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소리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하지만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여러 소리가 혼선된 상태에서는 평범한 소리조차 제대로 들을 수 없다. 아티스트 후니다 킴은 일상에서 채집한 소리를 떼어내고 붙여서 재조합한 뒤,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방식으로 무언가를 새롭게 듣게 하는 실험을 해왔다. 전시에서 단순히 디지털화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장치와 함께 작동할 수 있도록 돕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감각을 지각하는 방식의 전환을 유도한다. 지난 1월에는 관객이 미술관 밖 일상에서도 사적인 몰입을 할 수 있도록 ‘프로덕트’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네오 프로덕트’는 무엇이며, 현재는 어떤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까?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했지만 소리를 다루는 아티스트가 됐다.
일본 유학 시절, 사운드 아티스트를 만났고 우연히 소리 작업을 시작했다. 사운드를 틀면 아무리 큰 공간이라도 꽉 채워지지 않나. 공기의 흐름을 바꾸는 소리의 성질에 완전히 매료됐다. 하지만 매체가 달라졌을뿐, 조각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 덩어리를 만든다. 이러한 ‘공간적 소조’는 ‘공간 작곡’을 가능하게 하는데, 소리를 담은 장치를 흔들거나 밑에 위치한 판을 움직이는 등 상황에 변화를 주면, 관객은 벽에 반사된 소리를 천장에서 듣거나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는 공감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당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전시는 2018년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 «익숙함이 쌓이고 녹아내리는‐일상에 대한 낯선 번역»이다.
초기에는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고 즉흥 연주를 했는데, 관객이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아파라투스’라는 소리환경 장치를 만들고, 그간의 실험을 하나로 묶어 선보인 것이 페리지갤러리 전시다. 하지만 내 작업은 여전히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프로토 타입’, 일종의 계속되는 실험이다.
〈Space Composition_Physical Score#1, “Familiarity·Cumulating·Melting”〉, 2018, 페리지갤러리서울.
아파라투스는 ‘디바이스’의 어원이다. 하나와 하나를 연결해주는 매개체, 통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관객이 이 장치를 통해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전에도 관객이 참여하는 ‘체험형’ 전시는 존재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당신이 전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터랙티브적 요소는 무엇인가?
관객의 몰입, 그리고 지금까지 익숙하게 느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사유를 전환할 수 있는 ‘트리거’를 제공했다.
올해 1월에는 «무심한 귀를 위한 애피타이저 A부터 C: 네오 프로덕트 선언»전을 열었다. 소리로 샤워를 하는 듯한 ‘사운드 샤워’가 가장 인상 깊었다.
‘프로덕트’를 소재로 삼은 이유가 있나?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건, 결국 새로운 걸 접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방식의 작업을 소개하는데, 그 작업을 보기 위해서 ‘줄을 서야 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물론 작업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작업에 몰입하고 사유하려면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관객에게 작업에 몰입할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람도 많고 제대로 작업을 즐길 수 있을지 불안해하며 줄을 서지 않나.(웃음) 그러면서 작업을 본 뒤에 깊게 사유하고 평온을 찾으라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간을 들여 작품을 경험하려면 집에 가져가거나 일정한 공간에 장기적으로 놓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프로덕트’라는 형태를 가져왔다. 기계적 기능을 하는 프로덕트를 넘어, 이제는 하나의 정신적 사유체로 활용될 수 있도록 프로덕트의 새로운 개념을 제안했다. 앞으로 패션 브랜드 쇼룸 같은,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협업할 계획도 있다.
웹사이트(neoproduct.net)에 일곱 개의 ‘네오 프로덕트 선언문’을 발표한 것도 흥미로웠다.
