며 안부를 묻는다. 건축가이자 철학자인 아리스티드 안토나스, 르네 랄루와 롤랜드 토퍼의 1973년 애니메이션 〈La Planˋete Sauvage〉, 글렌 굴드, 박문호 박사의 과학 이야기, 김창남의 책 〈한국 대중문화사〉, 근현대사에 대한 사견, “검소하면서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김부식의 명문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 이 모든 편린들은 그녀의 소명의식, 즉 여력이 되는 한 문화예술계에서 신나게 일하고 싶다는 열망, 예술가를 향한 존중과 예술에 대한 신의, 그리고 빼어난 용기에서 유기적으로 비롯되었다. 물론 김승덕은 손사래를 치겠지만, 나는 이것이 어떤 훈장도 담아내지 못할 예술적인 삶의 실체라 생각한다.
 
현대미술계의 앙팡테리블로 떠오른 흑인 여성 작가 차발라라 셀프의 개인전. Photo: Rebecca Fanuele2021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버드 파빌리온(Bird Pavillion)온 카와라가 직접 기획한 자코메티와의 2인전 «Conscience»(1990). 전설적인 전시로 회자될 뿐만 아니라 ‘The best expo in Europe’상을 받았다. Photo : André Morin미술관의 바닥을 파낸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Untitled〉(1997년)는 콩소르시움 미술관 컬렉션이다.김승덕이 합류하고 처음 기획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이후 전세계로 순회했다. 회고적 일색이던 당시 이례적으로 작가 작업을 설치 작품 위주로만 풀어냈다. Photo : André Morin콩소르시움 마당에 놓여 있던 사라 루카스의 작업. Photo: Rebecca Fanuele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슈발리에장을 포함한 레지옹 도뇌르가 문화 발전에 기여해온 이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훈장이라 알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하도 담담하게 올려놓으셔서 하마터면 이 기쁜 소식을 지나칠 뻔했어요(웃음).
큰 영광이죠. 다만 어떻게 이런 상이 제게 주어졌는가를 톺아보면, 르 콩소르시움을 빼놓을 수 없어요. 제가 들어올 때만 해도 서양에서 좋은 작가를 찾을 때 동양 쪽은 생각하지도 않던 분위기였어요. 시기가 잘 맞은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합류하면서 설치작품 위주로만, 다소 이례적인 쿠사마 야요이 전시를 선보였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이 기관의 시야가 넓어지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거예요. 이 모든 건 르 콩소르시움이 국적, 나이, 성별, 학력 등에 상관없이 좋은 작가를 찾아내고 오픈 마인드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내게는 최고의 ‘도구’와도 같은 곳이었기에 가능했어요.
그전부터 한국 작가를 포함한 아시아 작가를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오신 걸로 압니다. 한국 미술을 알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으셨던 건가요?
슈투트가르트 소형 조각 트리엔날레에서 김수자, 이불 등을 소개했어요.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의 부대 전시였던 «동양으로 가는 길»에서 구보타 시게코와 오노 요코의 전시를 도우면서 베니스에서 살게 되었고요. 이후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아시아나»전에서는 김진수, 홍명섭, 차우희 선생 등 한국 작가 10여 명을 소개했죠. 퐁피두를 거쳐 르 콩소르시움에 합류한 후 2007년에는 프랑크 고트르와 함께 비엔나쿤스트할레에서 «엘라스틱 터부»전을 기획했는데, 한국 미술을 민중미술부터 모노크롬까지 본격적으로, 하지만 좀 다른 시선으로 탐구하는 자리였어요. 즉 한국 작가를 대표하겠다는 구체적인 포부라기보다는 서구 미술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좋은 작가를 소개하려는 의지가 자연스레 동서양의 경계를 없앴고, 지금까지 또 다른 프로젝트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의 삶 자체가 예술과 함께 항상 움직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글로벌 라이프를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제 삶의 3분의 1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서, 3분의 1은 미술사를 공부한 뉴욕에서,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유럽에서 전시 기획을 하며 살고 있어요. 여행조차 휴가가 아닌 일로 다녀야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축복이죠. 그렇게 뒤돌아볼 여유 없이 계속 앞만 보면서 뛰어다닌 것 같아요. 일이 이렇게 많아 얼마나 좋으냐고들 하는데, 우리는 본래 계속 일을 찾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여기저기 초대받아 얼굴만 내밀고 마는 일은 하지 않지요.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저를 비롯한 르 콩소르시움의 디렉터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분야보다는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현황을 들여다보고, 찾고, 만들어가는 걸 훨씬 선호해요.
