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안규철의 글쓰기 태도

중견미술가 안규철은 성실한 질문자, 생각하는 조각가, 그리고 사물들의 통역가 등으로 불린다. 그의 조각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이 모두를 관통하는 글쓰기 태도에서 온다.

BYBAZAAR2021.06.12
 
안규철(b.1955), 〈단결, 권력, 자유〉, 1992, Cloth, wood, and leather, 170x110x5cm. 사진: 안규철

안규철(b.1955), 〈단결, 권력, 자유〉, 1992, Cloth, wood, and leather, 170x110x5cm. 사진: 안규철

 
나의 첫 사수들은 신입 후배들에게 번듯한 비평 대신 부고 기사를 쓰게 했다. 대상이 히치콕 정도의 유명인이라 치자. 부고 기사는 분량이 짧은 데다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라 다들 만만히 덤볐지만, 실상은 달랐다. 방대한 삶을 예닐곱 줄로 압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고, 코끼리 다리 만지는 장님처럼 변죽만 울리기 일쑤였으며, 그 생의 미로에 갇혀서는 “마지막 잎새가 떨어졌다”는 식의 어이없는 문장을 선택하는 패착을 범해 무려 13글자나 낭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촌철살인의 글쓰기를 가르치고자 했던 선배들의 의도를 알 턱이 없었기에, 우리는 폼 안 나는 토막 ‘기사’가 아니라 멋들어진 긴 ‘글’을 휘갈길 그날을 감히 욕망했다. 물론 20년도 더 된 일이며, 그사이 나는 조사 하나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훈계하는 선배가 됐다. 그러나 정작 나는 지금도 분량 넘치는 글을 쓰고는 편집디자이너에게 욱여넣어달라 떼쓰거나, 편집장에게 페이지를 더 달라고 통사정을 하거나, 어쨌든 번번이 정제된 글을 쓰는 데 실패한 듯한 자괴감에 시달리곤 한다.
 
특히 중견미술가 안규철의 글은 이런 나를 어김없이 비폭력적 자기반성의 순간으로 인도한다. 나는 담담하면서도 유려하고, 깊지만 간결한 그의 글을 좋아한다. 그중 사물에 관한 글을 모은 〈그 남자의 가방〉이나 〈사물의 뒷모습〉 같은 책을 머리맡에 두곤 하는데, 제 본분과 자리에 충실한 단어들,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하게 각인되는 문장들, 자간과 행간에 스며든 형형한 통찰력 등이 직조한 글을 읽다 보면 모조리 필사하고 싶다. 솔직함과 명료함이 빚어내는 리듬은 절제된 문장에 생기를 불어넣고, 다정한 필력 덕분에 외유내강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물론 그는 “시인의 빛나는 통찰력과 기호학자의 체계적인 분석, 그들의 정교한 언어에 비하면 조각가의 정처럼 무디고 느슨한 산문이 될 것”이라고 쓰거나 “얼어붙은 강을 깨는 도끼와 같은 글이 되지는 못했으나,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머그컵 같은 글로 읽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글의 힘은 나이를 더 먹고 내공을 더 쌓으면 나도 과연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자문하게끔 만드는, 즉 빛나는 미래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꿈꾸도록 하는 데서 나온다.
 
안규철은 그러나 ‘글 쓰는 조각가’이지 ‘조각하는 문학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작 그에게는 ‘얼마나 잘 쓰는가’보다 ‘왜 쓰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요즘도 그는 매일 아침 노트에 글을 쓰거나 드로잉을 하며 하루를 연다. 글과 드로잉은 세상이 기대하는 양상의 미술이 아니라는 점에서, 미술에 치이거나 반목해왔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처지다. “미술작품을 문학적이라 평하는 건 모욕에 가까운 비판”이었고, “미술작품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말이나 글이 미술의 순수성과 가능성을 훼손하고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혐의도 받았다. 시대가 변했다 한들, “미술, 특히 회화 분야에서 비미술적 요소인 언어가 도입된 사례는 동서양의 미술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어느 미술평론가의 단정 자체가 미술/비미술, 언어/비언어의 태생적 구분을 전제한다. 그렇다, 다른 건 다른 거다. 그러나 안규철은 ‘미술적’인 것에 대한 세간의 분류법 혹은 권위에 기대지 않고, 양손잡이로 태어났기에 양손을 쓰듯, 글을 쓰고 드로잉을 한다. 한때 거친 붓으로 표현적인 그림을 그렸던 시절도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찾아낸 가장 미술적인 방식은 글쓰기의 태도였다.
 