마지막 선언은 “네오 프로덕트는 대상을 보고 나를 반사시켜야 한다.”인데,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현대 프로덕트 디자인의 모토가 되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을 오마주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을 명확히 보여주려고 선언문의 형태를 빌렸다. 오로지 하나의 상에 집중한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소리를 매개로 또 다른 이야기를 했던 나의 평소 작업과 달리, 네오 프로덕트는 좀 더 소리와 사유에 집중한 작업이다.
자율주행에 쓰이는 기술을 활용한 장치를 몸에 임플란트한 채 거리를 걸었던 〈데이터 스케이프 프로토타입〉도 올해 전시로 만날 수 있다고 들었다.
우리는 여행과 같은 낯선 환경에 놓였을 때 평소와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사유한다. 일상에서도 이런 스위치를 작동시키고 싶었다. 보통 풍경은 시각적 요소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후각, 촉각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데이터 스케이프 프로토타입〉은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하나의 풍경이 아닌 ‘위상이 변환된 풍경’으로 인지하고 감각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실험이다. 이는 10월, 국립현대미술관 «멀티버스»전의 〈디코딩 되는 랜드스케이프〉라는 작품으로 이어진다.
늘 새로운 센서에 관심이 많다. 해킹을 해서 원래 의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행동을 동시대의 것으로 하려면 기술이 어떻게 사물을 인지하고, 인간이 어떻게 그 기술을 다르게 쓸 수 있을지 계속해서 이해하고 관찰해나가야 한다.
네 명의 작가와 함께 ‘결여’를 주제로 전시를 연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술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여된 것들을 어떻게 작업으로 풀어낼지 고민중이다. 이 전시는 7월, 두산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프리랜스 에디터 황보선은 올해 ‘즐겨 찾는 갤러리’를 만들 예정이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작품을 경험하고 싶다. 그림을 그릴 때 느껴지는 감각적인 기쁨. 최지원이 작품을 통해 나누고자 하는 건 그것에서 시작한다. 동시대 미술을 지속해서 소개해온 디스위켄드룸 앞을 지나다 최지원이라는 낯선 이름을 발견한 건 지난해 봄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간 전시장 안에는 여자-인간 형상들이 단체로 무표정을 하고 가공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풍경에 배치돼 있었다. ‘물광’의 정석인 듯한 맑고 투명한 피부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는데, 백자 같은 얼굴들은 눈물 줄기를 쏟는가 하면 핑크 하트 풍선을 사이에 두고 볼을 맞대기도 하고 벼락과 불꽃이 날리는 화마에서도 그저 ‘멍 때리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무심한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했다. 서늘한 분위기였지만 냉소보다는 천연덕스러운 유머가 감지돼 입꼬리를 올린 채 전시를 보았다. 갤러리 관계자에게 미지의 작가에 관해 물어보니 20대 중반의 대학원생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이미지로 각인된 채 익명의 관계망 안에서 고립된 일상을 영위하는, 자신과도 같은 오늘날의 청춘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봄, 최지원 작가의 첫 개인전 «Cold Flame»에 많은 이들에 주목했고 이내 그는 뜨겁게 호명되는 1990년대생 아티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뾰족한 것들의 방해 4〉, 2020, Oil on canvas, 90.9x72.7cm
〈뾰족한 것들의 방해 3〉, 2020, Oil on canvas, 90.9x72.7cm.
동시대 미술을 지속해서 소개해온 디스위켄드룸 앞을 지나다 최지원이라는 낯선 이름을 발견한 건 지난해 봄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들어간 전시장 안에는 여자-인간 형상들이 단체로 무표정을 하고 가공의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풍경에 배치돼 있었다. ‘물광’의 정석인 듯한 맑고 투명한 피부가 묘하게 시선을 끌었는데, 백자 같은 얼굴들은 눈물 줄기를 쏟는가 하면 핑크 하트 풍선을 사이에 두고 볼을 맞대기도 하고 벼락과 불꽃이 날리는 화마에서도 그저 ‘멍 때리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무심한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했다. 서늘한 분위기였지만 냉소보다는 천연덕스러운 유머가 감지돼 입꼬리를 올린 채 전시를 보았다. 갤러리 관계자에게 미지의 작가에 관해 물어보니 20대 중반의 대학원생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이미지로 각인된 채 익명의 관계망 안에서 고립된 일상을 영위하는, 자신과도 같은 오늘날의 청춘을 기록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봄, 최지원 작가의 첫 개인전 «Cold Flame»에 많은 이들에 주목했고 이내 그는 뜨겁게 호명되는 1990년대생 아티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뾰족한 것들의 방해 2〉, 2020, Oil on canvas, 90.9x72.7cm
〈뾰족한 것들의 방해 1〉, 2020, Oil on canvas, 90.9x72.7cm.
