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가 '적군의 언어'로 말하고 싶은 것
책에는 다 싣지 못한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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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미술관에 멸망이 들어왔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가 아트선재센터에 구축한 4층짜리 세계를 거닌 뒤 떠오른 한 가지 물음. 이곳은 어디인가?
<상상의 종말 I> 앞에 선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아트선재센터의 뼈대를 허물고 완전히 다른 시공간으로 뒤바꿔 놓은 «적군의 언어»는 지난 아트위크 기간에 마주한 수십 개의 미술 현장 중에서 제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전시입니다. 전시장과 복도, 계단, 지하 극장,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무언가에 점령 당한 듯 폐허가 되어 있죠. 이토록 ‘장소 특정적’인 전시를 만들기 위해 작년부터 아트선재센터를 찾아 수개월간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요. 그때 포착한 것은 무엇이며, 어떤 그림을 상상했나요?
저는 한 달 넘게 매일 아트선재센터를 찾아 이 건물이 ‘살아가는 방식’을 관찰했습니다. 관객이 공간을 어떻게 이동하는지, 그리고 큐레이터, 시설관리팀과 청소팀, 시공업자, 배송 기사, 이웃, 설치 작업자 등 기관을 유지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일상의 생태계(biome)를 구성하는 방식을 보았습니다. “아트선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한 사람들의 수많은 시도와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더군요. 그래서 이곳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성장하고, 성숙하며, 일부를 벗겨내고, 또 다른 무언가로 변해왔습니다. 그것이 항상 ‘더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다른’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변이는 공간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과거의 작품이 고정되어 있던 바닥의 구멍들, 천장에 매달린 보강 구조물들, 이전 전시의 흔적이 남은 벽의 잔재들, 그리고 이야기와 기대의 잔여물들이 건물의 조직 속에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 공간의 공기 자체가 밀도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의 일부는 그 밀도를 흔들고, 파내는 일이 되었습니다. 과거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생명과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열어놓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쌓인 층을 걷어내는 동시에, 살아 있는 물질들을 기관의 몸 속에 들여놓았습니다. 흙, 바위, 식물, 이끼, 곰팡이, 곤충들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건물의 구조 안에 새로운 지형을 조각하며, 생물학적 생명을 그 안에 엮어 넣었습니다. 이 존재들은 수동적인 미적 요소가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공간을 계속 변화시키는 행위자(agent)들입니다. 그들은 건물의 과거를 소화하고 대사하며, 현재의 형태를 새롭게 구성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프로젝트는 기생적(parasitic)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숙주를 침투하고, 기존의 구조를 발판 삼아, 그 잔여물에 영양분을 얻고, 이미 존재하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이죠. 작품은 아트선재센터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얽혀들어가 기관의 ‘대사’를 안쪽에서부터 다시 써 내려갑니다. 그 결과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생태적 과정이 되었습니다. 이미 존재하던 것과 이제 막 생겨나는 것이 서로 뒤섞이며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과정 말입니다.
기존 출입구가 흙더미로 봉쇄되어 지하 1층부터 관람을 시작해야 합니다.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연장의 모습을 한 지하층까지 전시장으로 삼아야 했던 이유가 있나요?
지난 9월의 기자간담회에서 김선정 예술 감독이 1층의 주요 출입구, 즉 번화하고 관광객이 많은 거리로 바로 열려 있는 그 입구가 늘 ‘해결되지 않은 문제’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똑같이 느껴온 것이거든요. 자동문을 통과하며 거리의 혼잡함을 뒤로하고자 하지만, 사실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문을 열 때마다 소음이 다시 스며들어오니까요. 제게 관객이 진정으로 전시에 몰입하기 위한 문턱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그 입구로 전시를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서는 결코 ‘시작’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 작업의 일부는 이러한 맹점을 드러내고 증폭하는 일입니다. 일종의 정신분석적 접근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정보들 말이죠. 제가 ‘정신분석적 접근’이라고 할 때 그것은 기호화될 수 없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중간 지대(limbo)에 머무는 정보를 탐색하려는 시도를 의미합니다. 이 숨겨진 층위에 다가가기 위한 제 방식 중 하나는 제스처를 ‘읽는’ 것입니다. 건물이 어떻게 점유되고 있는지, 어떻게 청소되고 유지되는지, 문이 어떻게 열리고 닫히는지, 사람들과 사물이 어떻게 그 안을 순환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죠. 이런 제스처들을 살피는 것이 말로 드러나지 않은 것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흔적들이라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건물이 언어의 표면 아래에서 어떻게 숨 쉬고, 행동하고, 말하는지 드러냅니다.
