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Section〉, 2020, 종이 배접 패널에 종이, 목공용 접착제, 아크릴, 60x80cm(each).
작년 겨울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개인전 «Satellites: 위성들»을 통해 당신의 작품 세계를 인상적으로 접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다가 공인중개사가 된 아버지의 전근과 투자 계획에 따라 위성도시를 돌며 자란 여정의 일상과 풍경을 유일무이한 시각언어로 표현했다. 성남, 분당, 수지 등 내가 살았던 모든 도시가 사실상 아파트촌이고 모듈화돼 있다. 그 삭막한 풍경이 싫으면서도 거기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와 같이 계획된 신도시에 가면 편안함을 느낀다. «Satellites: 위성들»은 이런 도시에서의 일상과 풍경이 나의 미학적 출발점이자 아이덴티티라는 걸 말하는 전시다.
〈Castle.005〉, 2020, 종이에 유성 펜, 마커, 아크릴 4T, 67x40cm.
디지털 시대의 풍경화를 창안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고흐나 모네, 터너 같은 근대 작가들의 풍경화를 볼 때 독특한 관점이 있을 것 같다.
조르주 쇠라를 좋아한다. 쇠라는 점이라는 회화적 표현의 최소 단위를 확장해 풍경화를 그렸다. 그럼 디지털 시대의 ‘점’은 무엇인가, 했을 때 나는 그걸 ‘픽셀’이라고 봤다. 디지털 화면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픽셀 말이다.
〈Swimming Pool after School〉, 2020, 종이 배접 패널에 아크릴, 100x80cm.
픽셀로 그린 회화라, 모든 작가가 그렇겠지만 특히나 조형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매우 고유한 방법처럼 보인다. 어떤 영감과 계기가 결합한 건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했다. 중학교 때까지 회수권을 내고 버스를 타다가 어느 순간 부터는 교통카드를 갖다 대면 되었다. 사용자 환경, 즉 인터페이스가 실생활에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픽셀은 싸이월드 시절, 방 꾸미기 같은 걸 하면서 처음 접하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대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이모티콘의 조상 격인 사이언(CYON) 폴더폰이나 스카이(SKY) 슬라이드폰의 문자 이모티콘을 디자인하면서 더 익숙해졌다. 지금은 컴퓨터나 휴대폰 화면에서 표현되지 않는 색이란 없는데 불과 15년 전만 해도 2백56가지 색만 쓸 수 있었다. 그때 가장 힘들었던 게 살색이 없어서 주황색, 노란색을 섞고 하이라이트로 흰색을 써야 했던 거다.(웃음) 포토샵에서 화면을 크게 확대해 점으로 하나씩 찍어가며 이모티콘을 만들었는데, 그 자체가 매우 추상적인 조형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과정이었다.
아파트 단지, 빌딩숲, 자동차 도로와 인도, 숲과 공원, 운동장 등을 추상화해 그래픽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종이 패널에 아크릴 물감으로 칠하고 목공용 접착제로 붙이는 아날로그적인 작업으로 이뤄지는 게 뜻밖이었다.
회수권처럼 물성이 있는 것도 경험했고, 동시에 인터넷과 컴퓨터 인터페이스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걸 목도하기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모두를 반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주제가 되는 지역의 인공위성 지도를 캡처해서 그대로 본을 떠 그리면서 재배치나 변형을 하는데, 이때 서현역의 랜드마크인 쇼핑몰은 친구를 기다리던 곳으로, 수영장은 방과 후 재미있게 놀던 기억이 담긴 곳으로 개인적 경험에 의해 재해석된다.
〈Night_Tokyo.02〉, 2020, 종이 배접 패널에 종이 블록, 아크릴, 50x50cm.
아파트 입면을 연상시키는 〈캐슬(Castle)〉 시리즈는 또 다른 스타일의 연작이다.
아까 최소 단위를 픽셀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어릴 때는 벽돌이었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었고, 지금은 철과 유리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창문이 현실세계의 픽셀일 테다. 지난해,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 아이와 종일 집에 있으면서 베란다 너머 창문을 관찰하게 됐다. 수백 개의 창문에는 각자 다른 삶의 풍경이 있었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인류애가 샘솟았다. 거기에 추억들이 중첩되며 칸으로 나눠진 만화를 그리듯 〈캐슬〉 시리즈를 이어갔다. 또, 동시다발적으로 플레이되는 개개인의 서사가 가득 찬 벌집 같은 창문들에 영감받아 여러 모양의 창을 만들고 프레임마다 애니메이션 영상이 돌아가는 〈윈도(Windows)〉도 제작했다.