그로부터 반년 뒤, 한남동으로 이사를 앞둔 디스위켄드룸엔 오늘 촬영을 위한 최지원 작가의 최신작 다섯 점만 걸려 있었다. 최지원 작품의 시그너처인 도자기 인형을 연상케 하는 형상들이 클로즈업돼 화면을 빈틈없이 채우고 시야 가운데 푸르고 붉은 식물이 가로지른다. 벽에 걸린 〈뾰족한 것들의 방해〉 시리즈를 등지고 선 작가는 친근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야 정중앙을 차지하는 가시가 솟아 있거나 뾰족한 잎이 돋아난 식물 때문에 보기만 해도 까슬거리고 따가운 느낌이 들죠. 이 그림들을 보고 그런 촉각적인 느낌을 받았으면 했어요. 동시에 시야를 가리는 무언가가 있어도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겠다는 대상의 의지력도요.”
〈The Crying Woman〉, 2019, Oil and acrylic on canvas, 72.7x60.6cm.
〈Meaning of Cliche〉, 2019, Oil and acrylic on canvas, 89.4x145.5cm.
예고 졸업하고 예대, 그리고 대학원, 그림 그리는 사람의 “평범한” 과정을 거쳐온 최지원에게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이나 미술학원에서 볼 수 있는 석고상 표면의 반질반질한 질감은 오랫동안 붓질을 충동하는 무엇이었다. “그러다 유럽 빈티지 도자기 인형을 보게 됐는데 그 순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최대치로 솟았어요!” 이후 작가는 자신과 주변인을 가공하고 도자기 인형의 매끈하고 반짝이는 느낌을 덧발라 자신만의 시그너처 형상을 만들어냈다. 유화로 그린 얼굴 부분은 붓 터치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대체로 아크릴로 칠하는 배경은 쓱쓱 덜 치밀하게 표현하는 그 차이가 흥미로웠다. “그런 대비를 의도했어요. 시각적, 촉각적 즐거움과 쾌감을 증폭시키고 싶었거든요. 그릴 때 제가 느끼는 감각적 쾌감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어요.” 반복되는 ‘감각’이라는 말이 신선했다. 회화라는 매체가 오늘날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에 대한 대답 같기도 했다. 순정적이고 전통적인 화가로서의 정체성 기저에 희열이 있다는 게 좋았다. “소설을 쓸 때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고나가는 경우가 있다는 소설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데도 언어로 구현되는 문학작품의 경우에는 내러티브의 뼈대에서 작업이 시작돼요. 반면, 미술 작업의 경우에는 특정 서사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풍선, 눈물, 불꽃, 그리고 요즘 많이 등장하는 가시는 의미를 내재한 도상이라기보다는 보는 이의 감각을 극대화해주는 장치라고 보면 돼요.”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따뜻한 물에서 소금 덩어리가 녹듯이 자연스럽게 배어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인성이 느껴지지 않는 인간 형상이 눈물 흘리는 모습을 더 인위적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정도의 생각을 갖고 시작해서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2021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여러 감정과 정서를 인상에 담게 돼요. 그 과정이 부지불식간이라서 어떤 부분이 어떤 걸 의미한다고 1대1로 매칭해서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와 같은 모호함, 우연성, 해석의 자유가 시각예술의 매력인지도 모르겠어요.”
