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피카소의 뮤즈, 프랑수아즈 질로의 예술가로서의 생애

피카소의 옛 연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무엇보다 잘 수식하는 단어는 ‘아티스트’ 다. 예술가로서 결코 평탄치 않았던 그의 생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해서 예술가의 길을 걷는 이유.

BYBAZAAR2020.05.14

Françoise Gilot

프랑수아즈 질로
뉴욕의 작업실에서 프랑수아즈 질로

뉴욕의 작업실에서 프랑수아즈 질로

 
북쪽의 빛(north light)은 항상 필요한 존재예요.
 
프랑수아즈 질로가 창문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의 프랑스식 억양이 강하게 울려 퍼진다. “그래야만 아침부터 밤까지 빛을 받을 수 있거든요. 햇살 없이 그림은 존재할 수 없어요. 북쪽의 빛은 낮 동안 빛을 비춰줘요.”
추운 겨울 오후, 그와 앉아서 대화를 나눈 이 방은 맨해튼 어퍼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스튜디오이다. 책장에 꽂힌 책과 따뜻한 노란 색감의 카펫, 벽에 비치된 질로의 형형색색의 그림들과 벽난로 위 선반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 〈순환하는 공간(Cyclical Space)〉 모두 빛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잘 정돈된 작품 사이에 현재 진행 중인 그림이 이젤 위에 있다. 뚜껑이 달린 캐비닛 위에는 물감과 팔레트, 붓이 놓여 있다. “1961년 처음 왔을 때, 다른 건물보다 두 배는 높았던 이 공간을 동경하게 되었어요. 언젠가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죠.” 질로가 1903년 아티스트들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러시아의 무용가 게오르게 발란친(George Balanchine)의 집이었다. 질로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사크레쾨르대성당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파리 18구에도 아틀리에를 소유하고 있다.
97세의 질로는 늘 그렇듯 열심히 작업한다. “제가 살아가는 방법이죠. 살아 숨 쉬는 한, 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거예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매번 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건 아니에요. 그림을 통해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그 방법은 알고 있어요. 작업을 하다 보면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나타나요.” 그의 성공엔 작업에 쓰이는 도구를 빼놓을 수 없다. “종이의 질이 좋아야 해요. 만약 나무로 만든 질이 좋지 않은 종이를 사용한다면 그림의 질도 빠르게 악화돼요. 하지만 천으로 만든 종이의 경우, 물을 뿌리지만 않는다면 5백 년은 유지되죠. 결이 좋을수록 색감도 잘 표현되고, 프리즘처럼 빛이 잘 투과돼요. 깊이감과 생동감이 더욱 좋아지죠.”
 
프랑수아즈 질로, 〈자화상(Anxious Times)〉, 1940.

프랑수아즈 질로, 〈자화상(Anxious Times)〉, 1940.

질로는 1921년 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밀(Emile)은 농학자였고 어머니 매들린(Madeleine)은 예술가였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수채화 물감이나 먹물을 사용하여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며 예술을 가르쳤고, 아버지로부터는 비즈니스 감각과 타고난 프로정신을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제가 예술가가 될 거란 사실을 늘 알고 있었어요. 저는 화가로 태어났고, 진정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이 필요했죠. 지적으로 인식하기 전에 직관적으로 알았어요. 어렸을 땐 예술에 대한 비평을 달고 살았어요. 늘 중얼대며 비평하곤 했죠. 그 버릇을 좀 고쳐보려고 음악을 듣기도 했어요. 비평이 늘 도움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질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프랑스 경찰에게 억류되어 무명용사의 무덤에 꽃 장식을 해야 했고, 정치 선동자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하지만 21세의 나이에 그는 이미 아티스트라 불리기 시작했다. 1943년 5월의 어느 밤, 배우 알랭 퀴니(Alain Cuny), 동료 아티스트 제네비에브 앨리쿼트(Genevieve Aliquot)와 함께 르 카탈란(Le Catalan)에서 합동 전시회의 오프닝을 축하하며 저녁식사를 하던 중, 질로는 당시 61세의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게 되었다. 옆 테이블에 있었던 피카소는 퀴니와 아는 사이였다. 피카소는 그들에게 다가와 두 여성을 소개해달라 요청했다. 그 다음 날 피카소는 그들의 전시회를 찾았고, 둘을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했다. 그렇게 첫 만남을 가진 피카소와 질로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여 두 자녀 클로드(Claude)와 팔로마(Paloma)를 낳았다.
 
