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의 카메라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종전 후 서울의 모더니티를 포착한 한영수의 사진이 L.A 카운티 미술관에 영구소장된다. 한영수의 사진을 세계에 알리고자 힘써온, 그의 딸이자 한영수문화재단의 대표 한선정을 만났다. 그녀가 말하는 아버지의 카메라, 필름 뭉치, 흑백사진 그리고 1950년대 서울의 어떤 낭만들. | 아버지,카메라,아버지 사진집,아버지 카메라,한영수 작가

‘서울 명동 Meongdong, Seoul 1956-1963’. 故 한영수 작가의 사진이 L.A 카운티 미술관(LACMA)에 영구소장됐습니다. 한 컬렉터의 기증으로 이번 일이 성사됐다죠.  LACMA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난다 긴다 하는 세계적 사진가들도 많은데 이렇게 컬렉션이 성사되어서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L.A 백아트에서 열린 아트쇼에 참여해서 한국의 동양화 작품들과 함께 열 몇 점 같이 전시했어요. 큰 기대는 없었고 그저 전시회에 온 사람들이 ‘아, 한영수란 사진가가 있구나’ 정도 알게 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한인 컬렉터 한 분이 큰 관심을 가졌고 백아트의 수잔 백 대표 추천으로 그분이 흔쾌히 기증을 결정하면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LACMA에 입성하는 사진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일부는 백아트에 전시됐던 사진들, 일부는 새로 들어가는 작품들입니다. 1차적으로는 LACMA에서 골랐고, 백아트에서 추천한 작품도 있고 마지막엔 저한테도 추천할 작품을 물어봤어요. 그렇게 스무 점이 확정돼서 수장고에 들어갑니다.   1999년에 헝가리에서 열린 첫 번째 해외 전시도 대표님의 공이 컸다고 들었어요.  아버지의 첫 유작전을 헝가리에서 했어요. 제가 그 당시 헝가리 사진박물관에서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었어요. 헝가리 최초의 저널리스트가 아시아를 취재한 사진 자료가 있었는데 관장님이 제가 동양인이니까 동서남북으로 사진을 분류해달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일단 알았다고 하고 자료실에서 사진들을 보는데 한국 사진집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 잠시 한국에 들렀다가 아버지 사진집을 하나 훔쳐서 갖고 갔죠. 관장님께 선물로 드렸어요. 보자마자 바로 개인전을 제안하더라고요. “네 아버지는 마스터다. 유럽의 대가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작가다. 네가 사진만 준비해오면 우리가 모든 준비를 하겠다.”고. 그때가 1998년이네요.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뭐 관심도 없으셨고.(웃음) 그러다 갑자기 다음 해 1월에 돌아가신 거예요. 본의 아니게 첫 유작전이 된 거죠.   ‘서울 소공동 Sogong-dong, Seoul 1958’. 관람객들 반응이 어땠나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봤어요. 헝가리 사람들도 아시아에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1950~1960년대 사진을 처음 본 거죠. 그 시절, 지구 반대편에서 자기랑 똑같은 말뚝박기를 하고 놀았던 어린아이들을 보는 게 놀랍고 감동적이라는 방명록이 기억에 남아요.   사진가 한영수 말고 아버지 한영수는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어요. 부부싸움을 하면 전 늘 엄마 편을 들었고(웃음) 대화도 거의 없었죠. 방학 때 잠깐 한국에 들어오면 “왔냐?” “네.” “아주 왔냐?” “아뇨.” 이게 다였어요. 고집을 피워서 사진학과에 합격했는데 그때도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 정도 말씀하시곤 아무런 지원이 없었어요. 아버지 카메라는 만져보지도 못했고 아버지가 밖에서 이런 사진을 찍는지 몰랐죠.   그럼에도 사진 전공을 택한 건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텐데요.  그럴 거예요. 광고 사진도 찍으셨으니까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패션 사진 촬영을 하러 집에 모델들을 데리고 오시곤 했어요. 그럼 저는 스트로보가 뻥뻥 터지는 그 광경이 너무 신기해서 부엌에서 문을 열고 멍하니 쳐다보고 그랬대요.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가 사진 찍으면 제일 관심 있게 지켜보던 게 형제 중에 저 하나였다고 하시더라고요.   ‘서울 Seoul, Korea 1956-1963’. 아버지와 가장 사이가 안 좋았던 자식이 지금은 그 아버지 사진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네요.  원래 불효자가 뒤늦게 효도한다고 하잖아요.(웃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처분해야 했어요. 집안 사정이 워낙 안 좋기도 했고요. 일단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왔고. 그 당시 신형 카메라는 남은 게 거의 없었어요. 돈이 될 만한 건 이미 그전에 다 팔아서 생활비를 하셨던 거죠. 남아 있는 카메라들은 1950~1960년대부터 쓰시던 오래된 필름카메라들이었어요. 라이카 M3, 펜탁스 67, 리노프 테크니카, 파노라마 카메라….