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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유감(2) 노량진 정인게임장과 홍대 클럽 드럭

분위기 있는 재즈 바, 정겨운 만화서점, 낡은 오락실, 시끌벅적한 라이브 클럽까지 오랜 동안 우리 곁에 함께 했던 문화 공간들이 있다. 코로나19로 노스탤지어가 되어버린 가게 앞에서, 당신은 어떤 기억을 소환하시겠습니까?

BYBAZAAR2021.02.15
 

폐업유감 

노량진 오락실 정인게임장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라고 하면 오락실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온라인도 네트워크도 PC방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가정용 콘솔 게임기는 무척 비싸서 잘사는 친구에게 빌붙어야만 이따금 구경해볼 수 있는 기계였지만, 동네 오락실은 꼬꼬마들의 손때 묻은 동전 몇 개로도 하루가 즐거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돈이 없어도 빈 레버를 돌리며 옆 사람 게임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그래도 직접 플레이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동네를 돌며 빈 병을 모아 슈퍼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곤 했다. 학교도 부모도 거기 가면 불량학생 된다고 겁을 줬지만, 불량학생이라는 게 꽤나 재미있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오락실은 내겐 꿈같은 공간이었다.
 
그런 오락실이 옛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되기 시작한 배경은 휴대전화와 PC방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90년대 말부터였다. 하드코어 게이머들은 PC방으로 넘어갔고, 친구를 기다리며 가볍게 한 판을 돌리던 사람들은 휴대전화의 게임으로 넘어갔다. 이제는 새로 생기는 오락실도 아예 간판을 ‘추억의 오락실’로 달 정도로 최초의 디지털 엔터테인먼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가는 중이다.
 
노량진의 정인게임장(정식 명칭이 오락실이 아니라 게임장이다)을 처음 가본 것은 어린 시절을 한참 지난, 직장인 시절이었다. 대전격투 게임만이 근근이 자리를 보전해나가던 2000년대에 수험생 구역인 노량진의 이 오락실은 마치 무림의 화산(華山)과도 같은 곳이었다. 전국 최고의 대전격투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으로 이름났고, 다른 오락실과 달리 격투 게임 좌석에는 40~50대 이상으로 보이는 닳고 닳은 게임판의 중노년들이 앉아 있기도 했다. 동네에선 나름 떨어지지 않는 실력이라고 생각하고 방문한 정인게임장에서 나는 사실 단 한 번도 동전을 넣어보지 못했다. 그저 기계 뒤에서 앉아 있는 사람들의 플레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눈으로 따라잡기도 어려운 콤보와 심리전이 쏟아졌고, 게이머들의 손놀림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어마어마한 게임 속의 대결과 달리 게이머들은 미동도 없는 상체와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명경과도 같은 고수의 자세인가. 감히 저 자리에 동전을 넣고 도전하는 것 자체가 무례라고 느껴졌고, 조용히 구경만 하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정인게임장에 모이던 고수들은 격투 게임이 PC와 콘솔로 발매되는 시대를 맞으며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인의 고수들은 이제 유튜브와 트위치에서 각자의 도장을 세우고 승부를 겨루며 후학을 양성한다.
 
전설 같은 이름으로만 기억되던 어느 날인가, 뜬금없이 코로나 확진자 뉴스에서 정인의 이름을 만났다. 동작구 정인게임장 방문자는 검사를 받으라는 뉴스. 71년생이라는 그 확진자의 동선을 보며, 여전히 고수들의 발걸음은 이어지는구나 싶었다.
 
확진자 뉴스가 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2020년 6월 결국 정인게임장 폐업 소식이 올라왔다. 한때 구름처럼 고수들이 모여들던 노량진의 격투 성지도 이제 잡초 무성한 폐허로만 추억되겠구나 싶었다.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지만, 흘러가는 시대의 변화를 멈출 방법은 없다. 90년대 초반 가수 한스밴드의 노래 ‘오락실’이 IMF로 실직한 가장의 오락실 이야기를 담았듯이, 정인게임장이라는 이름도 온라인게임의 득세와 코로나라는 한 시대의 변곡점에 새겨질 모양이다.
 
