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낙원, 빌라 메디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3백여 년 전부터 아티스트 레지던시로 이용된 로마의 빌라 메디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곳에서는 16명의 아티스트가 일 년 동안 머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업실을 제공 받는다.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거주지였던 이 빌라는 어떻게 아티스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나? 그 유구한 역사와 함께 현재 거주하고 있는 행운의 작가들을 만나보자. | 빌라메디치,로마,이탈리아,레지던시

빌라 메디치의 역사빌라 메디치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 계단을 지나 피아자 델라 트리니타 데 몬티 길을 따라 올라가면 로마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핀치오 언덕 위에 새하얀 빌라 메디치가 위풍당당하게 등장한다. 병사 두 명의 호위를 받고 있는 빌라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리석 계단 끝에 ‘태양왕’ 루이 14세의 동상이 방문자를 반긴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페르디난도 디 메디치 추기경의 저택이었으며 18세기 나폴레옹이 즉위한 후 프렌치 아카데미로 사용되고 있는 빌라 메디치이다.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빌라란 교외의 넓은 토지에 주거 기능과 농장 및 부속 시설이 결합된 공간을 말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메디치를 비롯해 여러 피렌체의 대상 가문에서는 도시 안에는 주거용으로 대규모 저택인 팔라초를, 교외 지역에는 별장 주택인 빌라를 세웠다. 이곳 빌라 메디치가 세워진 핀치오 언덕 역시 ‘포모에리움’이라는 고대로마의 신성한 장벽 바깥쪽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기원전 270~273년에 건립된 오렐리안 장벽 안에 포함되면서 루쿨루스 장군의 정원이 자리 잡게 되고, 그는 기원전 63~66년 이곳에 훗날 빌라 메디치가 될 빌라를 세웠다.(여기에 케케로와 폼페이우스를 초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두 번의 집정관을 지냈으며 갈리아 나르보넨시스(현 프랑스 남부) 출신으로는 처음 원로원에 받아들여진 아시아티쿠스는 이 빌라의 주인이 된 후 커다란 정원 및 신전을 건설했다. 빌라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인 메살리나가 이곳을 탐내 주인인 아시아티쿠스를 음모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졌다. 아내의 계략에 넘어간 황제는 아시아티쿠스에게 자살 압력을 가했고 결국 메살리나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몇 년 후 메살리나는 이 빌라에서 남편이 보낸 군인들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그 후 이 빌라는 로마제국의 재산이었다가 아킬리 가문, 핀치 가문 소유를 거쳐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에는 중심에서 먼 위치 때문에 오랫동안 버려져 있게 된다. 1564년 리치 추기경이 이곳을 사 들였을 때는 작은 건물과 옛 신전의 유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피렌체 출신 건축가 디 바치오(Nanni di Baccio Bigio)를 초대해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죽은 1574년까지도 건축은 완공되지 못했다. 이후 열세 살의 나이에 추기경이 된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Ferdinando de' Medici)가 1576년에 이곳을 사들였으며, 피렌체 출신 건축가 암마나티(Ammannati)를 불러 메디치 가문에 어울리는 중대한 궁전으로 증축해 달라고 요청했다.로마 골동품을 사랑한 메디치 추기경은 이 궁전을 자신이 수집한 컬렉션을 전시할 미술관으로 만들었으며 건물의 정면 외관을 데커레이션했다. 피렌체와 피사의 정원 모양을 본뜬 거대한 정원은 고대 조각품들이 희귀한 식물들과 어우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첩들과 비밀리에 만날 수 있는 작은 방을 만들어 화가 자코포 주치(Jacopo Zucchi)에게 희귀한 새와 식물 그림으로 방을 꾸며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아름다운 벽화는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주치는 또한 그가 증축하여 사용하던 빌라 내 아파트의 천장 벽화를 그리스로마 신화와 우화를 주제로 그려냈다. 