〈캐슬〉 시리즈는 조금 큰 사이즈의 모형 자 같기도 하다.
직사각형, 동그라미, 오벌형, 플러스 기호 등 좀 특이한 도형을 모아놓은 모형 자. 모형 자를 정말 좋아한다. 취미로 모으기도 하고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모형 자를 10인치 LP 판처럼 세워두기도 한다.(웃음)
소설에 비유하면 어떤 건 전지적 작가 시점이고 어떤 건 삼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도시나 도시에서의 일상이라는 게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지 않나. 작품을 만들 때 일정한 궤도로 돌고 있는 인공위성처럼 조형적으로 가리고 싶은 것들은 가릴 수 있는 거리와 시점을 설정한다. 지금까지는 카메라 렌즈를 조절하듯이 공간 축을 이동했다면 다음 전시에서는 시간 축을 이동해보려고 한다.
그렇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가 21세기의 진짜 시작”일 거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모든 기준이 송두리째 바뀌는 놀라운 사건이지 않나. 이후 나를 둘러싼 환경이 또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보는 거다. 요즘 리서치를 많이 하고 있는데 1920년대 나온 걸작 SF영화 〈메트로폴리스〉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건축, 실내 인테리어, 로봇 디자인, SF 서사 등 웬만한 모티프는 다 이 영화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 밖에 서로 만나지 않으면서도 각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긴 형태의 공원이 필요하다든지, 공중정원이나 유토피아 같은, 건축가나 이론가들의 청사진도 살펴보고 있다.
안동선은 프리랜스 에디터이다. 2014년 1호부터 〈바자 아트〉를 만들었고 다양한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좇고 있다.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Beam Me Up!≫ 전시 전경.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나 미술관·박물관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데이터를 사용하거나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흩어진 이미지를 관객에게 찾게 해 SNS에 올리게 하거나. 복제품과 필터를 한 번 거친 것들에 큰 관심을 보인다. 오늘날 사물이 출력되는 알고리즘, 즉 3D 프로그램을 통해 본 사물이 그대로 기계로 뽑아져 나오는 과정이 블랙박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출력 버튼을 누르고 고작 사포질을 하는 정도의 일 안에서 내 신체와 눈을 블랙박스처럼 이용해보고자 한 것이다. 결국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기계가 될 수 없고 기계가 가진 2D 공간과 실질적으로 내가 다루는 물질 공간과의 어떤 간극을 보여주자고 했다. 로댕 미술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데이터와 3D 프로그램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도형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로 간극을 벌리거나 분신술처럼 늘려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새로운 전시 «Beam Me Up!»은 영화 〈스타 트랙〉에서 함장인 주인공이 우주선으로 전송 귀환할 때 기관장에게 하는 명령이다.
공간 이동은 백 년 전 소설에도 있었다. 에드워드 페이지 미첼(Edward Page Mitchell)의 〈육체 없는 인간(A Man Without a Body)〉(1877)에서는 단순히 시공간을 이동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물이 어떤 이미지나 정보로 해체된 다음 전송돼서 다시 재구성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스타 트랙〉에서 빔을 통해 신체가 나오는 상상력이 지금 일부 현실화되었다고 가정했다. 3D 스캔을 해서 데이터로 옮긴 다음 출력한다는 개념이 사물의 세계에서는 이미 현실화돼 있고, 실질적으로 우리 삶을 많이 바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디다스에서 쿠셔닝을 만들고, BMW에서는 차의 몇 % 이상을 프린트한 출력물로만 구성해 출시하고 있다. 보잉 사도 마찬가지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런 무형의 것들이 결국 부가가치를 생산하니 국제 저작권 협회에서 가상 데이터에 대한 세금을 매기려고 추진 중이라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우리 삶에 큰 변화가 없어 보여도 사물의 정체성은 달라졌다. 그렇다면 미술도 재고할 것들이 있다고 봤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생경한 기분이 드는 건 흰 스티로폼에 작품이 올라가 있어서인 것 같다.
스티로폼이 중요했다. 작업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조각을 좌대에 올려놓은 전시를 별로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좌대 위에 작품을 올린다는 건 환영의 속성을 갖게 하는 것이며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로댕이 좌대를 벗어나면서부터 현대적인 흐름이 시작되었다. 관람객이 스티로폼을 좌대로 볼 것이냐 일상에 널리고 널린 사물로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전시의 해석을 완전히 다르게 할 수 있다.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시럽을 마구 뿌린 망친 케이크 같은 느낌이 있다.