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 카메라와 사진에 눈독 들이고 빼앗아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어요. 얼마에 넘겨라, 어디에 기증해라, 자료를 관리해주겠다…. 결국 돌아가신 뒤 10년간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고 아버지 서재 문을 아예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흑백사진을 처음 봤어요. 아무리 한 집에서 오래 같이 살았어도 아버지의 필름이나 밀착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왜 그동안 공개를 안 했나. 한 컷 한 컷 버릴 사진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작가는 죽었지만 작품은 살아 있어야 하잖아요. 이 사진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한 것 같아요.   왜 생전에 공개를 안 하셨던 걸까요?  아무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한두 번 컬렉션이 있긴 했지만 사진사적으로 다뤄졌을 뿐 사진작가들에 대한 디테일한 관심은 거의 없던 시기죠. 흐름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복고가 유행하고 사람들이 레트로에 영향을 받으면서 아버지 사진도 관심을 받게 됐다고 생각해요. 영화 <국제시장> 같은 작품들이 계속 나오면서 시각적으로도 익숙해졌고요.   ‘서울 을지로1가 (구)반도호텔 Bando Hotel, Euljiro 1-ga, Seoul 1956-1963’. 하지만 톤은 굉장히 다릅니다. 한영수의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그 시대를 슬프게만 보지 않게 만들잖아요.  1950~1960년대의 한국이라는 게 굉장히 암울하고 불편한 지점이 많죠. 아버지 사진은 비록 남루할지라도 그런 감성이 느껴지진 않거든요. 관객들이 그전에는 곁눈질로 보고 뒤돌아섰던 이미지들을 이제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죠. 사람의 인생이라는 게 오늘 하루만 봐도 웃을 일이 생기면 슬픈 일도 생기고 복합적이잖아요. 한영수라는 사진가는 그 시대 서울의 희망적이고 모던한 장면들을 포착해낸 거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17년에 기증 유물전을 했거든요. 자식들이 자기 부모님을 모시고 온 거예요. 부모 세대는 그 시절을 기억하잖아요. “내가 이때 8살이었는데 마포역에서 엄마랑 빨래했어.” 그러면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어머, 난 그때 10살이었는데. 어디 사셨어요?” 이러면서 통성명하고 너무 반가워하셨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흐뭇하고 좋아요. 살아남아야만 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잖아요.   그 시대를 경험한 적 없는 젊은 세대에겐 또 다른 감상이 들 테고요.  젊은 세대에겐 살아보지 않은 시대고 살아보지 않은 도시죠. 1970년대 서울을 다시 복원하면서 건물도 싹 다 밀어버리고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도시에요. 그런 일종의 신비감도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라이카 스토어 청담점에서 전시가 있었는데 미국에서 사진을 전공한 남자분이 그걸 보고 연락이 왔어요.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 사진사를 가르치지 않잖아요. 한국 사진가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거죠. 엘리어트 어윗이나 로버트 카파 같은 작가들만 멘토로 생각하고 그들의 사진과 사상을 좇았는데, 고향인 한국에도 그들 못지않은 사진가가 있다는 걸 알고 소름이 끼쳤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당시 한국에서 어떻게 저런 여유로운 시선이 가능했을까요? 비슷한 시기 아시아의 다른 유명한 사진들을 보면 굉장히 저널리즘적이잖아요. 아니면 굉장히 세고 강렬하게 찍죠. 혹자는 아버지 사진을 부르주아적이라고 얘기해요. 당시 그렇게 값비싼 카메라를 두세 대씩 목에 걸고 사진을 찍었으니까 이데올로기적으로 분류한다면 부르주아가 맞죠. 처음엔 그런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당황스러웠어요. 부르주아적인 건 멀리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의식이 있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갱 같은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자신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느냐를 보잖아요. 고흐는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답죠. 반드시 옆에서 같이 힘들어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아버지가 모든 사람에게 드레스를 입히고 레드 카펫에 세운 건 아니잖아요. 힘든 상황에서도 필름 안에서 자신만 가진 아름다움을 창조한 거죠.   ‘서울 노들섬 Nodeulseom, Seoul 1958-1963’. <꿈결 같은 시절> <시간 속의 강>까지 총 세 권의 사진집이 나왔습니다. 연말에 나올 네 번째 사진집은 ‘여성’이 주제라고 들었어요.  사진을 관리하면 캡션을 달기 위해서 저절로 공부하게 돼요. 서울의 지형, 서울의 변천사 등등. 