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의 기본 정신을 담은 이 짧은 문장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씁쓸해진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과연 어떻게 정의될 것인가. 제18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인 전소정은 무언가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했으며, 밴드 활동도 하고, 글도 쓰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전소정은 남들보다 더 치밀하고 예민한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 모더니티의 폐허 속에서 경계에 선 인물들에 주목해온 그는 리서치, 인터뷰, 고전 텍스트를 개인적인 경험과 교차시키면서 미학적인 동시에 삶의 정치적 요소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왔다. 오는 5월, 그가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4개월간의 파리 레지던시 경험을 담아 «새로운 상점(Au Magasin De Nouveautes)»이란 제목의 전시를 연다.

이상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전소정 작가의 〈절망하고 탄생하라〉 영상 중 일부.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프로젝트를 머릿속에서 짓거나 허물면서 그 규모를 무한히 확장하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보기도 했다. 스튜디오가 오래된 정원에 둘러싸여 있어 도심에 있음에도 한가롭게 지낼 수 있었다. 1층에 살던 조각가 노부부가 기억에 남는다. 그들은 아침이면 덧창문을 열고 화분을 꺼내놓고 빨래를 널고 저녁이면 그것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들의 고양이와 함께 항상 내 안부를 물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는 시인 이상을 매개로 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도시와 모더니티를 주제로 연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 실천가들의 활동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옥상 정원에서 키운 야생 식물로 요리를 하는 요리사,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신체를 단련하거나 이동시키는 파쿠르 트레이서, 폐허를 거닐며 자신만의 공간을 발견하는 프리 워커들을 좇으며 현재의 모순에 작은 균열을 내는 각자의 실천으로서 탈주하는 이미지들을 떠올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상의 시에 대한 전소정만의 해설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나?
이번 전시는 최근 진행해온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1910~1937)의 초기 시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꽤나 시차가 있는 이상의 시를 프리즘 삼아 현재로부터의 탈주로를 가설해나가고자 했다.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미적 실험과 정치적 실천 사이의 갈등을 살펴보면서 한국적 맥락의 아방가르드에 관한 질문이 생겨났다. 거기서 도달한 곳이 이상의 초기 시였다. 전시명은 〈조선과 건축〉에 실린 이상의 연작시 ‘건축무한육면각체, 1932’ 중 동명의 시 ‘Au Magasin De Nouveautes’에서 차용했다. 이 시는 당시 경성에 새롭게 지어진 미츠코시 백화점을 배경으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어 제목의 일본어로 쓰인 시는 번역의 문제를 발생시키며 조선과 일본, 동양과 서구, 근대의 시간과 자본주의 식민 근대의 시대적 갈등을 예리하게 관통하여 예술가의 태도로부터 비평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을 고민하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전시에서 ‘새로운 상점’은 현대적 삶을 전시하고 의식화하는 백화점 공간으로부터 모더니티를 재고하는 다영역적인 공간이자 다공성의 장치로 전이된다.
이전의 작품들은 공감각적인 예술로 좀 더 넓고 깊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져왔다. 이번 전시 역시 영상, 조각, 출판물로 이루어졌다. 각각은 무엇을 담고 있나?
전시장에 흩어진 조각과 영상, 출판물은 서로 연계되어 있다. 출판물에 실린 글 ‘도해된 로봇’은 영상의 각주로 작동하거나 독자적으로 읽을 수 있다. 조각은 영상에 등장하는 광고 형식을 차용한 장면들과 조응하거나 어긋난다. 근대로부터 탈주를 구상했던 이상의 사유에서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포착하고 있다. 출판물 〈ㅁ〉은 책을 하나의 공간으로 무대화하며, 이상의 시를 축으로 동시대를 바라보는 필자들의 다양한 제스처가 담겨 있다.
‘검은 밤’이라는 밴드로도 활동 중이다. 밴드에서 작사도 한다고 들었다. 당신에게 텍스트란 남다른 의미인 것 같다.
각자 다른 일을 하는 멤버들의 프로젝트 밴드인데 그래서 더 재미있다. 은밀하게(?) 2집을 준비 중이다. 음악과 극을 결합한 형식이나 바이닐이나 테이프 등 개인 프로젝트에서 진행해보지 못한 형식을 실험하게 될 것 같다.

검은 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한다. 듣는 행위는 꽤나 훈련이 필요한 일인데 호기심이 많은 탓에 일찌감치 터득했던 것 같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가능한 많은 질문과 갈래를 그려보려고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이 태도가 작업 전반을 이끈다.
지금의 상황(코로나19와 같은)이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게 될까?
만약 미치게 된다면 어떻게 지금을 ‘해석’하나? 비대면, 비접촉이라는 상황은 미디어 플랫폼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비디오 매체를 다루면서 가졌던 데이터의 이동, 전송, 유실, 전유 등에 관한 고민과 더불어 신체적 감각과 지각작용의 변화 역시 내게 영향을 미쳤다. 도시가 봉쇄되고 온라인 결혼식이나 온라인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사이언스 픽션에 그려진 풍경들이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님을 깨닫는다.
책이 당신의 작품에 근간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나?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윤이상과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을 엮은 〈상처 입은 용〉과 몇 개의 악보들을 살펴보고 있다. 최근에는 SF소설이 동시대성을 담아내는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평면 세계〉, 〈중력의 무지개〉, 테드 창의 소설과 최근에 나온 김초엽의 글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인류학자 라투르의 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근대의 비대칭성, 이분법적인 사고에 문제 제기를 한다.
당신의 작품은 우리에게 미학적 접근 그 이상이다.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이유나 목적 같은 게 있나?
작업들을 돌이켜보면 내가 마주한 사람들, 떠올린 생각의 여정을 엮어 하나의 건축, 미로와 같은 공간을 지어내는 일과 닮았다. 직조의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 안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와 같은 장치들이 누군가에게는 보물처럼 작동될 것이다.
※ 전시 «새로운 상점(Au Magasin De Nouveautes)»은 5월 8일부터 7월 5일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된다.
김민정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남성지와 여성지에서 피처와 패션 에디터로 일했다. 복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의 이슈를 융합적으로, 친근하게 알려주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