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팬데믹 시대에서 꿈꾸는 자유

기약 없는 팬데믹 시대 속에서도 자유에 대한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얽매이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는 네 개의 노래.

BY박의령2021.09.14
자유와 평등을 위해 거리로
‘자유로움’이란 무엇일까? 맨 처음 도시에 이동제한령이 내려졌을 때 나는 집에 들어앉아 유튜브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영상을 보다 우연히 전설의 재즈 가수이자 인권운동가인 니나 시몬(Nina Simone)의 게시물에 시선이 멈췄다. 1969년, 그가 36살일 당시 본인에게 자유가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무대에서 자유를 경험하곤 하는데 그것은 두려움 없이 완벽하게 존재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웃고 있었지만 마치 웅장하고 놀랍고 보기 드문 무언가를 봤을 때처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니나 시몬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다. 그게 내가 ‘자유’를 설명할 때 들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예이며 우리 모두가 이 느낌을 알아야 한다.”
 
나는 즉시 걱정이 없는 상태를 떠올려보았다. 올해도 두려운 해다. 우리는 전염병을 겪으며 살았고, 앞으로도 전염병이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가 우리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풀밭에 누워 있을 자유, 낯선 사람을 만날 자유, 밴드의 공연을 볼 자유, 땀에 젖은 댄스 플로어에서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을 자유. 다른 사람의 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지하철이 그리울 정도다.
 
지난 일 년 동안 공공연히 가라앉아 있던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신체를 갖고 있으며, 위험 부담 또한 다르다는 것. 인종 차별,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는 여전히 독기를 가지고 강력한 폭력으로 남아 있다. 니나 시몬이 말했듯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 손상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David Hockney, 〈No. 1, 22nd May 2020〉, iPad painting ⓒ David Hockney

David Hockney, 〈No. 1, 22nd May 2020〉, iPad painting ⓒ David Hockney

이에 관한 오랜 기억이 떠오른다. 11살 때 어머니는 나를 게이 프라이드(Gay Pride)에 데려갔다.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를 행진했고 그곳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연약한 몸도 힘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신체적 존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수백 번의 행진과 시위를 해왔다. 20대는 새로운 도로로 인해 위협받는 삼림지대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집에서 생활하며 환경을 위한 직접적인 행동에 몰두한 시기였다. 경험을 통해 육체적 불복종이 얼마나 강력한 행동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전염병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서 ‘Black Lives Matter’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니나 시몬이 살아 있다면 분명 거기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그는 자유를 위한 오랜 투쟁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그는 피부색 때문에 커티스 음악원 (Curtis Institute of Music)에 입학할 수 없었다.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노래를 하며 곧 스타가 되었지만, 한 친구가 민권운동을 소개하기 전까지 무기력함이 지속되었다. 마침내 자신의 삶에서 고군분투했던 일들이 정치적 문제였음을 깨달았고 음악을 무기 삼았다. 앨라배마주 버밍엄의 한 흑인 교회 폭탄 테러에 대한 곡 ‘Mississipi Goddam’을 썼을 때 그는 마치 살인자들에게 10발의 총알을 다시 던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노래할 때 군중은 울었다. 노래가 끝나는 몇 분 동안 진정한 자유의 가능성을 맛봤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시위에서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너무 느려!”(‘Mississipi Goddam’의 가사 중 일부) 변화의 속도는 아직 느리지만 자유의 맛은 아직 남아 있다. 혀에 묻은 석청 꿀처럼. 나는 지금이 우리가 다른 세상을 만들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신체를 갖고 있든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곳 말이다. 다시 돌아올 여름이 어떨지 상상해보라. 이 엄청난 가능성을.
 
올리비아 랭(Olivia Laing)은 영국 출신의 작가, 소설가, 문화비평가이다. 제2의 리베카 솔닛이라 불리며 대표작이자 〈가디언〉지 등 세계 언론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외로운 도시〉가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 




근무 시간 외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아침이었다. 다아시에게 빨간 스웨터를 입히고 머리를 땋아주고 손을 흔들며 올해 처음으로 학교에 보낸 아침, 아름다운 침묵만이 들려왔다.
 