또 하나 사실인 것은, 지하층이 일종의 ‘방치된 공간’이었다는 점입니다. 미술관이 가끔 강연이나 상영회를 열긴 했지만, 그 공간은 진정으로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곳을 첫 만남의 장소로 삼음으로써 공간을 기호적으로 다시 충전했습니다. 지하층의 혼란스러움, 남겨진 요소들, 과거 사용의 흔적들은 새로운 ‘물질’로 기능하며 작업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전시 만들기의 묘한 힘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전시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관객은 독자가 됩니다. 그들은 모든 표면을 훑고, 해석하며, 의미를 추출하려 하죠. 잊힌 것은 의미를 얻게 되고, 방치된 것은 에너지를 띠며, 건물 자체가 하나의 읽혀야 할 텍스트가 됩니다.
<상상의 종말 I> 디테일 이미지.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전시의 마지막 동선인 3층은 가장 살아 있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의 열기에 압도되지요.
전시의 지하층이 물리적 방치, 즉 기관 내부에서 한쪽으로 밀려나고, 충분히 활용되지 않은 채 조용히 표류하던 공간을 다루었다면, 3층은 그 상태를 보다 상징적인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말하자면 ‘상상력의 방기’입니다. 박물관의 잊혀진 하층 공간이 ‘다시 보기(re-seeing)’를 통해 재활성화될 수 있었다면, 이 공간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상상력을 방치하고, 그것을 합성 시스템과 알고리즘, 비인간적 지성에게 외주화(subcontract)시키고 있는지를 마주하고 싶었어요. 이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점점 더 기계가 이미지와 내러티브, 그리고 한때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미래’를 생성하도록 허용하고 있죠.
관객이 3층에 도달하면, 숨 막힐 듯한 열기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불길은 최면적이고 중독적입니다. 원초적인 힘이자 동시에 매혹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본능적인 신체 반응을 촉발합니다. 그러나 이 경험은 단순히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불은 UV 그리드 막(UV grid membrane), 즉 회색의 체커보드 무늬 안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無)의 영역, 그러니까 끝없고, 무균적이며,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찬 디지털 공허(digital void)의 경계에 들어선 것입니다. UV 그리드는 그 공허를 표시하는 기호적 마커가 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직 인간의 상상력만이 이런 공백을 채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합성 시스템들이 그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고 있죠.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고, 초현실적인 세계를 구성하며, 심지어 ‘가짜 뉴스’의 형태로 우리의 집단 기억마저 다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길들인 최초의 힘 중 하나인 ‘불’과, 새롭고 낯선 창조물인 ‘디지털’을 병치한 것은 다분히 의도한 것입니다. 불은 우리가 제어하고 형상화하며 다룰 수 있었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디지털은 그와 같은 궤적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의미에서의 ‘도구’로 귀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바란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감정이나 가치를 반영하거나 공유하지는 않을 거란 얘깁니다. 진정한 실존적 위험은 AI가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합리적 혹은 윤리적 주체로 간주되는 AI에게 ‘대리’하도록 내맡기는 데 있습니다. AI는 우리의 동반자도, 익숙한 존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지배와 협업, 그리고 생존의 역학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도록 요구하는, 이질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존재입니다.
4개 층에 걸친 전시는 2022년부터 작업을 이어온 <상상의 종말> 연작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모두 당신이 직접 개발한 ‘타임 엔진(Time Engine)’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만든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낯설고 기괴한 조각은 어떤 값을 입력한 결과인가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타임 엔진(Time Engine)’ 안에서 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변수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기 상태, 화학 조성, 지각 운동, 침식 주기, 행성의 자전, 중력의 변동, 광물 퇴적, 수질의 pH, 토양의 다공성 등과 관련된 데이터를 입력합니다. 또한 태양 복사량과 달의 주기 같은 천문학적 리듬뿐 아니라, 역사적 단절, 언어적 변이, 그리고 가상의 미래들까지 통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입력값들은 인간의 지각만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산이나 폭풍을 우리가 보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기계적 논리에 의해 읽히고 해석됩니다. 그 안에서 ‘날씨’는 단순히 비나 바람이 아니라, 압력의 기울기, 난류 벡터, 그리고 혼돈의 인력자(chaotic attractor)가 됩니다. ‘지질학’은 더 이상 암석이나 지층이 아니라, 응력장(stress field), 심층 시간(deep time)의 흐름입니다. ‘지형’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정보의 건축, 즉 좌표와 힘이 끊임없이 재배열되는 가변적 그물망으로 전환됩니다. 심지어 ‘신학’조차 신화나 교리가 아닌, 수세기에 걸쳐 물질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는 ‘믿음의 패턴 시스템’으로 인식되죠.