〈Joueuse de Mandoline〉, 1953.

〈Joueuse de Mandoline〉, 1953.

만남 초기, 그들 사이에 격렬한 언쟁이 오갔던 적이 있다. 아티스트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려는 질로의 계획을 들은 피카소가 화를 낸 것이다.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어요.” 질로가 당시를 회상한 후 웃으며 말한다. “파블로는 보나르를 싫어했어요. 그래서 제가 가지 않길 원했죠. 물론 저는 그의 허락 없이도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답했어요. 하지만 싸움은 점점 커졌고, 결국 가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죠. 그러다 피카소가 자신이 얼마나 비이성적이었는지 깨달은 듯, 자신의 친구 마티스(Matisse)를 보러 방스(Vence)에 있는 빌라 르 레브(Villa le Rˆeve)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어요. 사실 전 보나르의 작품보다 마티스의 작품을 더 좋아했어요. 물론 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제안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 승낙했어요.”
좋은 결정이었다. 질로와 마티스는 만나자마자 바로 친해졌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북부 출신으로 서로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마티스와 피카소의 우정에 대해 질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적대관계에 있다는 소문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네 맞아요. 그들은 예술계에서는 라이벌이죠. 하지만 결국 그들은 친구였어요. 파블로보다 12살이 더 많았던 마티스는 피카소를 자식처럼 대해주었죠. 전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어요. 피카소가 나쁜 아이처럼 굴 때, 마티스는 착한 아버지같이 그를 대하는 태도 말이에요.”
 
〈Geometry〉, 2012.

〈Geometry〉, 2012.

질로는 또한 피카소로부터 쉽게 떠날 수 있는 대담함도 지닌 여성이었다. 질로는 둘 사이에 지적이고도 육체적인 교감이 오갔지만 둘의 사랑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건 분명 사랑이었어요. 우리에게는 사랑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서로를 존중했었죠.” 질로가 피카소로부터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피카소는 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나 같은 남자로부터 떠날 순 없어.” 질로의 답변은 어땠을까? “과연 그럴까요?”
1954년, 그들의 관계가 끝나자 질로는 다른 장소에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다. “더 이상은 파리에서 작업을 할 수 없었죠. 프랑스는 제게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어요. 피카소를 떠났기 때문에 마치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았고, 더 이상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같이 느껴졌어요. 런던과 뉴욕 어느 곳으로 갈까 고민했어요.” 그가 회상한다. “런던에는 제 작품을 전시하는 두 곳의 갤러리가 있었고, 1960년대에 테이트 미술관의 디렉터가 소개해준 스튜디오가 하나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에는 제 작품을 수집하는 컬렉터들이 다른 어떤 곳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그쪽으로 무대를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오늘날, 질로의 작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모마뿐만 아니라 워싱턴 DC, 텔아비브, 파리, 앙티브 등의 장소에서 영구 소장되고 있다. 2010년 그는 예술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Officer of the Legion d’Honneur)을 수여받았다.
 
질로의 스튜디오에 있는 그의 작품들.

질로의 스튜디오에 있는 그의 작품들.

질로는 최근에 새롭게 재발간된 베스트셀러 〈Life with Picasso〉와 1976년에 쓴 시 모음집 〈The Fugitive Eye〉 등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모든 책은 영어로 쓰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이 쓴 글을 보지 못하도록 영어로 글을 쓰곤 했던 습관 덕분이다. “창조의 행위는 결국 하나로 연결돼요. 그것이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상관없어요. 저는 영어로도, 프랑스어로도 글을 쓸 수 있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소통을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니에요. 대부분은 내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죠.” 지난해, 질로는 베니스, 세네갈, 인도 등 남편 조너스 소크(Jonas Salk)와 함께한 여행에서 그린 스케치 여행기 시리즈를 출간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창조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충동적으로 그려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보다 제가 느낀 것에 충실했어요. 예술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거죠.”
질로는 자신을 포함해 어떤 예술가도 작품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잘될 때는 아주 좋아요. 탕뮤(tant mieux, 다행이다). 잘 진행되지 않을 때는 탕피(tant pis, 어쩔 수 없다). 받아들여야만 해요. 모든 것을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예술은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예술은 진실에 도달하려는 시도인걸요.”
 

해리엇 그리피(Harriet Griffey)는 영국의 프리랜스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