미래에 대한 남다른 비전과 추진력이 르 콩소르시움이 다른 미술기관과 차별화되는 지점 아닐까요.
2020년 3월인가, 코로나 때문에 하루 만에 전시를 취소했어요. 가만히 들어앉아 사태를 직시해야 했지만, 아예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10년 전부터 부르고뉴 외곽 그랑시 르 샤토 지역 6천 평가량의 땅에 준야 이시가미, 아리스티드 안토나스, 파트릭 베르제, 이 세 건축가들과 동물과의 공존을 주제로 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2021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의 주제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How will we live together?)’였고, 그렇게 비엔날레에 초대받게 되었어요. 물론 과정이 절대 수월하지는 않았어요. 재정의 어려움과 시련을 겪었지만, 결국 이듬해 베니스 자르디니의 중심에 본래의 버드 파빌리온(Bird Pavillion)과 같은 12×9m 크기로(카피가 아니라 더블의 의미) 선보이게 되었어요.
르 콩소르시움의 행보를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죠. 건축 등 다른 분야와의 교류 및 협업,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관심사, 재정 등의 현실적 어려움을 깨나가는 실천력, 그렇게 탄생한 예술사에 기록될 만한 프로젝트들…. ‘콩소르시움’의 뜻이 ‘협력’이라는 사실이 새삼 절묘합니다.
우리 기관은 이름이 보여주듯 시작부터 공동의 협력체로서 개인의 능력과 개성을 맘껏 쓸 수 있는 곳이에요. 각자의 개성은 강하지만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심지어 동의하지 않더라도 시대적 가치와 공통분모의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면 서로를 인정하는, 말하자면 집단 지성을 매우 존중하는 공동체이지요. 그 힘으로 르 콩소르시움이 지탱하고 유지해온 듯해요.
그렇게 르 콩소르시움은 신뢰할 수 있는 일종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전시 목록을 보니 그 자체로 현대미술사의 실험적 요약본이자 작가들과 함께 쓴 성장기다 싶더군요.
어느 시점부터 컬렉터를 비롯한 미술 관계자들이 신진 작가의 가치와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르 콩소르시움에서 전시를 했는지를 먼저 확인한다해요. 가고시안 같은 갤러리가 젊은 작가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우리에게 전시를 제안하는 경우도 많고, 여기서 전시한 후에 대형 갤러리에 바로 캐스팅되기도 해요. 컬렉터들이 어떤 작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해당 작품을 두 점 구매해서 한 점은 우리에게 기증하고 다른 한 점은 본인이 소유하는 방식도 요즘 자주 보는 관행입니다. 작품 기증 제안을 많이 받는데, 기준은 우리 미술관에서 전시한 경우에만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즉 오늘 보신 르 콩소르시움 컬렉션은 지난 전시의 흔적이자 기억인 셈이죠.  
조직이나 기관도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텐데, 어느덧 45세가 된 르 콩소르시움은 현재 어떻게 변화 중이라고 보시나요?
이런 정신과 활동을 다음 세대에 어떻게 이어갈지가,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슈예요. 구체적인 프로젝트는 계획 중이지만, 우선 작가와의 대화와 협업을 더 적극적으로 해나가려 해요. 이것이 르 콩소르시움의 진정한 DNA이니까요. 이번 «드로잉 센터 쇼»전에 조 브래들리와 토비아스 필즈가 커미셔너로 참여했어요. 내년 말부터 컬렉션 전시장 등 공간을 확장할 예정인데, 재개관 때 ‘아티스트 윙’이라는 공간을 이 두 작가에게 맡길 거예요. 미술계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작가의 위치도 많이 달라졌고, 부유해졌으며, 미술시장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지만, 여전히 작가들은 새로운 도전과 자극을 갈망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느 때처럼 우리의 역할을 할 겁니다.
‘큐레이터’의 어원이 ‘쿠라레’ 즉 ‘돌보다’는 뜻이라는 말씀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작가들과의 소통은 르 콩소르시움뿐 아니라 선생님의 예술 인생에서도 중요한 동력이 아닐까요.
네, 저의 모든 것은 작가와의 협업에서 시작되었어요. 작가들의 시각을 통해서 세상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단서를 얻었죠. 즉 특정한 스타일의 개인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이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좋아하는 거예요. 특히 저는 항상 시대를 관찰하고, 리서치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정직하고자 하는 작가들을 존중해요. 그렇게,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다학제적 시선도 갖추고, 그 안에서 답도 찾고, 필요한 방식을 창조하게 되죠. 우리의 일은 동시대를 문화의 콘텍스트에서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작가들은 이런 고민을 치열하게 하면서 실현해나가는 사람이에요. 그 협업의 결과물이 영화, 전시, 공공미술, 책으로 탄생하는 거에요, 자연스럽게.