이러한 이유로 타임 엔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태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인식과 비인간적 인식이 얽혀 현실을 읽고 생성해내는 역동적인 생물권(biome)이죠. 우리가 이 디지털 생태계를 퇴비화(compost)할수록, 즉 더 깊이 섞고 순환시킬수록, 그것은 더 많은 데이터를 만들어내며 동시에 더 강하게 읽히길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석의 과정에 결코 완결은 없습니다. 끝없는 과업이며, 언제나 스스로를 새롭게 형성해가는 현실과의 지속적인 협상,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와도 같습니다.
<상상의 종말> 연작에 대해 논할 때, 당신의 시선은 늘 미래에 가 있습니다. 완전히 공평하고, 감정적으로 초연한 ‘외계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 결과라고 했죠. 그런 시각을 갖게 된 건 마르셀 뒤샹 이후, 더 이상 예술에 대해 생각할 것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요. 하지만 당신은 결코 이 세계에서 완벽한 타인이 될 순 없습니다. 현대미술이 막다른 길에 와 있다 느껴질지라도 현재의 담론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습니까?
당신이 지적한 모순을 이해합니다. 특정한 역사, 언어,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는 이상, 진정으로 이질적인 존재(alien)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말이죠. 하지만 바로 그 긴장감이 곧 제 작업이 존재하는 자리입니다. 제가 말하는 이질적 시각은 존재론적 사실이 아니라 방법론적 태도에 가까워요. 저는 결코 외계인이 될 수 없지만, 스스로를 주어진 전제들로부터 낯설게 만드는 시도를 할 수는 있죠. 그것은 인식의 전복을 위한 도구이자, 예술, 자연, 기술, 인간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범주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리처드 뮤트(R. Mutt, 뒤샹의 가명)의 <샘>이 ‘예술’이라는 기표를 모든 전통적 속박에서 해방시킨 결정적 사건이라면, 이제 우리의 과제는 더 이상 그 경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잔해를 추적하고 폐허를 가지고 놀며, 예술의 퇴적층을 파헤치는 일이 되겠죠. 무한한 대상을 ‘예술’이라 명명했던 반(反)식민적 작동이 한계에 이르렀다면, 이제 남은 일은 애도와 복원의 과정입니다. 약탈당한 유산을 되찾고, 부정당한 전체성을 회복해 식민화된 세계를 치유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전례 없는 과업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자체를 유럽 중심적이지 않으며, 남성 중심적이지 않은, 종국에는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범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인간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서양, 백인, 이성애, 남성처럼 오랫동안 그 자리를 대신해온 가짜 구성물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제 작업은 현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어 속에 내장된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폭력성을 지우고 지배가 아닌 관계에 기반한 새로운 명명의 방식을 구축하려는 시도입니다.
지하층 설치 전경. 방치된 지하 공연장에 비닐을 씌웠다.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이번 전시 작품도 그러하듯, 공간과 하나되어 살아 숨 쉬는 당신의 조각은 태생적으로 썩고 부패해 소멸하는 운명을 갖고 태어났어요. 궁극적으로 누구도 소장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건가요?
사실 인간은 썩고, 부패하고, 결국 사라지도록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도 해당됩니다. 물론 각각의 사물들은 서로 다른 수명을 지닙니다. 산이 침식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우리가 몸이라 부르는 이 연약한 생물학적 껍질이 소멸하는 시간보다 훨씬 길겠죠. 우리가 만들어내는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소유될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이해되고 해석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쥐고 있든, 그 해석들은 끊임없이 변이하게 될 것이며,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을 더 이상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 범주는 종종 사고를 제한하는 굴레로 작동하잖아요. 이를테면 보존(preservation)의 개념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존을 흔히 사물을 얼어붙게 만들고, 시간의 흐름 밖에 두어 환경과의 관계를 차단하는 것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왜 그것이 표준이 되어야 할까요?
