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배우 한예리의 특별전이 열린다. 특별전 제목 〈예리한 순간들〉은 여러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다. ‘배우 한예리와 함께한 순간들’, ‘뾰족하고 날카로운 상태로 꿰뚫어본 순간들’ 등등.
일단 부모님이 내 이름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앞서 해석하신 두 가지 의미에 더해서 ‘한예리가 가장 예리했던 순간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관객들이 그 예리한 순간을 함께 들여다본다는 의미로 극장에 와주시면 좋겠다. 무엇보다 배우전을 열 수 있는 정도의 필모그래피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감사하고 다른 곳이 아닌 여성영화제라서 더욱 기쁘다.
홍보 대사, 개막식 사회자 등 매년 국제여성영화제 활동에 발 벗고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 인터뷰에서 “여성 영화인으로서 고민들이 있었는데 그 해답은 단순했다. 여성 영화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외침에 대답하는 게 페미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여성영화제가 만들어지고 잘 유지되는 게 결국에는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누군가 현장에서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품에서도 여성이 소비되는 형태가 아니라 의미 있고 힘 있게 그려졌으면 좋겠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해서 그렇지, 사실 하늘 아래 같은 캐릭터란 없다. 그럼에도 어느 때는 뭉뚱그려서 쓰이는 점이 아쉽다. 바뀌려면 소통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들에게 어떤 괴로움이 있었는지 느끼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은데 영화를 통해서 말하는 게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결국은 여성뿐만 아니라 사람을 위한 배려랄까. 더 나은 세상에서 다 같이 잘 살자는 의미이지 않나. 그런 점에서 여성영화제의 취지에 공감한다.
드레스, 슈즈는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귀고리는 Goyu.
〈미나리〉부터 〈춘몽〉 〈최악의 하루〉 〈푸른 강은 흘러라〉 〈기린과 아프리카〉 〈달세계 여행〉 〈백년해로외전〉 〈봄에 피어나다〉 〈연우의 여름〉까지. 이번 특별전에서 이 작품들을 선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연기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할 때 찍었던 단편들은 관객들이 그 에너지를 함께 느껴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선정했다. 〈푸른 강은 흘러라〉는 나의 첫 장편영화다. 처음이라서 부족한 점도 있지만 처음이라서 예쁜 순간도 있다. 〈미나리〉는 나의 한 챕터를 넘기게 해준 영화라서 의미가 있다. 워낙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고 ‘엄마’라는 역할을 처음으로 깊이 있게 연기해본 작품이었다. 〈춘몽〉도 남다르다. 시 같은 영화랄까. 〈최악의 하루〉는 유쾌해서 좋다. 자기가 무슨 짓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사고를 지켜보면서 화도 났다가 웃음도 났다가.(웃음)
아까 말한 ‘처음이라서 예쁜 순간’이란 어떤 단어로 치환할 수 있을까?
젊음이 아닐까? 혹은 불완전함일 수도 있고. 그 모든 순간이 영화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기린과 아프리카〉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내 몸이 에너지로 펄펄 떨리는 게 보인다고 하더라. 대개 20대 초반의 연기자들이 처음 시작할 때 품고 있는, 절대 감출 수 없는 그런 힘이 있다.
드레스, 스커트, 귀고리, 이어커프, 부츠는 모두 Givency.
함께 상영하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가 배우의 꿈을 심어준 작품이라고 들었다.
사랑의 질풍노도 시기에 이 영화를 만났다. 그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줄곧 나의 감성을 건드렸고 두고두고 꺼내 보는 작품이 되었다. 계속 보다 보니 양조위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 사람의 얼굴에 보이는 우수, 웃는데도 슬퍼 보이는 표정, 내면의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몸짓을 보면서 저렇게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최근 개봉한 박찬욱 감독님의 〈헤어질 결심〉이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어떤 장치에 기대지 않고 오직 두 사람의 감정으로만 충분히 서사가 이뤄지지 않나.