2015년 베니스에서 열린 베네치안 블라인드가 기억이 납니다. 마틴 크리드 등의 작가들이 미술과 음악을 함께 펼쳐놓는 획기적인 공연이었죠. 본래 예술가들은 분절된 작업만 하는 직업인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작업을 하는 ‘르네상스 맨’이었다고 하셨어요.
예술가들이 몽상가로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틀을 깨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미래를 내다볼 수도 있고,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깊숙한 것을 끄집어내기도 하지요. 이들의 작업에 동행하며 비전을 나눌 수 있는 건 영광이자 축복이에요. 그 과정에서 종종 녹초가 될 때도 있고, 그들의 예민함이 버거울 때도 있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조건 같은 거죠. 어쨌든 우리가 맡겨진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없던 일을 만들어 작가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기에 여전히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예술을 포함해서 세상을 향한 그 호기심과 열정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세상은 계속 변해요. 매일 쓰는, 즉 몸의 일부처럼 기능하는 스마트폰 같은 도구들도, 인터넷 세계에서의 대화의 방식도 바뀌고 있죠. 가상의 세계 속 급격한 변화를 익히는 데 시간을 많이 쓰다 보니 우리가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더군요. 예술가뿐만 아니라 과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지리학자 등 현자들의 생각과 의견, 이야기와 계획이 궁금해지는 거죠. 나아가 우리 문화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이런 지구를 미래 시대에 물려주는 입장에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등등 세상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문화라는 문맥에서 들여다보면 하고 싶고 해야 하는 다양한 일들로 가 닿게 돼요. 물론 아무래도 속도도 느려지고 고단하기도 하지만, 내가 멈춰 서는 그 순간까지, 소비되지 않고 평화롭고 신나게 일할 수 있다면 행복할 거예요.
예전에는 박서보, 이우환, 양혜규, 이불, 서도호 등 몇몇 특출난 작가 개인이 호명되었다면, 이제는 ‘한국 미술’을 들여다본다는 점이 큰 변화인 듯합니다. 해외는 물론 국내 관객들도 예술, 한국 미술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예술성과 대중성을 분리하지 않는 분이기에, 소회가 더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가장 어렵지만, 반드시 풀어야 할 문화계의 숙제예요. 저게 뭘까,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고민하게 하는 게 좋은 예술이고, 좋은 예술은 다양한 레이어를 갖기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죠. 눈높이를 이유로 질 낮은 예술을 남발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호기심을 갖고 찾아가도록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건 중요해요. 전문 지식이 없을수록 가장 훌륭한 예술을 만나야 한다고 믿어요.
요즘 일과 일상을 아울러 가장 신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사실 저는 이런저런 공부를 하느라 주말에 더 바빠요. 요즘엔 유튜브로 박문호 박사의 뇌과학 강의를 듣는 게 가장 즐겁고요. 덕분에 무지했던 과학 분야에 그나마 눈을 뜨게 되었어요. 이 분은 지구의 역사부터 호모사피엔스의 출현까지, 지질학, 사회학, 철학, 종교학, 인문학 등을 아우르는 매우 열린 접근을 하세요. 논문이나 저서 등을 알려주면서 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와 숙제를 함께 주시기도 하죠.
작가들에게도 종종 물어보곤 합니다. 어떤 판타지를 품고 사십니까?
이게 판타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분야의 훌륭한 스승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의 이치를 깊이 알아가고 싶어요. 이번에 내가 부탁한 이오덕 선생의 책 〈우리글 바로 쓰기〉도 그 일환이죠. 저는 우리말을 아주 좋아해요. 아끼고 예뻐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프랑스 사람들도 자기네 말을 연구하는 일에 정말 진심이거든요. 이오덕 선생은 동화 작가지만, 생활에서 우리 말과 글을 소신 있게 연구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학자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읽고 이렇게 쓰도록 노력할 거예요.(웃음)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평생 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요즘 시대, 우리 삶에서 예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술이 역사에서의 우리의 상황, 사회 안에서의 우리의 역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사명,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We expected art to be a tool for understanding our situation in history, our role in so-ciety, our mission for the future and our desire to stay in memory of our children).” 지난 2011년 카타르 도하 도시계획 프로젝트의 완성을 앞두고 저와 프랑크 고트르가 전한 이 문장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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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인생, 예술>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저자)
    사진/ 신창용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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