파르테논 신전은 로마 시대에는 교회로, 한때는 화약 창고로, 그리고 기독교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다시 기독교의 성소로 바뀌어왔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물들은 연이어 등장한 문명들에 의해 수없이 재활용 되었고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시대에는 교회가 비워지고, 이미지가 지워지고, 회화가 파괴되었습니다.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는 이러한 순환을 예감한 듯, 폐허를 그리되 그것을 단절이 아닌 연속의 비전으로 그렸습니다. 문화적 형식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고대’라고 부르는 이미지조차 하나의 구성물입니다. 순진한 오독이 아니라, 의도된 정치적·과학적 프로젝트였죠.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이후 서구 학자들은 그리스 조각을 순백의 대리석으로 상상했지만, 사실 그것들은 다채롭게 채색되어 있었어요. 피부, 머리카락, 옷, 눈동자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고 연극적이었죠. ‘백색(whiteness)’을 순수와 완전함의 상징으로 여기는 신화는 작품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서구의 인식론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허구였습니다. 정치적, 인종적 상상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를 다시 쓴 거죠. 과학은 그 허구를 안정화하기 위해 동원되었고요. 측정하고, 분류하고, 목록화함으로써 만들어진 진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죠. 우리가 오늘날 ‘시간을 초월한 순수함’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해석 체계의 잔여물입니다. 세계관을 물질에 투사해 놓고 그것을 ‘현실’이라 부르는 시스템 말입니다.
이처럼 긴 시간의 관점에서 문화적 존재는 덧없습니다. 한때 전 지구적 아이콘이었던 커트 코베인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BTS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그 다음의 존재들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예술사’라는 허상의 연대기에 영속적인 흔적을 남기려 애써야 할까요? 우리는 이미 퇴화된 형태의 문화입니다. 종말 이후(post-end)의 세계에서, 나는 이미 잊혀진 사람처럼 작업합니다.
당신은 현재를 ‘종말 이후의 세계’로 보고 있군요. 비슷한 맥락에서 ‘포스트 SF 시대’라는 표현도 종종 써왔죠. 이 말들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회의적인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기대하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 비슷한 질문을 정말 자주 받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번 대답하지 않아요. 왜 그런지 조금 설명해볼게요. 저는 이제 더 이상 ‘가까운 미래’라는 개념을 믿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선형적인 시간의 형태로는요. 우리는 이미 한때 SF라 불리던 미래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계와 대화를 나누고, 알고리즘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믿을지를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며, 유전자를 편집하고 생물학적 코드를 다시 쓰죠. 현재는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은 채 당도한 수많은 미래들로 포화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작업으로부터 한눈팔게 만들 만큼 매혹적인 것도 있나요?
저는 딴짓, 현실 도피 같은 개념 자체를 온 마음으로 거부합니다. 저는 일과 삶을 나누지 않으며, 애초에 ‘벗어나야 할 삶’을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 이분법 자체가 자본주의가 만든 구성물이라 생각해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돈을 쓰고, 섹스를 하며 자유를 누리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 말이죠. 심지어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만드는 기기나 플랫폼조차 우리의 관심사를 메타데이터로 전환하고 있어요. 저는 그것을 휴식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냉소적입니다.
저에겐 읽고 듣는 행위도 작업을 하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 선상의 충동에 의한 것이니 사실상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죠. 최근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The American Cinematographer> 저널을 오래된 호까지 거슬러 읽고 있고, 스테파노스 게루라노스(Stefanos Geroulanos)의 <The Invention of Prehistory>에도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음악은 거의 듣지 않아요. 대신 운동을 하면서 종종 예술가, 영화감독, 음악가, 작가들의 장편 인터뷰를 듣습니다.