서울을 주제로 한 그 당시 영화들도 많이 찾아보고요. <나는 결백하다> <쿼바디스> 같은 외산 영화들이 들어오던 시기에 우리나라 작품 중에 <여사장>이라는 흑백영화가 있어요. 아버지 사진에 나오는 것 같은 예쁘고 모던한 여성이 서울 사투리를 쓰는 워킹 우먼으로 나와요. 출판사 여사장인데 독립 회사이고 인쇄 비용 때문에 경영난에 시달리죠. 그래서 돈 많은 배불뚝이 할아버지를 꼬셔요. 그 영화를 보면 사장부터 편집장까지는 다 여자고 그 밑에 완전 말단 직원들은 남자예요. 결국 돈 없고 젊은 남자랑 사랑에 빠져서 본인은 가정주부가 되고 그 회사를 남편한테 넘긴다는 너무 어이없는 결말이지만.(웃음) 그 영화를 보면 그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도나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나와 있어요. 우리는 당시 여성들에 대해 아이를 등에 업고 빨래하고,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이런 남루한 이미지로만 기억하잖아요. 하지만 모더니즘이 들어오면서 여성의 패션부터 지위, 문화 등 많은 것들이 바뀌어간 시기였어요. 저부터 그 시대를 굉장히 단편적으로 보고 있었더라고요. 이번 사진집을 통해서 그 시대 여성들에 대해서 좀 더 넓은 시야로 함께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일단은 올해 말, 아니면 내년 초에 내는 게 목표인데… 가능할지.(웃음)   개인적으론 어떤 사진을 가장 좋아하세요?  시선이 끊임없이 연결되는 사진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지금 이 사진(‘서울 노들섬 Nodeulseom, Seoul 1958-1963’)요. 트리밍이 전혀 안 된 사진이에요. 보통은 사진 찍으면서 왼쪽 프레임에 걸린 남자들을 자를 거예요. 이 여자들의 자세, 표정, 옷의 패턴도 재밌어요. 서울이 아니라 꼭 멕시코 같지 않나요?   저는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로마>의 한 장면이 연상되더라고요. 그만큼 이국적이었어요.  다른 사진가라면 땡볕에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찍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죠. 최근에 새로 발견한 사진이 하나 있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홍제동 같은데 달동네에서 물 긷는 남자예요. 굉장히 덥고 힘들 텐데 이 남자의 입술을 자세히 보면 휘파람을 불고 있어요. 너무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이런 장면을 포착했을까.   ‘서울 Seoul 1956-1963’. 사진가의 삶의 태도와 연관이 있는 거겠죠?  실제로도 이상주의자셨을 것 같고, 멋쟁이셨을 것 같고, 약간은 한량이셨을 것 같고요. 네, 그게 아버지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었죠. 멋쟁이셨고요. 어머니가 하루는 아버지한테 옷을 어떻게 하면 잘 입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대요. 그랬더니 꽃을 보라고 하시더래요. 꽃의 줄기와 잎, 이파리의 색이 있잖아요.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컬러 조합이니까. 거기 맞춰서 옷을 입으면 실패할 일이 없다고 하셨대요. 술도 워낙 좋아하셨고요. 아마 한국 사진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드신 분일 거예요.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두세 번의 고비가 있었어요. 당신이 워낙 어마어마한 자료와 장비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중에 이걸 제가 관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어머니가 한번 이야기하셨대요. 그랬더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쟤한테는 안 넘긴다”고 하셨다고.(웃음) 그런데 보세요. 결국 흙 들어가고 넘겼잖아요.   생전엔 사이가 나빴지만,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노라면 인간적으로 그분을 더 이해하게 될 것 같은데요.  과거와 현재가 마주 본다는 말이 있잖아요. 오히려 사진을 통해서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요. 전시가 잡히면 주최 측에서 저한테 의견을 묻잖아요. 이럴 때 아버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생각 많이 해요. 물론 전 아버지 의견과 반대로 하겠지만.(웃음) 어쨌든 옛날의 서운했던 감정은 뒤로 넘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저의 일인 것 같아요.   어떤 사명감이 느껴집니다.  제가 점점 아버지의 나이에 가까워지면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저도 사진과를 나왔지만 한국 사진사에 일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책임감도 느끼고요. 그 당시 사진사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저라도 많이 알려야겠다 싶어요. 로버트 카파처럼 한국의 사진가들에게도 멋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댄디하게 양장을 차려입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한국 사진가들의 풍류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