홈스쿨링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록다운 이후의 삶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내 딸 다아시와 마곳은 5세 미만이다) 친구들과 함께 태평한 저녁, 공원에서 주말을 보낼 수 없을 것이 너무도 자명했다. 3.0 단계 록다운이 시행되었고 우리는 비교적 운이 좋았다. 마곳은 여전히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고, 다아시의 학교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집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부담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의 과제를 보는 것만으로 시간은 훌쩍 흘렀다. 다아시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4살밖에 되지 않았다), 작은 성취라도 매번 보여주고 싶어했다. 우리는 업무 시간 틈틈이 롤 휴지로 성 쌓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다아시는 ‘곰(bear)’이나 ‘귀(ear)’라는 단어를 알기 전에 ‘합류(join)’ ‘해산(dismiss)’ ‘배경 효과 적용(apply background effect)’을 읽는 법을 배우며 마이크로소프트 팀의 언어에 능통해졌다. 이러한 연유로 아이들이 밤에 잠자리에 든 후에야 우리의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다행이야, 밤에 12시간 내내 잠을 자니까.’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다 두 살배기 마곳이 다시 이앓이를 하기 시작했고 몇 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와중에 다아시가 악몽을 꾸어 우리 침대로 기어들어왔다. 나 자신의 무의식 속의 자유조차 무너져버렸고 나의 이성, 인내심 그리고 내가 붙잡고 있는 모성애도 무너졌다. 씻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일들도 하기 어려웠다. 어서 이전처럼 아이들과의 생활이 분리되기만을 고대했다.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혼자 생각하며 지낼 수 있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80일, 약 2천 시간을 함께 보내고 3월 8일이 됐다. 영국 전역의 아이들이 완벽하게 학교로 돌아가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항상 곁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내 일이나 내 아이들을 돌보는 것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됐다. 나는 더 이상 수업이 진행되는 와중에 몰래 이메일을 볼 필요가 없었고, 영상으로 진지한 회의를 할 때 다아시가 내 머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찍혀 웃음거리가 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내 딸들과 그들의 영리한 재담이 몹시 그립기도 하지만 ‘고요함’이라는 더없이 행복한 현실이 감사하기도 하다.
 
헬레나 리(Helena Lee)는 영국 〈하퍼스 바자〉의 컨트리뷰팅 에디터이다. 아시안 작가들이 작품을 토론할 수 있는 플랫폼인 ‘이스트 사이드 보이스(East Side Voices)’를 운영한다.




쇠사슬을 벗어던지다
외국인들이 북한에서의 삶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 처음에는 내 언어 때문에 못 알아듣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영어를 더 잘한다면 훨씬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국 난 그들이 정확히 이해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화성에서의 생명체를 상상하는 일과 같으니 말이다.
 
북한에선 아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 온 나라가 고립돼 있다. 국가는 인터넷을 끊고, 언제 전기가 들어오는지 결정하며, 선전만 하는 TV 채널이 하나 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동굴에 갇혀 있는 것 같다. 태어났을 때부터 김씨 일가를 신이라 여기게 한다. 김일성이 죽었을 때는 그가 아들 김정일(현 김정은의 아버지)을 줄 정도로 국민을 사랑하며 영혼이 영원히 함께한다고 말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 머리털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다고 들었다.
 
일상이 정권이 정한 대로 돌아간다. 모든 집에 배급된 라디오에서는 아침마다 일정한 시간 음악이 울렸다. 농사를 짓는 일, 철도에서 하는 일, 동네를 청소하는 일 등 정부가 할당한 일을 하러 가야만 했다. 엄마들은 종종 쌀, 시계, 옷과 같은 물건들을 암시장에 팔았다. 아이들은 98%의 교육 내용이 프로파간다인 학교에 다녔다. 시제를 가르치면서 “우리는 미국인을 죽였고, 우리는 미국인을 죽이고, 우리는 미국인을 죽일 것이다”라는 예를 들곤 했다.
 
북한에선 의사의 한 달 월급이 1달러인데 그 돈으로 쌀 1kg도 못 산다. 그렇기에 정부가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것만으로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땅과 나무 속을 파낸다. 나는 뿌리, 식물, 꽃을 많이 먹었고 단백질원은 메뚜기와 잠자리에서 찾았다. 메뚜기는 수확 전 가을철에 많았기에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겨울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고 봄이 되면 아직 식물이 덜 자라 먹을 것이 없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
 
David Hockney, 〈No. 829, 2nd May 2011〉, iPad painting ⓒ David Hockney

David Hockney, 〈No. 829, 2nd May 2011〉, iPad painting ⓒ David Hockney

2007년에 탈출했을 때 나는 15살이었고 북쪽 국경마을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창 밖으로 너무나 밝은 중국 하늘을 바라보았다. 배가 고팠는데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면 먹을 걸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국에 가기 위해 우리를 도와줄 여자를 찾았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북한에 그대로 있으면 굶어 죽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를 도와준다던 여자는 나와 내 어머니를 인신매매업자에게 팔았다. 중국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1백 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팔렸고 나는 2백 달러가 넘었다. 처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국에서 강간을 당했다. 그것은 대가였다.
 
2009년 선교 단체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함께 가까스로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갔다. 북한에서 배웠던 한국에 대한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그들이 내게 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시간을 요하는 과정이었다.
 