언제나 저를 사로잡는 것은 선형적이지 않은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 그러니까 복잡하고 다층적인 제작 과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은 현실의 다중우주적(multiversal) 성질을 깊이 거부해요. 얽히고설킨 모든 과정을 선형적 이야기로 바꾸고 싶어 하죠. 이를 수행하는 주요 도구가 바로 구술과 문자 언어입니다. 혼돈을 질서로 만들고, 다중성에 순서를 매겨 압축하고, 산발적 경험을 매끄러운 서사로 만들어 기억하기 쉬운 형태로 전환하는 기술이죠. 이 행위는 센 힘을 가졌습니다. 동시에 언어가 담으려는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한 차례 시끌벅적한 이벤트가 끝나고 다시 찾아온 일상입니다. 가장 익숙한 곳에서 작업을 하며 보내는 당신의 하루는 대체로 어떻게 흘러가나요?
저는 작업실이 없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낯선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곳도 도쿄예요. 한 달 동안 부모님과 함께 이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별한 관광 계획도 없이, 그냥 현지인처럼 지내보려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상의 일을 하면서요. 곧 제 파트너가 런던에서 합류하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이어갈 겁니다.
작업실이 없다는 문제로 돌아가자면, 저는 이제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아무것도 만들거나 설치하지 않는 시기, 즉 생각하고 되돌아보는 시기에도 여전히 작업 중이라는 것을요. 다만 그런 일은 ‘노트’라는 다른 형태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질 뿐이죠. 저는 생각하기 위해 반드시 글을 써야 합니다. 거의 항상 부엌에서 말이죠.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술 공부를 시작한 이후 부엌과 식탁은 줄곧 제 작업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필요의 문제였겠죠. 우리 집은 아주 작았으니까요. 아르헨티나에서는 젊은이들이 20대 후반까지 가족과 함께 사는 경우가 흔합니다. 독립해서 살 만큼의 돈을 벌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된 작업실을 가질 만한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엌과 식탁 사이에서 일하고 있네요. 저는 불과 음식이 머무는 자리, 그 원초적 안락함의 잔재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요? 부엌은 나의 동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를 오픈한 뒤 기자간담회와 토크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형태로 서울의 관람객을 만났어요. 문득 작년부터 시작된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더군요. 그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이 전시의 성취를 어떤 것으로 여기는지도요.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의 마지막 며칠을 보내는 동안에는 일종의 자기 혐오감이 밀려왔습니다. 작업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쏟아냈더니 스스로 말에 취해버린 사람 같았달까요. 며칠 동안은 제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작가’라는 인물에 과도한 집착이 생기는 현상에는 생산적인 면이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설명해야 한다는 제도적 요구 역시 작품의 해석에 되려 방해가 된다고 느끼고요. 왜냐하면 제가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든 설치의 언어는, 그런 말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9년,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숲에서 저는 진흙으로 고래 같은 형태의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제 첫 비엔날레 프로젝트였죠. 우리는 추운 날씨 속에서 3주간 작업했고 완성되는 순간부터 그 조각은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비 몇 번에도, 바람에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이미 그것을 바꾸고 있었으니까요. 작업이 끝나자 큐레이터 팀이 작품임을 표시할 수 있는 작은 라벨을 붙이러 왔더군요. 그들이 떠난 직후 저는 그 라벨을 버렸고요.
저는 사람들이 그것을 찾지 못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누가 만들었는지,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게요. 어쩌면 누군가는 그것을 어떤 종교 집단이나 환경운동가들이 만든 것으로, 혹은 그저 시간이 만든 흙더미로 여겼을지도 모르죠. 우수아이아의 조각은 ‘예술’이라는 맥락과 ‘작가’라는 표식이 사라지자 비로소 현실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신화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말이죠. 저는 제 작업이 그렇게 작동하길 바랍니다. 어쩌면 《적군의 언어》가 남길 가장 의미 있는 성취 중 하나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전시가 오래도록 기억될지라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말이에요. 사실 그건 애초부터 한 사람의 작업이 아니었으니까요. 수많은 손, 수많은 결정,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지성과 돌봄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이번 전시를 알리는 배너를 제작하지 않았습니다. 검은색 스텐실로 새긴 전시 제목이 전부예요. 작가 이름도, 미술관 이름도, 날짜도 없었습니다. 오직 제목만. 이건 저에게 작은 해방의 행위였어요. 프로젝트를 작가와 제도에 묶어두는 기존 장치들에 대한 거부 말입니다. 만약 이 전시가 이름 없이 기억된다면, 그건 제가 바라고 또 노력해온 자율성에 조금이나마 다가간 증거일 것입니다.