(웃음) 표면에 손자국과 밀린 자국이 훤히 보이며 색도 불균형하다. 작업을 할 때 그리기와 만들기 사이를 오간다. 일반적인 성형이 아닌 복제를 위한 재료를 사용한다. 흙은 천연수지고 합성수지는 인공으로 만든 점토라고 보면 되는데 나는 후자를 사용한다. 내 작품을 보고 외형적인 완결을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상 완성된 그림을 생각하지 않고 만든다. 애당초 목적이 없다. 디자인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것에 감흥도 없고. 알고리즘을 짠 다음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변수를 좋아한다.
〈달빛 곡예단-좌로, 앞으로, 좌로, 앞으로 한 번씩〉, 2021, 에폭시. FRP. 탈크. 안료. 가변크기.
외형적인 완결도 그렇고 색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다.
이전 작품이 보편적으로 아름다운 색을 지녔다면 이번 작품은 색채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색은 장식적인 측면이 있지만 나에게는 원본의 속성을 하나씩 부여할 수 있는 고유의 특성이다. 복제해 같은 색을 입히면 에디션이 되는데 내 작업은 모두 유니크다. 다른 물질을 두세 개 섞어 나도 모르는 상태로 조합하고 발라 우연적인 상태로 완성한다. 이 얘기는 처음 하는데 작품을 애칭으로 ‘도깨비’라 부른다. 유령이라 생각하면 뭔가 구슬프고 사회적 약자 계층 같은데 도깨비는 사물 자체에서 의식이 생겨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것들도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제3의 의지를 갖는 무언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웃음) 그러한 측면에서 복제할 수 없는 색상이나 대상이 있는 사물보다 좀 더 개별적인 구분을 위해 색이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상의 물질과 미술품이 섞여 있다. 공간 이동을 하다 해체되었다 다시 붙는 사이 오류가 난 것처럼 이곳에 있어야 할 것이 저곳에 붙어 있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두 종류인데, 미술사에서 가져온 레퍼런스와 오브제, 메인 조각인 불 꺼진 서울 거리의 달빛 아래서 본 사물로 나눠진다.
생활이 되게 규칙적이라 불 꺼진 서울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웃음) 이번에 어쩌다 밤길을 보면서 사람들이 길거리 쇼룸을 재미있게 연출하며 즐기는 것을 봤다. 아주 작은 예를 들자면 곰인형에 마스크를 씌워놓은 풍경이 일상에서 미학화되고 있는 사물들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실제로 오브제를 조합해 갤러리에 갖다 놓으면 아상블라주(Assemblage) 조각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일상의 사물은 예술을 추구한다 생각했고 그러한 사물들을 뒤섞어 놓아 각 세대가 모두 다른 이미지로 인식하기를 바랐다.
〈Wheels within Wheels〉, 2020, 에폭시퍼티. 에폭시. FRP. 탈크. 안료. 가변크기.
바퀴가 드러난 〈Wheels within Wheels〉는 명백하게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인용했다.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작업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노골적인 작업이 없었다. 뒤샹을 재인용한 파생물을 모아놓았다. 강남의 한 뷰티숍에서 뒤샹과 동남아시아 유적 속에 나올 것 같은 바퀴와 구보타 시게코의 영상 작업 등을 섞어 전시 형식의 프로젝트를 한 걸 봤다. 미술의 모든 어법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바퀴의 속성이 명확하게 굴러가는 것 아닌가? 시공간을 바꾸는 것을 직관적 보여줄 수 있는 조형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작품을 다시금 불러내어 전시장에 세우는 의도가 있을 테다.
보통 차용이라고 하면 상대를 공격하고 ‘내가 최고야’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지금은 오히려 차용이라는 단어를 보기가 힘든 것 같다. ‘참조’ 정도? 확실한 건 공격할 의지는 없지만 “우리는 세대가 다릅니다”라는 거리를 살짝 두려 했다. 오브제 미술이 가장 성행했던 때의 오브제를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쇼핑을 하는 지금 시대에서 탐구하려는 제스처이다.
박의령은 〈바자〉의 피처 디렉터이다. 떼거나 붙여서 만드는 것들에 마음을 70%쯤 빼앗긴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