하지만 메디치 추기경은 토스카나 공국의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1587년 피렌체로 떠났고(그가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왕위 1순위였던 자신의 형과 형의 부인을 살해했다는 음모론이 있다) 그 후에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도 피렌체로 가져가는 바람에 빌라 메디치는 또 다시 주인을 잃었다. 1700년대까지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 출신 다른 가문의 대공들이 이곳에서 머문 이후 트리니티 성당과 스페인 광장을 잇는 거대한 계단 공사의 시작과 함께 빌라는 다시 한 번 버림을 받게 된다.빌라 메디치, 아카데미가 되다1백여 년 후인 1803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정부가 이 빌라를 사들여 팔라초 만치니에 자리하고 있던 프렌치 아카데미를 이곳으로 옮겼다. 본래 프렌치 아카데미는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나폴레옹 시대에는 그와 정반대로 이탈리아에 프랑스 예술을 선보이기 위한 명망 있는 공간이 필요함에 따라 빌라 메디치에 프렌치 아카데미를 옮긴 것이다.그리하여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거주지였던 이 빌라는 젊고 개성 넘치는 프랑스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도모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프렌치 아카데미로 탈바꿈한 빌라 메디치 의 첫 디렉터였던 조세프 베누아 수베(Joseph Benoit Suvée)와 기욤 기용 레티에르(Guillaume Guillon-Lethiére)는 빌라의 구조를 개조해 조각가와 화가를 위한 스튜디오로 만들었다. 많은 디렉터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데 특히 1833년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가 디자인한 터키 방은 탑 안에 위치한 네오 무어 양식의 부두아르(Boudoir: 귀족 여인의 프라이빗 살롱) 데커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로마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방이다.1961년부터 6년간 디렉터를 지낸 발튀스(Balthus)는 빌라 곳곳을 복구했는데 옛 디자인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모던함을 더한 자신만의 데커레이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주치의 아름다운 천장화가 그려져 있는 추기경 방의 벽에 빛이 들어왔을 때 더욱 아름답도록 여러 색을 덧칠하는가 하면 18~19세기의 시골 풍 가구들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운영 하에서 아카데미는 프랑스 국적이 아닌 외국인 아티스트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아직도 다른 나라의 아카데미는 갖고 있지 않은 프렌치 아카데미만의 특별한 점이다.현재 빌라 메디치 아카데미는 회화, 조각, 건축, 작곡 분야를 넘어 미술사, 고고학, 문학, 연출, 사진, 영화, 비디오, 복원 예술 등으로 그 분야를 확장했다. 푸생, 앵그르 같은 고전미술사 속의 화가부터 왕밍이나 베르나르 프리즈 같은 현대미술 작가까지 이어지는 아카데미의 레지던트들은 모든 아티스트가 선망하는 콩쿠르의 우승자로서 이곳에 입주할 수 있었으며 유구한 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는 일 년 동안 레지던트를 하고 있는 16명의 수상자들이 있다. 어느 여름날, 그들을 만나러 빌라 메디치의 정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듀오 아티스트 렉 앤 소왓프레데릭 말렉(Frédéric Malek)과 마튜 켄드릭(Mathieu Kendrick)은 6년 전부터 렉 앤 소왓(Lek & Sowat)이라는 듀오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 그래피티 아티스트 1세대로 퐁피두 센터의 영구 컬렉션에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파리 북쪽 근교의 6만 평방미터가 넘는 쇼핑센터에서 일 년 동안 40명이 넘는 그래피스트들을 초대해 대형 컬렉티브 작업 ‘모솔레(Mausolée)’를 선보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들의 작업은 대형 회화와 설치미술 쪽으로 발전되었으며 팔레 드 도쿄에서 시인이자 앤디 워홀의 친구였던 존 지오르노와의 공동 작업, 그리고 또다시 80명이 넘는 아티스트들과의 컬렉티브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명실상부 이 시대 가장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들은 지난해 빌라의 레지던트로 뽑혔던 친구를 방문하러 왔다가 당시의 디렉터 에릭 드 샤시(Eric de Chassey)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그가 우리의 작업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큰 용기를 얻어 빌라의 콩쿠르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붙기 전까지는 우리 둘 다 전문 미술 교육을 수료한 경력이 없고 거리에서 그래피티로 작품 활동을 해온 터라 저명한 빌라 메디치에 받아들여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죠.”