… 쓰고 나면 지울 수 없는 잉크가 아니라 연필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달팽이가 길을 가듯 더듬고 머뭇거리며 글을 쓴다. 쓰다가 막히면 그리고, 그리다가 막히면 쓴다. 되돌아보면 글자와 글자 사이에 내 생각이 지나온 궤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작가인지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연필을 들고 스케치북 위에서 보내는 이 시간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 남자의 가방〉 中)
 
미술가 안규철은 “일상과 사물 그리고 언어를 섬세하게 고찰함으로써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사유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성실한 질문자, 생각하는 조각가, 사물들의 통역가, 그리고 삶과 사물의 중개인으로서 그는 습관처럼 주변의 소소한 사물을 관찰하여 기록하고 이를 단초로 작업한다. 중절모, 손수건, 구둣솔, 의자, 외투, 망치, 칠판, 구두, 가방, 안경, 화분, 문, 노, 삽…. “임박한 소멸의 운명으로부터 구해내 하나의 미술품으로 다시 살도록 궁리하는” 작가에 의해 의미와 가치가 발견된, 특별할 것도 없는 물건들이다. 안규철은 이런 사물들을 의인화하거나, 상상력과 서사적 내러티브를 부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물들은 외형이 변형되거나, 기능을 상실하거나, 존재 가치가 전복되거나, 아예 맥락 자체가 달라지는 식으로 새로 태어난다. 그렇게 이들이 낯설게 읽히는 순간이 바로 일상의 이면이 드러나는 때다. 사물의 이야기는 그걸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들의 이야기, 그것이 통용되는 세상의 이야기이며,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진실과 보이는 물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그는 ‘사물의 뒷모습’을 통해 몰랐거나 묵인했던 우리의, 세상의 뒷모습을 경험하도록 이끈다.
 
허공에 던져진 모자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예정된 결말이 제거됨으로써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공회전의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 어떤 극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중략)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의 표면을 나는 점토를 빚어서 재현한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복제하고 재현하는 것은 실제로 무엇인가? 나는 손수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허공의 겉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가? 비어 있는 것, 없는 것을 재현하므로, 나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 남자의 가방〉 中)
 
위 각각의 문장은 작품 〈모자 Ⅱ〉와 〈사소한 사건〉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선후 관계라면 모를까, 궁극적으로 그의 글쓰기 태도가 작업을 견인하는지, 글이 작업의 영향하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확답할 입장은 못 된다. 다만 그가 수십 년 전부터 자신의 경험과 사유의 변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았고, 그의 선택에 의해 실천적으로 작업에 부지런히 반영되어왔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작업들은 그 인생의 결정체다.
 
 
〈머무는 시간〉, 2021.〈의자의 용도〉, 2021.〈완성되지 않는 벽〉, 2021.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는 안규철의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7월 4일까지)은 이렇게 탄생한 대표작들을 다시 만나는 자리다. 그는 과거 자신의 상황과 입장, 신념과 철학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전작들을 복원, 보완하여 선보이게 됐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생각의 가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속된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다고 본다. 30년 전 구둣솔이나 망치 같은 것에 의미를 담아 전시했을 때, 아무도 미술작품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든 걸 다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과연 어떤 사람의 생각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보이지 않는 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가?”
 
안규철은 미술가 혹은 미술에 대한 자기의심과 자기반성,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 등에 대한 답을 찾는 심정으로 작업에 매진해왔다. 이를테면 지배적인 재료들을 마다하고 사물에 천착하기 시작한 건 1987년 독일 유학 시절. 유럽과 우리 사이의 필연적 시차를 절감한 ‘이방인’은 보편성을 찾기 위해 만국 공통어 같은 사물을 주요 미술언어로 선택했다. “시인은 연필 한 자루로 대단한 작품을 만드는데 엄청난 물질의 옷을 입혀서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고백처럼, 조각가의 원죄의식에 대한 대안으로 차라리 조각을 물신화하지 않기를 택했다. 게다가 그 사물들을 현대미술에서 너그럽게 통용되는 레디메이드적 방식이 아니라 수공예적으로 일일이 만들며 시대착오적 입장을 견지했다. 본래 조각이란 세상을 단장하거나 기념비적인 역할에 충실해왔음을 기억한다면, 그의 이런 태도는 거대서사보다 사소한 이야기를, 영광스러운 성공보다 담담한 실패를 가정한다. 숱한 공회전의 역사, 반복되는 과거를 몸소 겪은 미술가는 감히 변혁과 혁신을 자신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실패를 의도한다는 건 실패를 극복해야 하는 무언가로 전제하지 않는다는 얘기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실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변의 사물과 텍스트를 가지고 사소하고 어이없는 농담을 하는 데 관심이 있다. 사람들이 몰두하는 중요한 일들에 무관심하거나 이러한 현실의 위중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삶을 그렇게 생존과 추락의 갈림길로 내모는 이 압도적 현실에 순순히 투항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1991)이라는 작품에는 의자가 길게 자란 화분과 두 개의 문이 등장한다. 삶이라 쓰인 문에는 손잡이가 아예 없어 황망하고, 예술이라 쓰인 문에는 손잡이가 다섯 개나 달려 있어서 혼란스럽다.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모두 전제한 동시에 유예한 상황에서 작가는 차라리 조용히 화분에 물 주는 쪽을 택한다. 삶도, 예술도, 예술 같은 삶도, 문을 열어 들어서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니, 이는 우리를 위한 질문이기도 하다. 만약 혁명과 구원이라는 명목 하에 여전히 너무 많은 걸 욕망하고, 너무 많은 걸 부정하며, 너무 훌륭하게 성취해내고 싶은 나라면 과연 무엇을 택했을까? 답은 모르겠지만, 이건 확실하다. 쓰고 싶은 야심이 빈틈없이 들어찬 글쓰기 태도로는, 안규철만큼 절제되고 단단한 글을 쓰기란 영영 요원할 거라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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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