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옷차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여피'의 시대

해묵은 스트리트 패션에 지친 이들이여, 호화로운 여피의 세계로 들어오라.

BYBAZAAR2020.05.08
 
1 1984 F/W 파리 패션쇼를 보기 위해 튀일리 정원에 모여든 여피들. 2 1958 F/W 웅가로 쇼, 테일러드 원피스를 입은 모델 군단. 3 1980년 4월, 뉴욕 패션쇼에 등장한 파워 수트 룩. 4 매니시한 파워 수트의 정석, 1980년대 엠포리오 아르마니 쇼의 한 장면.

1 1984 F/W 파리 패션쇼를 보기 위해 튀일리 정원에 모여든 여피들. 2 1958 F/W 웅가로 쇼, 테일러드 원피스를 입은 모델 군단. 3 1980년 4월, 뉴욕 패션쇼에 등장한 파워 수트 룩. 4 매니시한 파워 수트의 정석, 1980년대 엠포리오 아르마니 쇼의 한 장면.

 
페이즐리 무늬 양말과 어울리는 넥타이. 내 옷은 마치 호밀빵의 햄처럼 잘 어울리지…(중략)… 이제 난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루이 비통을 입어. 사치와 권력은 내가 즐기는 마약. 우~ 엽-엽-여피. 우~ 상류사회의 꼭두각시.
 
이는 1989년, 애니매이션 제작자였던 빌 오닐(Bill O’neil)이 출시한 ‘여피 랩(Yuppie Rap)’ 가사 중 일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던 당시의 여피족을 패러디한 뮤직비디오는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80년대: 우리를 만든 10년(The ’80s:The Decade that Made Us)〉을 통해 재조명되었고, 유튜브를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최근 HD 버전으로 재생산되기에 이르렀다.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가난을 모르고 자란 뒤, 도시 근교를 생활 기반으로 삼고, 전문직에 종사했던 1980년대 젊은이들. 그들의 문화적 가치관이나 행동방식은 미국 사회에 필요한 패러다임에 부합했고, 아메리칸 드림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들을 가리켜 영 어번 프로페셔널(Young Urban Professionals)의 머리글자 ‘YUP’와 히피(Hippie)의 뒷부분을 합성해 만든 단어인 ‘여피(Yuppie)’라 지칭하게 된 것. 이 여피의 삶을 코믹하게 담아낸 빌 오닐의 뮤직비디오에서 그는 루이 비통 수트에 롤렉스 시계를 차고, 도널드 트럼프(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여피들의 롤모델이었다)의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며, 사브 9000 세단을 몰고, 저녁으로 캘리포니아 스시를, 디저트로 도브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1980년대 여피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패트릭 베이트만도 이와 비슷하다. 옷장 가득 아르마니 셔츠를 수집하는 그는 값비싼 옷과 향수, 액세서리로 치장한 채 상대방이 입은 발렌티노 수트에 아르마니 넥타이, 올리버 피플스의 안경 등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인물. 한편 여성복에서 여피 패션의 주요 키워드를 꼽는다면 바로 ‘파워 드레싱’일 것이다. 대표적인 룩은 파워 수트로, 재킷의 넓고 각진 어깨는 권위와 힘을 상징하고, 가슴을 덮는 디자인은 여성성을 제거해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자 하는 욕구를 상징한다. 쉬운 예로 1980년대에 다이애나 비가 공식석상에서 즐겨 입었던 수트 스타일을 떠올리면 될 것.
소위 요즘 말하는 ‘플렉스’ 그 자체인 이 모습들이 그리 낯설지 않은 건 21세기에도 부를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 채널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대중의 소비 심리에 민감한 패션계의 레이더도 당시의 부르주아 감성과 여피들의 패션 스타일에 주목했다. 그 결과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여피들의 오피스 룩인 파워 수트는 물론, 사교 모임에서 입었을 법한 호화롭고 과장된 이브닝드레스, 주말을 보내기 위한 편안하고도 값비싼 캐주얼 웨어를 풍요롭게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지방시, 막스마라, 마이클 코어스, 버버리, 발맹, 구찌, 시스 마잔 등 다수의 쇼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파워 수트는 동시대 감성을 주입한 다채로운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다. 그 밖에도 로다테와 카이트 쇼에서는 어깨를 한껏 부풀린 퍼프 혹은 레그오브머튼 소매의 태피터 드레스, 셀린에서는 클래식한 금장 단추가 달린 스팽글 드레스로 80년대를 추억했고, 알렉산더 왕과 더 로, 자크뮈스는 여피들이 사랑했던 랄프 로렌과 도나 카란 식의 아메리칸 캐주얼을 재해석해 컬렉션을 완성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여피 패션을 선보인 컬렉션을 하나만 꼽는다면 단연 뎀나 바잘리아의 발렌시아가. 아카이브 사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에메랄드 그린 컬러의 파워 수트를 보라. 여기에 어깨를 강조한 글로시한 소재의 트렌치코트들과 현란한 프린트의 실크 드레스들에서도 1980년대의 향수를 짙게 느낄 수 있었다.
 
