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Guide〉, 2022, Oil on linen, 96x76 in | 243.84x193.0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너무 기쁘고 좋아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예요!” 전 세계 미술계의 이목이 서울에 집중된 시기에 페로탕 도산파크의 개관 전시로 «일루미나리움(Illuminarium)»을 선보이게 된 엠마 웹스터에게서 흥분 가득한 텐션이 전해졌다.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엠마는 L.A에 있는 그리피스 공원 풍경에서 얻은 영감을 제목에 그대로 노출한 〈Griffith〉(2022)를 시작으로 1층 전시실에는 “인식이 가능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현실에 가까운 풍경들”을, 내밀함이 고조되는 2층 전시실에는 “더욱 기묘하고 환상적인 작품들”을 배치했다. “제가 작업실에서 작품들을 제작하는 시기에 갤러리 또한 공사가 한창이었어요. 함께 ‘건축’되고 탄생한 셈이에요.(웃음)”
〈Wisp〉, 2022, Oil on linen, 84x60 in | 213.4x152.4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엠마 웹스터는 1989년생으로 스탠퍼드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회화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문으로서 미술을 깊이 있게 공부한 웹스터의 작품 세계는 유구한 미술사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모든 작업은 스케치로 시작하는데, 미술사의 여러 주제와 작가, 작품을 레퍼런스로 합니다.” 전 세계 미술사를 시대와 지역으로 가로지르며 방대한 범위를 참고한다. 이를테면 19세기 중엽의 미국 풍경화가 그룹으로 광활한 대륙의 경이로움을 낭만적인 화풍에 담은 허드슨 리버 화파를 비롯해 16세기 네덜란드를 무대로 활동한 화가들, 18~19세기 우키요에의 황금시대에 제작된 일본의 목판화까지 아우른다. 휘어진 나무들이 험준한 겨울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Field Guide〉 앞에서 웹스터는 말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유사성에 흥미를 느껴요. 높은 지점에 수평선을 그리는 일본 목판화의 특징을 독일 회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죠. 철저히 다른 장소에서 발전한 미술 사조에서 이런 유사성이 발견되는 일들이 특히 풍경화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풍경화일까? 언뜻 통상적인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불가사의한 아름다움과 으스스한 기묘함을 발산하는 10여 점의 풍경화 앞에서 자연스럽게 든 의문이었다. “교리를 설파하기 위한 종교화의 배경으로서 철저히 배경에 불과했던 풍경화가 제대로 그려지기 시작한 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예요. 이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풍경화가 그려졌는데, 그 이유는 화가의 상상을 투영하기 좋고 작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풍경이라는 그림의 대상을 조정하기 수월하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해요.” 그렇다면 현란한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21세기의 페인터로서 엠마 웹스터가 작품의 지속적인 주제를 수세기 동안 그려진 풍경화로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미술가로서 저에게 풍경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기후위기에 직면한 전 지구적 상황과도 맥락이 닿아 있는 것 같아요. 다시금 자연이 어떤 존재인지 인식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기 때문이죠. 더불어 우리가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버추얼 스페이스에서는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힘들 때도 많은데 이때 풍경화는 기초 교육과도 같은 기능을 해요.”
〈Aloethylene〉, 2022, Oil on linen, 84x120 in | 213.36x304.8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Photographer: Marten Elder
2층 전시장 오른쪽 벽에 걸린 〈Aloethylene〉은 자연을 상징하는 ‘알로에(Aloe)’와 플라스틱의 주원료 ‘에틸렌(Ethylene)’의 합성어로, 작가가 만든 조어를 제목으로 삼았다. 엠마는 ‘초록색 플라스틱 숲’을 형상화한 이 작품에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최근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한 세계 곳곳의 홍수, 산불, 산사태 등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자못 숙연해지려는 찰나 엠마가 말했다. “I love that the green!” 발등 위에 새겨진 푸우 타투처럼 열정적인 학구열과 사랑스러운 장난기를 모두 지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라는 듯 초록색의 양면적인 면모에 대해 말을 이었다. “‘그린’은 매우 자연적인 컬러로 인식되어 있지만 종종 외계인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것처럼 굉장히 인공적인 색상이기도 해요. 또한 색에 관한 인기 투표에서 가장 싫어하는 색깔로 뽑히는 색이기도 하죠. 하지만 여전히 자연과 건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디지털 세계에서 풍경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고찰이 담긴 〈Lonescape: Green, Painting & Mourning Reality〉를 출간한 엠마는 인간의 눈이 녹색 컬러의 스펙트럼에 가장 민감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생존은 식물과 숨겨진 포식자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에요. 녹색에 관해서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좋은 의미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어요.”