무한한 디지털 공허를 상징하는 회색 체커보드 무늬의 UV 그리드와 붉은 조명으로 채워진 복도 공간. 사진: 남서원. 제공: 아트선재센터. ⓒ 2025.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기자간담회에서 “창의성, 예술은 미술관 안에만 있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작업으로 끊임없이 예술의 의미를 전복시키는 데 의의를 두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말을 한 것은 제가 ‘예술’이라는 단어를 그닥 유용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너무 무겁고 배타적이에요. 일상 속에서 빛나는 놀라운 창의성을 가리는 장막이 되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아름다운 아침 식사 같은 것들도 공인된 예술만큼 창의적이고 사랑이 담겨 있으며 ‘예술적’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굳이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는 것에 복잡함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200년간 우리가 사용해온 ‘예술’과 ‘예술가’라는 개념은 특출한 지성과 권위를 지닌 예외적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왔어요. 저는 그 전제 자체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강조해요. 예술은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일어난다고요.
이 고정된 범주에 대한 거부는 우리 팀의 작업 방식에도 적용됩니다. 저는 전통적 조각가처럼 재료와 관계하지 않아요. 제 작업을 특정 학문 분야로 규정할 수도 없을 테고요. 우리에겐 새로운 어휘가 필요해요. 단지 ‘하이브리드 세대’나 ‘초학문적(transdisciplinary) 세대’라서가 아닙니다. 학문 자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인류는 이제 거의 모든 기술적·이론적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뤘습니다.
제 작업을 돌아볼 때, 저는 종종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language games)’을 떠올립니다.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용과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재형성된다는 개념이죠. 게임은 언어를 만들고, 사용은 의미를 생성하며, 맥락은 텍스트를 구축합니다. 저와 팀원들은 수년간 다양한 영역에서 유동적이며 연약한 의미 체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언어가 그렇듯 때로는 반복되는 패턴으로 결정화되지만, 항상 변하며 살아 움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 게임에 얼마나 많은 생명을 불어넣느냐입니다.
이 접근법은 궁극적으로 세계와 상호 흡수되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언젠가는 이 공동체가 완전히 세계 속으로 녹아들 수도 있겠죠.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보르헤스는 지나치게 세밀히 그린 지도를 만든 어느 왕국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지도는 실제 영토와 1:1 크기로 맞춰졌지만, 결국 쓸모없게 되어 버려졌다는 얘기죠. 저는 이 이야기를 제 작업과 팀이 지향하는 바를 비유할 때 자주 씁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단순히 세계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나란히 성장하는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일입니다. 현실과 깊이 얽히되, 이 자체로 하나의 현실이 되어 더 이상 ‘예술’이라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만드는 것이 저희의 목표니까요. 그렇게 할 때 ‘나’는 ‘우리’ 안에 녹아들고, 작업은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훨씬 크고 낯선, 살아 있는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끝으로 예술가로서의 소명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작업을 이어갈수록 분명해지는 믿음이 있는지요.
저는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과 배려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느낍니다. 특히 저희 부모님은 많은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주셨어요.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더 근본적으로는 살 수 있는 가능성을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제게 ‘창작’은 놀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형과 함께한 게임, 세상을 상상하고 형태를 만들어보는 실험에서 비롯되었죠.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머릿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어 눈에 보이게 만드는 일에 집착했습니다. 그림 그리기는 그 방법 중 하나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죠. 형과 저는 플레이 모빌, 레고, 플라스틱 클레이를 가지고 숱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간과 기계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피규어를 만들고 존재하지 않는 장난감을 조립하면서요. 우리는 장난감 시장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들을 발명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예술에 부여하는 영웅적 의미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저 충분한 사랑과 안전의 울타리 안에서 가능성을 부여 받은 몸과 마음이 움직인 결과에 가깝죠. 제가 생각하는 예술은 이런 겁니다. 거창한 소명을 갖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의 흔한 증상 말이에요. 상상하고, 놀고, 뭔가를 창조하고 싶다는 지극히 보통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일 뿐입니다.
*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는 2026년 2월 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고영진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2026년 2월 1일, 아트선재센터와 한 몸이 된 작품의 마지막 모습을 두 눈에 담아야겠다 생각했다.
Credit
- 사진/ 아트선재센터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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