〈뾰족한 것들의 방해〉 연작은 얼마 전, 을지로 상업화랑에서 열렸던 기획전 «연기와 연기»에 출품됐다. 대학원 첫 학기 수업에서 만난 송유나, 윤혜린 작가와 ‘리소딴’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 전시다. “신진 작가들은 주로 단체전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의미한 그룹전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셋이 나눈 무수한 대화 속에서 각자의 취향, 동시대 미술계의 상황,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 자연스럽게 전시 기획으로 발전하게 됐고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이 결정되자 꼬박 일 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작업했죠.” 전시의 제목이자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단편소설 〈연기와 연기〉를 쓸 때도 박찬욱 감독, 정서경 작가처럼 컴퓨터 한 대를 놓고 셋이 함께 썼다. “작가로서 독립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가면서 활동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이때 서로 의지하고 연대하면서, 또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면서 버팀목이 되는 동반자적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요.” 이번 학기를 마친 후에는 “얼른 논문 쓰고 졸업해서” 더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 대부분의 사람에게 침잠과 고립의 시기였던 작년과 올해, 최지원은 화려하게 작가로서의 시작을 알렸다. “새하얀 캔버스가 비극이라고 말하는 작가도 있던데 작가님에겐 어떤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답했다. “두근거리고 설레는 대상이에요. 대학원 진학할 때 ‘작업량을 많이 하자’라는 결심으로 아르바이트도 접었어요. 열심히, 많이, 솔직하게 작업하자, 지금으로선 그 생각뿐이에요.”
프리랜스 에디터 안동선에게 회화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유대감이 샘솟는 미술 장르다.
얼마 전 끝난 원앤제이 갤러리에서의 3인전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에 선보인 작품은 두 〈아빠〉에게서 태어난 네 〈자식〉들이다. 예전에도 ‘조각 육아’라는 단어를 썼는데 연장선에 있는 작품인가?
그렇다. 조각을 만드는 방식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생각해서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육아라는 과정 전반에 관심이 있다. 한편, 육아가 남녀라는 이분법적 세계관 아래서 펼쳐지는 것처럼 조각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남성적인 조각, 여성적인 조각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것에 반감이 있는데 그래서 육아라는 개념을 안티테제로 도입한 것이다. 이번 작업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아이를 낳는다는 기본 법칙을 완전히 거슬러, 두 명의 아빠한테서 나온 생물학적인 자식으로서의 조각을 나의 정체성과 묶어서 표현했다.
‘퀴어’라는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2020년 5월 P21에서 열린 개인전 «샴 Siamese»이 어떤 선언이자 변곡점이었던 것 같다.
게이 정체성을 가지고 한 작업은 그간 뜨문뜨문 선보여왔는데 개인전에서 필두로 내세운 건 P21이 처음이었다. «샴»에 출품한 작품들이 워낙 노골적인 게이 컬처와 연계된 작업이라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데 사실 딱히 계기는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표현이 되었고 한번은 해야 했을 과정에 있었다고 본다. 게이 컬처가 작품 전면에 드러난다고 해서 그대로 게이 아트인 것은 아니고 또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제8회 아마도전시기획상을 수상한 큐레이터 추성아의 기획으로 아마도예술공간에서 4월 8일까지 열린 기획전 «Shadowland»)에 선보인 작품들의 경우에도 퀴어적인 요소가 개입됐다. 조각 하나를 만들고 이걸 만들 때 발생한 부산물을 가지고 첫 조각에 대응하는 또 다른 조각을 만들어서 둘을 한 세트로 묶었다. 하나의 재료에서 나왔기 때문에 스테이트먼트(statement)에 ‘동성 교배’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P21 전시 이후 조각을 만드는 방법론 자체에 퀴어를 투입해 전개하려고 한다.