〈헤어질 결심〉이 걸출한 예외이고 최근엔 사랑을 다룬 영화가 많지 않다. 요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진득하게 다루는 걸 촌스럽다고 여기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
2000년대 초반에는 사랑 영화가 참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사랑을 궁금해하는 대신 더 자극적인 소재에 끌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이야기이니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인기인 것처럼 사람의 감정에 기대는, 사랑스러운 영화들도 언젠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슬리브리스, 스커트는 Prada. 귀고리는 Xte. 팔찌는 모두 Portrait Report.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고 말했다. 코로나 이후 모두가 극장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이런 시대에 모두가 모여서 영화를 함께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한창 영화를 보러 다니던 시절에는 영화제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면 옆 좌석 친구에게 ‘좋았지?’ 눈빛을 건네고. 각자의 감상을 쏟아내고. 같이 술을 마시고 또 영화 이야기를 하고. 그때의 행복한 느낌을 기억하고 싶어서 영화관에 가는 것 같다. 최근에 영화관에서 〈탑건: 매버릭〉을 봤는데 관객들이 말은 안 해도 다 같이 내적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서도 그랬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깜깜한 상태로 단절되어 있지만, 영화를 같이 봄으로써 말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에너지가 있다. ‘아, 우리가 이 영화를 좋아하고 있구나’.
작년에 〈미나리〉로 거대한 사건이 가득했다면 올해엔 스크린 밖에서 숨 고르기 중이다.
잘 쉬면서 재정비의 시간을 갖고 있다. 코로나로 한국 영화가 한동안 정체기에 있었지 않나. 먼저 개봉해야 하는 영화들이 많다 보니까 새로 제작되는 작품 자체가 적었다.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랄까. 계속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깐 쉬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윤여정 선생님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처럼 오래 연기할 수 있다면 지금 1~2년 쉬는 건 문제도 아닐 테니까.
드레스는 Valentino. 왼쪽 이어커프는 Portrait Report. 오른쪽 이어커프는 Goyu. 부츠는 Sergio Rossi.
줄곧 느낀 건 당신이 내면이 단단한 배우라는 사실이다.
무용을 하면서 깨닫게 된 건데, 나를 갖다 바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더라. 내 삶을 방치하지 않고 잘 살아내야 한다. 연기는 나의 직업이지 나의 삶 전체가 아니다. 만약 나의 일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과감히 연기를 포기할 것이다. 나를 희생하면서 혹은 내가 없어지면서까지 밀어붙이고 싶진 않다.
지속가능한 연기를 위한 일종의 ‘거리두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좋아하는 것 하나를 하기 위해서 싫어하는 것을 몇 개나 참을 수 있을까 매번 저울질한다. 무용에서 한 발 떨어져서 보니까 알겠더라. 내가 처음 무용을 시작한 이유는 단지 재밌어서였다는 걸. 참 미련했구나. 연기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일로서 오래 연기하고 싶다.
지금까지 약 40편에 이르는 작품을 했다. 계속 연기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연기를 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기를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니 테스트하려면 일단 작품에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딪히고 배우고 ‘아, 다음에는 여기서 배운 이걸 써먹어야지’ 했던 것 같다. 작품이 곧 연습이자 실전 무대였다.
과거 인터뷰에서 “한국무용과 연기는 10년을 해봐야 한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상업영화를 막 시작했을 때 ‘10년쯤 지나면 뭔가 보이겠지’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고도 들었다. 이제는 무엇이 보이나?
방향성은 알 것 같다. 방향이 보이긴 하는데 그 길이 고되고 힘드니까 시간을 끌면서 버티고 있는 중이랄까.(웃음) 돌이켜보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타입이더라. 남들이 모두 ‘이것보다는 저걸 해야지!’라고 해도 내가 좋으면 ‘이걸’ 한다. 앞으로가 더 험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내 길로 가야 하는 사람이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서 새삼 한예리라는 배우가 참 다채롭게 연기해왔고 좋은 필모그래피를 가졌다는 생각도 했다. 배우로서 당신은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나?
그래도 내 몫은 하는 배우인 것 같다. 어떤 역할이든 일단 맡고 나면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나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려고 노력한다.
드레스, 이너 톱, 쇼츠는 모두 Dior. 이어커프, 목걸이는 Portrait Report. 워커는 Dr. Martens.
배우는 영화라는 대상을 무한히 짝사랑하는 존재라고도 한다. 당신은 어떤가? 가끔 그 짝사랑이 응답을 해줄 때도 있나?
작품을 하면서 후회한 적 없는 것. 후회할 만한 작품을 만나지 않은 것. 영화란 너무 많은 사람들과 그만큼의 너무 많은 시선들과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작업이다. 작품이 큰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바라는 건 욕심 같다. 그저 작품 하나를 누군가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무탈하게 끝낸 것 자체가 기쁨이다.
지금까지 현명한 선택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선택이란 결국 자기다운 선택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납득이 되어야 다음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를 얻는 것 같다. 맞다. 지극한 자기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