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김현민 프로그래머가 말하는 '여성영화제를 끝마치며'

2001년 개봉한 <고양이를 부탁해>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보며 20년 전 그녀들이 지금 우리의 풍경임을 발견한다. 이 섹션을 기획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김현민 또한 이 연결감 앞에서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BYBAZAAR2021.10.13

여성영화제라는 연대  

〈69세〉〈우리집〉 〈고양이를 부탁해〉 〈한잔 하고 가시게〉
이런 시기에 영화제가 다 무슨 소용인가. 혹자는 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나에게 불온한 발언을 했다.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해외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객과 감독, 배우가 한 장소에 모여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할 수도 없다. 거리두기 단계는 변덕스러운 날씨와 같고, 극장 행사에 대한 이렇다 할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화제를 준비하는 일은 변수와 번복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경험이 절실하다는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다. 고립과 불안의 시대에는 느슨한 연결감이 필요하다. 나의 처지와 나의 불행, 나의 감정 등 오직 나에게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세계가 힘든 상황을 돌파하며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를 환대하고 격려하기 위해 누군가가 양팔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삶은 그것을 모르는 삶보다 훨씬 충만할 것이다.
 
〈모어 댄 섹스〉 〈일렉트로니카 퀸즈-전자 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소녀들의 혁명 - 우리들은 급진군주다〉 〈거침없이 당당하라〉
돌보다, 돌아보다. 이번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슬로건이었다. 이 두 문장을 연결하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회의를 거쳤는지 모른다. 팬데믹 2년 차라는 시급한 시기에 “화이팅”이나 “우리는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따위의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한 돌봄노동의 수렁에 빠진 여성들에게 또 다시 누군가를 돌보라는, 소위 모성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도 경계했다. 최우선은 이것이었다. 나 자신을 돌보라는 것. 나의 삶을, 나의 일상을,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지나온 나의 맥락을 돌아보라는 것.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재건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피의 연대기〉(2018)의 김보람 감독이 만든 영화제 트레일러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무기력과 불안에 질식하려는 한 여성 앞에 작은 소녀가 나타난다. 그들은 덩어리진 그 감정들을 함께 굴리고 터뜨린다. 소녀는 외부의 누군가일 수도 있고, 가시화되진 않았지만 내재된 나 자신의 가능성일 수도 있다.
 
〈성적표의 김민영〉 〈고양이를 부탁해〉 〈십개월의 미래〉
이번 영화제 화제작이었던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2001) 20주년 특별전도 그런 층위에서 기획됐다. 나는 이 섹션의 담당 프로그래머였는데,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필름 상태가 좋지 않은 영화의 디지털화였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이 작업의 취지와 의미를 이해했고, 〈고양이를 부탁해〉는 드디어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나는 곁에서 정재은 감독이 이 영화를 매만지고 되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필름의 해묵은 먼지가 털리고, 뿌옇고 지글거리는 것들을 거둬내니, 원래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기에는 맑고 솔직한 스무 살 여성들의 해사한 얼굴이 있었다. IMF 시대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사회에 던져진 젊은 여성들의 생생한 일상이 있었다. 그들의 꿈과 목표는 사회로부터 유치하거나 허황된 것,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은 젊은 여성들에게는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을 느낄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군다. 태희, 혜주, 지영은 그 디테일함으로 인해 2021년에 소환되어도 충분히 생명력 넘치는 인물들이다. 야외상영 토크 자리에 모인 배우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은 자신들의 경력 초기작이었던 이 영화의 촬영장을 회상하며 시간의 흐름 앞에 새삼 놀라워했다. 나는 이날 배두나 배우가 스스로에게 묻는 듯 툭 던진 말이 유독 인상에 남았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요.” 과거 자신이 연기했던 인물을 곱씹으며 현재의 나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에 시간의 비가역성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잊혀진 길〉 〈토베 얀손〉 〈셜리〉
지난 몇 달간 이 섹션을 준비하면서 영화의 시대 배경과 절묘한 데칼코마니 같은 코로나19 시대의 20대 여성들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못 견디게 궁금했다. 제목만 들었던 영화를 드디어 관람한 20대 관객들은 ‘지금 여기의 풍경’이라는 반응을 전해왔다. 20년 전 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울리고 다독인다니. 보이지 않는 이 연결감 앞에서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잇고, 영화제라는 장소는 공통의 담론을 형성하고 연대를 감지하게 하는 광장의 경험이 될 수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 〈내가 죽던 날〉 〈스쿨걸스〉〈리커버리〉
영화 기자로서는 꽤 경력이 쌓였지만, 영화제 프로그래머로는 처음 일하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영화제에 합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적어둔 메모가 하나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란 마음을 쓰는 일이다.” 담당하는 경쟁 섹션에 출품된 작품들이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게 공정하게 살피고, 애정을 담아 작품들을 초청하고, 해당 영화나 감독을 최대한 오독 없이 소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거기 초청된 모든 사람들을 챙기고, 사무국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관객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것. 그것이 프로그래머의 일이다. 영화제를 안전하고 성황리에 마친 지금 이 시점에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동안 나는 나를 잘 돌봤을까. 그것엔 얼마간 실패한 것 같지만, 나를 둘러싼 영화제 사람들이 나를 지탱해주었기에 첫 영화제를 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여성영화제의 친구들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좋은 영화도 하나의 탁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필름과 디지털, 과거와 현재, 국가와 언어 등 그 어떤 경계라도 훌쩍 뛰어넘어 깊게 스며드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지금 당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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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해당 영화 스틸컷
  • 웹디자이너/ 민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