〈Blue Moon〉, 2022, Oil on linen, 60x84 in | 152.4x213.4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웹스터 작품 세계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궁극적으로 회화에 도달하기 위해 연필 스케치, 예비 드로잉, 콜라주, 조각,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 디지털 렌더링 등 아날로그적이기도 하고 테크놀로지적이기도 한, 어쩌면 대척점에 있는 방식을 혼합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메모, 드로잉, 디지털 렌더링 이미지 등을 수록한 카탈로그 〈Behind the Scenes〉를 직접 출간하기도 할 만큼 작업 과정을 공유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본래의 작업 루틴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연필 스케치로 시작하는데 스케치하는 일은 회화가 어떤 결과물로 탄생할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이에요. 예비 드로잉을 제작하고 피겨와 디오라마(건축물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특정 장면을 연출한 것)로 만들어본 후 이를 회화로 옮깁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 작업 과정에 포함됐다. “친구가 준 오큘러스 VR 헤드셋이 있었는데요, 코로나바이러스로 자가격리 조처가 실행됐을 때 시간적 여유가 생긴 덕분에 마침 도구의 가능성을 충분히 탐색할 수 있었어요. 얼마간의 확신이 들었을 때 제 작업에 결합했죠.” 웹스터는 스케치와 드로잉을 스캔해 VR 프로그램을 통해 3차원적 형태로 변형한 후 가상현실상에서 장면을 구성하고, 무대조명을 이용해 눈속임, 극적인 요소, 왜곡적 묘사가 담긴 광활한 풍광을 연출한다. 그녀에게 풍경은 정물과도 같은 존재로서 가상현실(VR)이 빛의 표현 같은 정물화의 한계에 실용적인 해결책이 된다. “조명이 공간의 볼륨을 이해하는 데 시작점이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저는 나무나 숲 같은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물처럼 연출한 공간을 그리는 것이거든요.” 최종적으로 작가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가상현실에서 창조한 ‘공간’을 출력한 이미지를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낸다. 가상현실에서의 작업에 대해 웹스터는 “화면 ‘안에서’ 작업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엠마 웹스터의 독특한 작업 방식은 오늘날 각양각색의 스크린에 명멸하는 이미지가 생산, 전유, 소비되는 방식을 은유한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작업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피겨, 디오라마, 렌더링 이미지)은 엠마 웹스터의 작업 세계에서는 작품이 될 수 없는 건가?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왜 렌더링 이미지를 프린트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데 직접적으로 기술을 이용하는 게 어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페인팅’만큼 아티스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표현해내고 작품에 고유한 결을 불어넣는 매체는 없다고 생각해요. ‘페인팅’은 환상을 표현하는 가장 독창적인 매체예요.”
View of the exhibition «Illuminarium» at Perrotin, Dosan Park in Seoul, 2022. Photo : Kim Yongkwan.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그림을 보니 자연이 마치 연극 무대 위에 오른 주인공처럼 보이는 동시에 태초에 인류가 탄생한 순간 혹은 핵폭탄 같은 거대한 구름이 인류에 종말을 가져다줄 것 같은 상상의 이야기가 쓰여지기도 한다. 다소 허무맹랑한 감상을 전하자 엠마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연출한 기이한 풍경들이 낯설고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할 거라고 장담해요. 제가 바라는 건 보는 이들이 이 풍경을 자신만의 서사로 채우는 것이에요.”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대학 졸업 후 일 년간 극단에서 무대미술을 했던 엠마 웹스터의 정지된 판타지 영화들은 고갈된 상상력을 일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