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당신의 언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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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당신의 언어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단어가 가진 뜻을 넘어서 문화와 맥락을 온전히 체화한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에 대하여.

BAZAAR BY BAZAAR 2018.11.13

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말해두자면, 나는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이고 런던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다. 런던은 모든 언어가 모여 있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맡은 클래스만 해도 브라질, 칠레, 일본, 프랑스, 독일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있다. 오늘 한 한국인 학생이 ‘Banter(사전적으로는 ‘가벼운 농담’이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저속하고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내 수업의 시작은 늘 모르는 단어를 공유하는 것이다. 노래 가사, 유튜브에서 흘려 들은 얘기, 잡지에서 읽은 가십, 그 무엇이건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교실로 가져와 물어보길 원했다. 대부분은 세탁소에 옷을 맡기거나 카페에서 좀 더 수월하게 할인을 받기 위한, 생활밀착형 단어들을 가져오곤 했다. 가끔은 비즈니스 용어, 스냅챗에서 쓰는 신조어 같은 걸 물을 때도 있지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언어는 결국 언어이고 슬랭조차도 배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What means Banter?” 경희가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인 뒤 “What does Banter mean?”이라고 태연하게 문법적 실수를 바로잡아주었다. 하지만 사실 내 머릿속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젠장, 여기서 벗어날 방법이 뭐지? 그녀는 학생이고 나에게는 대답해줄 의무가 있다는 건 알지만, 도대체 어떻게결국 ‘Banter’란 영어의 ‘암내’ 같은 거라고 말을 꺼냈다. 두 음절로 된 반사회적인 단어이며, 언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그러니까, 왓츠앱의 총각 파티용 채팅방에서 오가는 말들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게 바로 ‘Banter’이고, 때로는 이성애자들이 성차별적 성향이나 동성애 혐오 등을 감추기 위해 쓰거나 서로를 가장 거칠고 끔찍한 방법으로 놀려댈 때 쓰는 말과 방식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어번 딕셔너리에 있는 예시를 빌려오자면, 누군가가 “네 페니스는 정말 작아.”라고 했을 때 “네 엄마는 그걸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던데?”라며 맞받아치는 식의 저질스러운 대화 혹은 행동을 떠올리면 된다. 말장난이지만 언어적으로는 겨우 레고를 가지고 노는 수준밖에 못 되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나 쓰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내 앞에서 ‘banter’라고 이야기한다면, 나에게서 예의를 기대할 순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렇게 말한 건 아니다. 그저 형식적인 설명을 해주고 다른 주제로 옮겨갔을 뿐이다. 사실 그런 화제를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학생들은 내가 충분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나는 본질적으로 시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업을 하면서도 그 기질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학생들이 원하는 건 그저 머리 아프지 않게 과거 시제를 잘 쓸 수 있게 되는 것뿐인데 가끔, 어쩌면 너무 자주, 이 언어가 실제 묘사하고 있는 대상에 비해 얼마나 과장됐는지 혹은 부족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언어란 모호한 것이고, 때로는 내 설명이 부족하거나 넘칠 수도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어떤 단어에 대해 완벽한 해석을 해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절대 번역 불가한 단어라는 건 없겠지만 그 뒤에 숨겨진 문화적인 맥락은 온전히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어를 쓰는 나는 좀 더 여성스럽고, 아일랜드 영어를 쓰는 나는 거친 편이며, 프랑스어를 쓰는 나는 상대적으로 덜 직설적이다. 남미에 살았을 때는 “모국어를 쓰는 나는 좀 더 매력적인 사람이다!”라고 쓴 팻말을 걸고 다니고 싶었다.

언어란 입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수많은 유희를 거친다. 그건 모두 본능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떤 단어가 무례한지, 쿨하지 않은지, 혹은 지나치게 정중하진 않은지, 그것이 성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금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닌지, 어떤 멍청한 정치인이 그 단어를 썼을 때 적절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장소, 시간, 말투, 그리고 화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그 애매모호함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간파해낸다. 만약 나에게 병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실제로 물병을 가리키거나 구글에서 병을 찾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 방과 후 모두 행복하게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Banter’ 같은 단어에 대해 물어본다면 다섯 단어로 요약된 엉터리 설명을 해주고 그냥 넘기는 방법밖에 없다. 그게 실제로 오늘 내가 한 일이다. 하지만 달리 무슨 수가 있겠나? 사회경제학이나 언어심리학과 연관된 강의를 지루하게 늘어놓는 것? 만약 그랬다 하더라도 결국 경희는 그 단어의 실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의 언어가 아니며 앞으로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어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든, 그 말들이 나의 일부가 될 수 없듯이.

어제 저녁 독일 출신인 룸메이트가 나를 부르더니 개구리가 어떻게 우냐고 물었다. 나는 ‘리빗(Ribbit)’ 하며 운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쿠아크(Kwak)’ 하며 운다고 말했다. ‘리빗’, ‘쿠아크’.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서로의 지성이 의심될 수준까지 공방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녀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와 비슷한 학구적 일화도 있다. 러시아어에는 푸른색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가지다. 하나는 좀 더 밝은 색조를, 나머지 하나는 어두운 색조를 일컫는다. 하지만 영어에는 ‘블루’ 한 가지뿐이다. 한번은 MIT 대학의 연구원들이 서로 조금씩 다른 파란색 일곱 가지를 늘어놓은 후 미국인과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이를 카테고리화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러시아의 승리였다. 그들은 이 파란색들을 서로 다르게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빠르게 구분 지을 수 있었다. 불쌍한 영어 사용자들은 고장난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들처럼 그 파란색들 앞에서 버벅거렸다. 한국어에는 색깔을 뜻하는 단어가 아주 세분화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만약 이 실험이 한국인과 미국인(혹은 영국인)을 대상으로 했다면 한국의 압승이었을 것이다.

결국 요지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규정한다는 거다. 물론 이는 대단히 논란이 많은 연구 분야이고 이렇게 하나의 칼럼을 통해 간단히 정의할 문제는 아니지만, 한번쯤은 누구나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다. 난 다른 언어를 통해 얘기를 할 때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 난 의미도 모르면서 한글을 겨우 따라 읽을 수 있는 수준인데, 한국어를 발음하고 있자면 새로운 호흡법을 깨닫는 느낌을 받는다. 독일어를 쓰는 나는 좀 더 여성스럽고, 아일랜드 영어를 쓰는 나는 거친 편이며, 프랑스어를 쓰는 나는 상대적으로 덜 직설적이다. 한번은 남미 쪽에 산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난 “모국어를 쓰는 나는 좀 더 재미있고 매력적인 사람이다!”라고 쓴 팻말을 걸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무색무취한 내 스페인어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놀랍게도, 좋은 점도 있다. 나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을 신선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언어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가 등장하는 것처럼, 모국어 사용자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이를 배워가는 사람들에겐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사 역시 어느 번역가, 그러니까 나보다 이런 상황을 훨씬 더 잘 이해할 만한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다. 그에게 세련되지 못한 구어적 표현들에 대해 미리 사과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당신은 아주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다. 자, 번역가님. 만약 당신이 ‘banter’라는 단어를 완전히 이해했다면, 이것이 삶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덜어주었나요? 이로 인해 삶이 바뀌게 될까요?

 

글쓴이 데이비드 내시와 그림을 그린 이그나시오 오르테가는 작업에 대한 영감을 주고받는 파트너다. 데이비드 내시의 글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를 이그나시오가 그림으로 옮기는 식이다. 이들의 글과 그림이 나란히 실린 책이 올해 영국과 칠레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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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김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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