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집 수리,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Lifestyle

셀프 집 수리,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도시를 떠날 순 없지만 적어도 도시의 내 공간을 낫게 고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바람을 품고 집 수리의 기술을 배웠다.

BAZAAR BY BAZAAR 2020.11.06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여기공’ 협동조합의 메이커스페이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여기공’ 협동조합의 메이커스페이스.

꽉 막히는 강변북로 퇴근길, 무심코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신해철의 ‘도시인’이 흘러나왔다. “한 손엔 휴대전화 / 허리엔 삐삐 차고 / 집이란 잠자는 곳 / 직장이란 전쟁터 / 회색빛의 빌딩들 / 회색빛의 하늘과 / 회색 얼굴의 사람들 / THIS IS THE CITY LIFE / 아무런 말 없이 / 어디로 가는가.” 허리에 삐삐만 안 찼을 뿐이지 모든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이것이 시티 라이프라면 거부하고 싶다. 이대로 낙향하여 저 푸른 초원 위에 이치코의 ‘리틀 포레스트’나 오느른의 ‘폐가’ 같은 집을 짓고 싶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적인 문제들이 제동을 건다. 이 도로에 갇힌 도시인 중 절반은 나와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묘하게 위로가 됐다. 지긋지긋한 이 도시를 떠날 수 없다. 다만 이 도시에 내가 사는 집을 조금 더 낫게 고칠 수는 있다. 그런 바람으로 시작한 셀프 인테리어였다. 상수동의 낡은 빌라를 뜯어 고치면서 일어난 우여곡절은 〈바자〉 7월호 ‘집 고치기의 기쁨과 슬픔’에서 고백한 바 있다. 블로그를 보면서 대충 따라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실리콘 마감이 울퉁불퉁 형편없는 베란다와 흰색 페인트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방문, 가끔 주먹으로 쾅 쳐주지 않으면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드레스룸 스위치까지. 모두 내 거만한 삶의 태도가 불러온 참사였다. 귀촌은 언감생심. 더 이상 매일을 폐허 속에서 살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했다.
 
‘여기공’은 그간 기술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에 주목하여 여성들을 위한 기술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협동조합이다. 여성주택수리과정 입문반 워크숍 ‘집 고치는 여성들’을 통해 10주간 동안 기본적인 수공구부터 전동드릴, 배관, 실리콘 등을 배울 수 있다. 이곳에서 수공구와 전동드릴에 대한 1~2회차 수업을 들으며 식스센스급의 반전을 경험했다. 지금껏 내가 집에서 다루던 전동드릴이 실은 전동드릴이 아닌 전동드라이버였다는 것. 그만큼 무지했던 것이리라. 콘크리트를 뚫는 위력을 가진 전동드릴은 나사를 풀고 조이는 정도의 전동드라이버보다 훨씬 크고 두껍고 무겁다. 독일의 보쉬부터 미국의 밀워키, 일본의 마키타, 한국의 아임삭까지 마치 자동차가 그렇듯 각기 다른 맛으로 작동한다. 내 경우엔 상대적으로 손잡이가 얇고 가벼운 한국의 아임삭이 잘 맞았다. 써보니 알겠다. 비트와 피스의 종류와 특징을 배우고 나니 DIY 가구를 사면 들어 있는 도넛 모양 철판의 이름이 ‘와셔’이고 왜 설명서마다 그걸 너트 밑에 넣으라고 하는지 이해했다. 압력을 분산시켜 가구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지금껏 피스 작업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전동드릴의 전원 버튼을 눌러서 피스를 박는다’가 아니라 ‘내 손에 맞는 장갑을 끼고, 목표한 위치에 V자를 표시하고, 비트로 살짝 구멍을 내고, 그 자리에 피스를 놓고 표면과 직각이 되도록 유지한 채 일정한 힘과 속도로 버튼을 누른다’인 줄은 몰랐다. ‘여기공’의 이현숙 대표는 “도구의 원리와 용도를 이해한 후 다루는 것과 처음 보는 도구를 경직된 상태로 쓰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라고 말한다. “수강생 중 한 분이 수료 후에 이사를 했다. 벽에 선반을 달고 신발장 타일, 주방 타일까지 직접 시공했다. 물론 이론과 현실은 다르고, 아무리 10주간 실습을 했다고 해도 완벽할 순 없다. 요철이 튀어나온 부분도 있고, 배운 적 없는 방식으로 마감이 되어 있기도 했다. 중요한 건 더듬어나가면서 문제를 고칠 수 있느냐이다. 프로세스를 익히고 정보를 찾는 방법을 익혔다면 숙련자가 아니더라도 문제를 고칠 수 있다. 그분은 해내셨다. 우리는 지켜보면서 흐뭇했고.”
 
더듬어나가며 문제를 고치는 능력이라. 이 말을 되뇌며 몇 달째 방치되어 있는 우리 집 베란다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심경을 반영한 듯 삐뚤삐뚤하게 마감된 실리콘을 제거하고 명상하는 자세로 실리콘 건을 다룰 것이다. 물컹물컹한 물성도 분명 전보다는 익숙하리라. 그런 다음 전동드릴을 이용해 베란다 한쪽에 벽 선반을 달 것이다. 1층엔 고수와 바질 씨를 심은 미니 텃밭을 놓고 2층엔 라벤더 화분을 올려야지. 이 집에 사는 동안은 그곳이 나의 리틀 포레스트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이들이 ‘집 고치는 여성들’ 수업을 듣는가? 
기술을 배워보고 싶은데 기회가 없었던 분들이 수업을 듣고 “전동드릴을 배우면서 일종의 두려움을 깬 것 같다”거나 “여전히 어렵지만 적어도 낯섦을 느끼지는 않게 됐다”고 말한다. 여전히 남성 위주의 수업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성희롱을 겪거나 성적 대상화가 되었다거나 혹은 잘하는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분위기, 강압적인 강사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갖고 여기로 오는 분들도 있다. ‘여기공’에서는 편안하고 안전한 분위기에서 수평적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한다.
여전히 용접이나 전동드릴 같은 기술이 낯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그런 낯섦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걸 빠르게 부수려고 하기보단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시도들을 해보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문고리를 하나쯤 고쳐본다거나. 우리처럼 젠더 문제를 중심에 둔 수업은 없어도 여성들을 위한 목공 수업들은 여러 곳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런 수업들을 찾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 기술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이걸로 밥벌이를 해야 해.” “숙련공처럼 잘 해내야 해.”가 아니다. 두려움을 깨고, 기술을 자기 삶을 위해 잘 활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다.
 
집 고치기가 아닌 집 짓기 수업에 대한 계획이 있나?
11월에 경상북도 의성에 새로운 지점을 낼 예정이다. ‘여기공’을 만들 때부터 지역살이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지자체에서 사업비를 지원받으면서 내 고향이기도 한 의성에서 그 시작을 하게 되어 기쁘다. ‘집 고치는 여성들’ 수료생들과 6평짜리 집을 지어볼 예정이다. 의성에 사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공구 수업도 진행한다. 집을 다 짓고 나면 의성군 소유의 공유 공간으로 활용될 것이다. 
지역살이가 쉽지 않은 도시인들에게 집 고치기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공간이라는 것이 참 재미있다. 테이블을 하나 고치면 의자가 보이고, 그 다음엔 벽이 보이는 식이다. 한번 손을 대보면 더 이상 ‘집은 잠자는 곳, 밥 먹는 곳’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에 살아야 할까,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어때야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집과 나의 관계성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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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손안나
    웹디자이너/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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