무협지에서나 볼 법했던 고수의 오라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묘한 경계에 걸치던 그 느낌은 이제 설명하기도 어려운 옛 이야기가 되어간다. 한 챕터가 그렇게 접히는 것을 보노라면, 그날 수줍음에 미처 넣지 못했던 동전 한 개가 못내 아쉬움으로만 남는다. 이경혁(게임평론가)


서교동 라이브 클럽 드럭

크라잉넛과 락타이거즈 등 유수의 펑크 밴드를 배출한 조선펑크의 산지, 드럭. 우리가 공연할 즈음엔 이런 명성조차 희미해져가던 작은 공연장에 불과했다. 이 무렵 DGBD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이 들어오긴 하는지 의심되는 입구 전광판과 지저분한 회색 콘크리트 벽을 수놓은 찢어진 포스터, 포스트 언저리에 덜렁거리는 녹색 테이프. 입구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담배를 피우던 무서운 형들. 당시 내게 드럭은 다른 공연장보다 훨씬 암울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내뿜는 ‘딥다크한 장소’였다. 그리고 내 밴드 일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장면이 연출된 곳이다.
 
때는 2007년, 20대 인디 뮤지션 중 절반이 유튜버가 아닌 록 밴드를 꿈꾸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 밴드는 자작곡 하나 없는 카피 밴드로, 공연 기약도 없이 무의미한 합주를 계속하며 “야! 나 밴드 한다!”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게 자랑인 허세 가득한 20대들이었다. 그리고 가난했다. 국밥 한 그릇에도 손을 덜덜 떨었다. 2시간에 20만원이라는 대관비는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다행히 우리처럼 가난한 밴드는 많았다. 인디 밴드들은 ‘합동 공연’이라는 명목으로 모여 대관료 ‘뿜빠이’를 했다. 한 시간에 한 팀, 밴드 당 10만원만 내면 남들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수지맞는 장사였다.
 
우리는 아마추어 밴드답게 카피 곡 네댓 개를 준비해 갔다. 그런데 아뿔싸. 같이 공연하는 다른 한 팀이 무려 자작곡(!)을 다수 보유한 하드코어 밴드였다. “그와아아아악!” 하는, 노래인지 단말마인지 모를 보컬과 현란한 속주, 귀를 뚫고 뇌간까지 침투하는 강력한 드러밍,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십계명 중 9가지를 어긴 것 같은 죄의식이 드는, 그런 노래였다. 밴드의 팬으로 보이는 피어싱을 잔뜩 하고, 약에 찌든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치장한 검은 옷의 사람들이 신들린 듯 머리를 흔들어댔다. 우리도 함께 몸을 떨었다. 하필이면 우리가 두 번째 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차례가 되어 슬램덩크 주제가와 그린데이의 ‘Basket Case’를 연주하자 관객들은 전국 노래자랑에 나오는 지역 주민들처럼 박수를 쳐줬다. 눈물이 나게 고마웠다. 열 명 남짓한 지인들은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꽃다발과 함께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야 잘했어! 진짜 잘 봤어!”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었지만 혼자 있고 싶었다.드럭에서의 굴욕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은, 좁은 공간을 독특하게 활용한 서라운드형 구조 때문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입구를 들어서서 계단을 내려가면 공연장 2층으로 연결되고, 한 층 더 내려가면 스테이지가 있는 1층이 나왔다. 2층에는 스테이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좁은 테라스가 디귿자로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덕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너를 좋아한다고 외치고 싶어”를 부르짖는 내 모습은, 1층 정면과 2층 다방면에서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군 입대 후 밴드로서 성장하여 자작곡을 쓰고 음반도 냈지만, 드럭에는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홍대 주차장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드럭 입구를 마주치게 되면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눈을 감은 내 어깨 위를 그날을 물들였던 악마적인 사운드와 복층의 무게감이 짓눌렀다. 2007년 여름, 가난한 대학생 시절을 기억하는 내게 회색빛으로 남은 드럭은 작년 어느 날 정말 빛이 바랜 장소가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줄줄이 문을 닫은 다른 오프라인 공연장들과 함께 드럭 역시 명을 다했다. 하지만 아픈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고 하지 않던가. 인디 ‘갬성’과 록 스피릿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운 2021년. 이제는 입구에 자욱하던 담배 연기 냄새, 공연을 마치고 땀에 전 겨드랑이 냄새, 잔뜩 까진 철근 테라스의 쇠 냄새조차 그립다. 조웅재(밴드 본숩 보컬, 〈대학내일〉 콘텐츠팀 플랫폼 파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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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일러스트/ leegoc
  • 웹디자이너/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