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빌라의 벽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예술을 표현하고 있다. 난생 처음 얻은 커다란 스튜디오에서 벽 전체를 캔버스로 감싸고 새로운 재료와 실험적인 테크닉을 이용하여 추상적이며 그래픽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 “태생이 스트리트 아티스트인지라 빌라의 정면 벽에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처음에 서약을 한 게 있어서 당시 빌라 정면 벽을 수리하느라 설치된 비계에 원색 비닐 끈을 이용해 그래픽적인 인스톨레이션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죠.(웃음)” 지난 2월, 빌라 메디치의 3백50주년 행사에서 그들은 프로젝터를 이용해 자신들의 페인팅 디테일을 빌라 정면에 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빌라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면서 짧은 시간과 적은 인력으로 빌라를 변화시키고 있다.소설가 오스카 쿱 판소설가 오스카 쿱 판(Oscar Coop-Phane)은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첫 소설 로 문인들의 아지트로 유명한 카페 드 플로르 상을 타며 데뷔했다. 6천 유로의 상금과 함께 그는 일 년 동안 카페 드 플로르에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전용 와인 잔에 화이트 와인 ‘퓨이 퓨메’ 한 잔을 매일 마실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간결한 문체에 전통적으로 프랑스 문학에서 다루는 주제인 사회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 밤에는 바에서 일하고 새벽에 지친 몸으로 잠들어 한낮에 일어나 글을 쓰는 날들을 보냈어요. 한때는 베를린에 머물면서 쾌락주의자들과 내일이 없는 삶을 살기도 했죠.” 그의 소설에는 이러한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빌라 메디치에 들어오면서 그는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50년간 시칠리아의 고급 호텔에서 감금되어 산 한 남작의 이야기다. 자신의 성 앞을 수상쩍게 기웃거리던 한 아이를 총으로 쐈는데 알고 보니 시칠리아 마피아 대부의 아이였고, 사회적 명망이 있어 살해 당하지는 않았으나 여생을 호텔에 갇혀 지내게 된 사람의 이야기. “하루 이틀은 바에서 술도 마시고 했겠지만 수십 년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에게는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요?” 빌라 메디치에서의 삶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글을 쓰고, 낮에는 정원을 산책하거나 로마시내를 구경하며 지낸다. 갓 태어난 딸과 부인과 함께 빌라의 커뮤니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곳은 그 자체로 작은 사회예요.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밥 먹고 놀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죠. 그러면서 사람들을 여러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어 작가로서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철학자 줄리 셔미노철학자 줄리 셔미노(Julie Cheminaud)의 연구 주제는 스탕달 신드롬이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 대학원에서 논문을 쓸 때에도 19세기 아티스트의 예술성과 정신의학적 관계에 대해 연구했다. 즉, 예술가들의 정신적, 육체적 특이점은 어떻게 그들의 작품성에 영향을 끼쳤는가가 그녀의 의문점이었다. “예를 들면 반 고흐의 광기는 다른 이들의 광기와는 다르게 예술에 기여한 점이 있습니다. 보들레르와 에밀 졸라의 작품들에도 이러한 주제가 면면이 보이고요. 아티스트의 광기가 작품에 도움이 되는 지점은 어디까지인가, 어느 선을 넘었을 때부터 광기로 인해 자멸하는가를 연구하고 있어요.”예술과 정신의학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자 한 그녀가 처음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주제를 맞닥뜨렸을 때에는 그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본 사람이 흥분하는 정신 상태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구를 하면서 관람객들이 자기가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행동한다든지 미술작품이 움직이고 있는 환영을 보는 상태에까지 다다르며 종종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특히 보티첼리 같은 르네상스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의 관리인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교육을 받는다고 하더군요.”