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에서 서울 가는 기차 시간 30분 전, 여든한 살 우리 엄마 김경임 씨가 마당에서 튤립을 꺾어주신다. “땅이 문젠가, 날씨가 요상 맹랑 콧구멍이라 그런가. 빨간 거 노란 거, 니가 재작년에 사 온 얼룩덜룩한 거, 다 어디로 가고 흰 것만 이렇게 피네.” 엄마는 정원의 여왕, 흙의 주인, 바람의 제자. 마당에서 철마다 펼쳐지는 꽃의 릴레이 앞에 엄마의 말은 곧 믿음이 된다. 한 달에 한 번쯤 나는 그곳을 찾는 방문객. 어떤 날은 그 말씀에 햇빛을 섞어 간직하고 싶어진다. 말하자면 마당복음, 텃밭전서.

Jang Woo Chul, 〈Flowers, Well-Tempered #07〉, 2019.

튤립 색깔이 예전 같지 않음은 봄마다 반복되는 테마라지만, 아닌 게 아니라 올핸 유난히 다른 색 튤립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가을 되면 알뿌리 다시 사 올게. 요란하고 화려한 걸 심으면 내년에 어떻게 피는지 봅시다.” 갑자기 엄마는 복음을 멈추사, “으이구.” 씀씀이 헤픈 팔푼이 아들 걱정 그칠 날 없는 엄마로 변신한다. “그런 돈 쓰지 마. 옷도 사 오지 마. 아무것도 사 오지 마. 사 와도 안 입을겨. 목걸이도 사 오지 마.”


지난 추석에 드리스 반 노튼 원피스를 처음 사드렸을 때, 그건 엄마보다 나 스스로 의미를 채우고픈 일이었음을. 오래전 마음먹길 ‘엄마에게 드리스 반 노튼 원피스를 사드리는 아들이 되자’ 했으니 무슨 대단한 효도라서가 아니라 다만 마음이 더워지는 일이긴 했드랬다. 다행히 엄마도 그 옷을 좋아하셨다. 하지만 올봄에 사드린, 무려 ‘이번 시즌’ 드리스 반 노튼 코트는 썩 마음에 들지 않으신 눈치다. “색이 너무 고와. 김경임이가 색약으로 낳아서 죄송한 아드님, 뭔 색인 줄 알고나 사셨나?” 엄마와 나는 서로 져주는 법이 없으니 우스개를 넘어 어깃장도 불사한다. “짙은 초록색 아니었어? 이게 다 누구 때문이야? 아들 색약으로 낳은 게 누구야?” 지나가던 누가 들으면 저 집은 왜 저러나 싸우는 줄 알겠다며 엄마와 나는 마당의 꽃들로는 모자라 이상한 웃음꽃을 더 피운다.
※ 장우철은 5월에 그의 아틀리에 ‘미러드’에서 «엄마의 장미»라는 전시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