 
1 여피들의 위켄드 룩을 대변한 1984년 마이클 코어스의 캠페인 컷. 2 고급스러운 단추 장식이 돋보이는 이브 생 로랑의 1983 F/W 오트 쿠튀르 룩. 3 당시 여피들의 드레스업 스타일을 보여주는 1984년 샤넬의 드레스. 4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1987 S/S 컬렉션.

1 여피들의 위켄드 룩을 대변한 1984년 마이클 코어스의 캠페인 컷. 2 고급스러운 단추 장식이 돋보이는 이브 생 로랑의 1983 F/W 오트 쿠튀르 룩. 3 당시 여피들의 드레스업 스타일을 보여주는 1984년 샤넬의 드레스. 4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1987 S/S 컬렉션.

반면 이와 같은 여피 현상에 대해 〈WWD〉의 액세서리 & 피처 에디터, 미스티 화이트 시델(Misty White Sidell)은 보다 날카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오늘날 여피의 귀환은 오랫동안 뉴욕 사회를 지배해온 와스프(WASP, 백인들로 구성된 미국 주류 지배계급) 문화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으로 이어졌다. 패션계에서는 그들의 프레피 스타일을 과장되게 해석함으로써 과거의 기득권 층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 결과물로 코믹하게 균형 잡힌 수트, 핀스트라이프와 서스펜더, 아이스크림 컬러의 니트, 퍼프 소매의 이브닝드레스가 탄생했고, 이는 새로운 자유 시장의 유니폼이 될 것이다.” 아울러 198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나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여피들의 행동방식이 지금의 밀레니얼과 젠지(Gen-Z) 세대에게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 역설했다. 되려 그래픽적이고 선명한 여피 특유의 패션 스타일이 가진 그 포토제닉함에 자연스레 이끌리게 될 거라는 것. 실제로 여피들이 즐겨 착용했던 벨지안 슈즈나 L.L. 빈의 부츠, 까르띠에의 탱크 시계, 랄프 로렌의 케이블 니트, 단정한 카디건, 그리고 구찌 로퍼 등은 현재 젊은 층 사이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밀레니얼들의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과거의 로고와 디자인을 재해석한 패션 하우스들의 빈티지 백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무엇보다 여피의 귀환은 최근 패션계를 점령해온 스트리트 감성에 지친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버질 아블로, 헤론 프레스톤과 같은 스트리트 패션의 아이콘들도 인터뷰를 통해 스트리트 웨어가 보다 세련되어질 필요가 있음을 피력한 상황. 화려하면서도 개인적이고, 스트리트 웨어만큼이나 크게 몸을 구속하지 않는 여피 스타일은 현대여성들을 매료시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게다가 과거의 것을 재해석해 보다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는 동시대의 디자이너들의 여피 룩은 무척이나 컬러풀(다양)하다. 명심해야 할 점은 이를 손에 넣기 위해선 부유함보다는 스마트함이 필요하다는 것.
 
성공하기 위해 옷을 입었지(Dressed for success). 감명을 주기 위해 옷을 입었지(Dressed to impress). 스트레스에 대비해 옷을 입었지(Dressed for the stress). 난 과하게 옷을 입었지(I’m Dressed to excess).
 
어쩌면 처음에 소개한 빌 오닐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옷차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이를 현명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여피들의 시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그 시대가 지닌 여유와 낭만이다. 

Keyword

Credit

  • 에디터/ 이진선
  • 사진/ Getty Images,Imaxtree(런웨이)
  • 사진/ Shutterstock(아카이브 컷)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