그녀의 연구는 이 증후군이 오늘날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 고찰하는데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상태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높은 정신적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보거든요. 예전이라면 성모마리아나 신적인 존재의 지시를 받아 초자연적인 상태의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라 여겨졌을지도 모르는 상태가 오늘날에는 왜 그저 정신적 착란으로만 보여지는가? 너무나 이성적이고 분석적으로 예술작품을 다루다 보니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찬양을 바치기에 우리는 너무 타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그녀는 빌라 메디치의 콩쿠르에 발탁되기 전까지 중학교 철학 교사였다. 용기를 내 콩쿠르에 도전했고 한 번의 낙방 끝에 성공한 것. 빌라 메디치의 거대하고 정갈한 정원 한가운데, 예전에는 음식 창고로 쓰였던 복층 스튜디오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지내는 셔미노는 안락한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린트 꽃들로 둘러싸인 아틀리에에서 평온한 일 년을 보내고 있어요. 이 레지던트를 계기로 다음 해부터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죠.”뮤지션 잭슨 앤 히즈 컴퓨터 밴드잭슨 앤 히즈 컴퓨터 밴드(Jackson and His Computer Band)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렉트로 뮤지션 잭슨 프루조(Jackson Fourgeaud)는 2014년에 마지막 앨범의 투어를 하며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이미지나 움직임을 소리화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음악분야의 퐁피두 센터쯤 되는 이르캄(IRCAM, 프랑스의 일렉트로 아방가르드 음악과 음악과학 리서치 센터)과 콜라보레이션을 시도해 빛의 파장을 탐지한 후 이것을 소리의 파장으로 전달해주는 테크놀로지를 개발했다. “빌라 메디치에서 이 프로젝트를 더욱 크게 키울 수 있게 되었어요. 이르캄에서 만들었던 작은 악기들을 커다란 인스톨레이션으로 만드는 작업들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커다란 악기 두 개를 만들었는데, 하나는 어두운 방을 수증기로 채우고 그 수증기에 빛을 프리즘으로 분해해 쏘아 나타난 영상을 소리로 표현하는 악기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영상을 소리로 전환하여 여러 개 다른 모양과 표면의 메탈 판을 울리게 하여 음악으로 만들어주는 설치작품이다. 두 가지 악기 다 퍼포먼스적인 면이 다분하며 어두운 공간에서 가느다랗게 반짝이는 무지갯빛 프리즘의 움직임과 어우러져 울려 퍼지는 일렉트릭 사운드가 어쩐지 우주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보는 듯했다. “저는 이 악기들을 다분히 조소적인 형태를 상상하며 만들었어요.” 그는 앞으로 더욱 다양한 모양과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컬렉션을 늘릴 계획이다. 바르셀로나의 소나 등 일렉트로 뮤직 페스티벌에서 곧잘 디제잉을 선보이던 그는 새로운 악기와 함께 퍼포먼스를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화가 포파이2016년 빌라의 동기들은 1798년부터 1936년까지 세기를 넘어 빌라에 존재했던 전통을 되살렸는데 그것은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이다. 빌라에는 4백60점이 넘는 초상화 컬렉션이 남아 있는데 1936년 이후에는 화가가 별로 없었던 탓인지 자연스럽게 이벤트가 사라져버렸던 것. 특히 작곡가 판타지오(Fantazio)는 이 전통이 사라졌음을 아쉬워하며 그래피티 아티스트 겸 화가인 포파이(Popay)를 빌라에 초대했다.(그리고 포파이는 모든 레지던트들의 초상화 16점을 단 10일 만에 그려냈다.) 이렇게 빌라 메디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프렌치 아카데미를 이어가며 새로운 예술 장르를 받아들이는 유서 깊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빌라 메디치에서는 이처럼 다채로운 예술적, 지적 활동이 아름다운 대저택을 배경으로 쉼 없이 펼쳐지는데 반가운 사실은 이 모든 게 대중에 활짝 열려 있다는 것. 일 년에 서너 번의 비정기적인 전시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레지던트들이 빌라 메디치에서 작업한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일 테트로(Il Teatro)’ 이벤트, 가이드와 함께 정원과 빌라를 둘러볼 수 있는 투어(매일), 여러 분야의 저명한 학자나 예술가를 초대하여 컨퍼런스를 여는 프로그램(매주 목요일) 등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