2021년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열린 〈Shadowland〉에서 〈그래, 차라리 그렇게 감정에 호소해〉, 〈문제를 삼지 않으면 불안해?〉 사이에서 포즈를 취한 최하늘 작가
«샴»에서는 한국 현대조각을 얘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김종영 작품의 형상을 인용했는데, 그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 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독해할 수 있는 전시였던 것 같다.
불친절한 전시였다는 걸 인정한다. 김종영이라는 한국식 미니멀리즘 조각가가 격변의 근현대사를 지나오며 어떻게 그토록 사회 현실에 개입하지 않고 추상 조각에 몰두하며 살았는지 의아함이 들었다. 광복부터 한국전쟁, 4·19혁명까지 겪으면서 말이다. 나중에 좀 더 리서치하면서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수 신분으로서 나름의 사회 참여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시작은 그런 의구심에서 출발했고 명문가에서 태어나 선비 같은 삶을 살았던 김종영 조각의 고결함에 퀴어, 페티시 코드를 접목해야겠다는 발상을 했다. 그의 조각을 따와서 그 위에 게이 컬처를 상징하는 여러 조각을 덧붙이거나 씌우거나 칠해서 조각을 ‘오염’시켰다. «샴»은 하나의 몸체에 김종영의 머리와 최하늘의 머리가 같이 달린 작업인 셈이다.
당신의 작업 노트를 본 적이 있는데 공부 잘하는 모범생 필기 노트를 보는 줄 알았다.(웃음)
논리적 체계부터 만드는 공정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던 걸로 기억한다. 드로잉을 여러 번 한 다음에 조각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노트를 썼는데 즉흥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지금은 그 방식에 한계를 느낀다. 학부 시절에는 미감을 펼치는 프래절(fragile)한 작업을 주로 했는데 나의 감각에 의지하는 작업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 방식을 완전히 폐기하고 철저히 계획해서 결과물이 나오는 방식을 3~4년 정도 이어온 건데 피로감이 상당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다시 감각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2018년 산수문화에서 열린 〈Cafe_kontakthof〉 전체 출품작.
젊은 조각의 기수라고 불리는 만큼 많은 그룹전과 개인전에 참여하고 있다. 커리어의 시작점에 있는 작가에게 좋은 기회이기도 한 동시에 지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치긴 하지만 늘 재밌을 순 없으니까. 나에게 전시란 스스로 과제로 지정하고 그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플랫폼인데 이때 늘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고 완전히 깨끗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의 조각이 나오고 그 작품에서 미흡했던 부분이 새로운 조각의 출발점이 되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건 너무 좋은 일로 생각한다.
회화를 하는 작가들에게 21세기에도 여전히 회화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를 묻곤 하는데, 관람자의 입장에서 조각은 ‘설치’와의 변별력부터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할 때 일부러 더 ‘조각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조각과 설치를 구분할 때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쉽게 말하면 어디에 놓여도 상관없는 건 조각이고, 맥락이 있는 장소의 특정성이 중요하다면 설치라고 생각한다. 비물질화된 세계, 초연결 사회에서 우리가 더 자유롭게 소통하고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과 환상을 갖기도 하지만 분명히 필수적인 부분에서는 물질이 있을 거고 거기서 조각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가속화되는 변화의 시간 속에서 물질은 어떤 존재로 남아야 할까?” 그런 질문이 조각가로서 나의 평생 과제가 아닐까.
물성이 확실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무엇보다 ‘얘네들’을 친구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 크기여야지 만들 때 재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조각이 점점 작아지는 거, 그래서 일종의 굿즈로 창작되고 유통되는 걸 경계하는 편이다. 그래서 절대로 굿즈가 될 수 없는 크기를 유지한다.
프리랜스 에디터 안동선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예술가들의 미학적 실천을 좇으며 마음과 정신의 확장을 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