책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오웰은 책을 통해 ‘이중사고’와 ‘생각 범죄’와 ‘언어가 어떻게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북한은 이런 생각들을 훔쳤다. 그들은 새로운 언어를 생각해내고 사전에서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삭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라면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랑은 김씨 일가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묘사할 때뿐이었다. 나 또한 ‘연민’이라는 단어를 몰랐고 아무도 나에게 그 개념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주변에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았을 때, 나는 그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지도 몰랐다. 많은 사람이 인간이란 본래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그런 개념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자유는 복잡하다. 처음에는 자유가 경이롭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유는 책임이라는 걸 깨달았다. 당신이 자유로울 때, 당신은 당신이 내리는 선택에 책임이 있다. 타고난 자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무섭지 않겠지만, 북한에서 온 나에게는 어떤 머리를 할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무엇을 공부할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지, 심지어 어떤 색깔을 좋아해야 하는지까지 너무 많은 선택이 갑자기 주어졌다. 많은 탈북자는 자유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건 분명하다. 나는 이를 해냈기 때문에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북한에서 나오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북한 정권이 국경 주변에 철조망을 설치했고, 전기 철조망이기 때문에 만지면 즉사하게 된다. 즉사 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 그들은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 국경 지역에 지뢰를 심고 있다. 그래서 나는 북한의 인권을 알리고 인식을 높이고 고국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카고는 북한에선 공상과학 소설에서도 상상 못 했을 곳이다. 자동차, 고층 빌딩 등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르게 생각할 자유, 상상하는 자유, 꿈꾸는 자유가 있어서다. 상상을 할 수 있고, 우리가 보는 이 멋진 도시들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나의 개인적인 꿈은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난 사람들이 음식만 충분히 먹으면 모두가 기뻐하고 불평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행복은 상대적이라는 걸 배웠다. 어렸을 때 내 꿈은 자유가 아니라 빵 하나를 다 먹는 것이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제 나는 감사하는 법과 만족해하는 법을 알고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싶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한, 나는 내 마음속에서 가장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박연미는 북한이탈주민이자 인권운동가이다. 2007년 15세의 나이로 탈북해 중국과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회고록과 연설을 통해 북한 인권을 알리고 있다.
 
 
밤의 축하
친구들, 난 네가 필요해. 너희 모두를 말하는 거야. 올해는 나의 인맥, 술 친구들, 극장 친구들, 축구 친구들, 외국에서 사귄 친구들까지 모두 빼앗겼어. 우연히 알게 된 친구들이 가장 그리워. 이제 그들을 만나기 정말 힘들어졌으니. 내 혀끝에 떠오르는 친구들의 이름. 군중 속에서 놓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위험하고 허무하고 거친 친구들 말이야.
 
나는 매일 밤 새 친구, 옛 친구들과 나가 놀고 싶어. 창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술집, 줄을 서고 테이블을 나눠야 하는 식당, 끈적끈적한 바닥이 있는 술집에 가고 싶어. 목소리를 높이고 바텐더의 관심을 끌기 위해 몸을 기울이고 서비스는 나쁘지만 맛있는 음식을 원하고 음악을 원해.
 
나는 곧 너희들과 라이브 공연에 갈 거야. 오래전 갔던 브릭스톤 뒷골목 어딘가의 클럽을 찾아볼 거야. 벽에 예술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고 무대에서 연주했던 밴드의 모습이 기억나.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선이 사라질 때까지 춤을 출 거야. 그러다 해가 뜨면 웨스트 컨트리 들판에서 춤을 춰야지. 런던 버스의 2층 갑판에서 춤을 출 거고 파리 거리에서 그리고 포르멘테라 해변에서도!
 
David Hockney, 〈Still from “Remember you cannot look at the sun or death for very long” 2020〉, iPad painting ⓒ David Hockney

David Hockney, 〈Still from “Remember you cannot look at the sun or death for very long” 2020〉, iPad painting ⓒ David Hockney

친구들아, 눈꺼풀이 아직 감긴 아침에 히드로공항에서 만나거나 금요일 밤 유로스타에서 만나 주말을 보내며 일주일 동안 함께 있자. 코르푸 해변, 텔아비브에 있는 클럽, 로마에 있는 바. 태양이 빛나는 지중해로 잠수하고 스피아나다나 비둘기 바위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식사를 하자. 저녁이 되어 마지막 빛이 사라질 때까지 잔을 들고 있어도 와인은 날카롭고 차가운 맛이 날 테지.
 
그러니 친구들아 나와 함께 가자. 그리고 이 긴 여름에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시간을 벼락치기로 메우자. 일출을 감상하자. 깊은 숲속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소리를 들어보자. 술을 마시면서 이 병에서 저 병으로 옮겨가며 깊게 휘저어대고 시를 인용하며 아무것에도 비웃지 말자. 해먹에서 자자. 산에 오르자. 폭포의 무게를 어깨에 느껴보자. 별이 무성한 하늘 아래서 손을 잡자. 춤추자.
 
알렉스 프레스턴(Alex Preston)은 영국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다. 첫 소설인 〈피 흐르는 도시〉로 스피어 최우수소설상을 받았다. 켄트 대학에서 영어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