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될 때(1) 작가 김채원
서른 살이 된 ‘바자’라는 인물이 과거 어릴 적 세 친구의 꿈에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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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S STORY
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성 소설가 5인이 쓴 ‘바자’라는 여자의 이야기.
여름 꿈
서른 살이 된 지금은 꿈을 잘 꾸지 않지만 어릴 때 나는 꿈을 자주 꾸었고 친구들의 꿈에도 자주 놀러 갔다. 바자, 오늘 꿈에 또 네가 나왔어. 그래? 이번이 몇 번째야? 몰라. 안 세어봤는데…… 친구들의 꿈에 놀러 간 날은 나도 단잠을 자는 날이어서, 나는 친구들의 꿈에 놀러 가는 것이 좋았다. 친구들도 그렇다고 했다. 내가 꿈에 놀러 온 날이면 깨고 나서 좋은 일이 생기거나 못된 짓을 해도 절대로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쯤에서 누군가는 이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친구들의 꿈에 놀러 간다는 것을 나스스로 알았다는 점에는 어딘지 미심쩍은 데가 있고 ( “ 잠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 ) 내가 본래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 또 거짓말하네. ” ) 나는 왜 이렇게 거짓말을 잘할까? 그것은 아무것도 감출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아무것도 감출 게 없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한다. 들켜도 상관없으니까. 나에게는 들켜도 좋을 거짓말이 얼마든지 많이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애초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묻는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킬 수가 없는데요.
지금부터 제가 여름에 방문했던 세 친구의 꿈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친구 삼의 꿈: 오른손으로 글자를 적는 꿈 이야기
친구 삼은 왼손잡이여서 오래전부터 어른들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공부를 하다가도 양치를 하다가도 혼이 났습니다. 너 그거 오른손으로 해라. 네. 오른손으로 하라니까. 네에. 어느 날 삼의 꿈속에 놀러 온 저는 왼손으로 글자를 적어도 혼내지 않는 마음씨 좋은 국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는데요. 어쩐지 국어 선생님의 모습으로 삼의 꿈에 놀러 간 기억은 흐릿한데도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둘렀던 감촉만은 선명했습니다. 삼은 아무한테도 혼나지 않고 왼손으로 계속 글자를 적다 보니 왠지 오른손으로도 글자를 적어 보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았는데 그냥 잘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어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긴장하지 않는 것. 그것을 알게 된 삼은 꿈에서 깨어나서도 오른손으로 글자를 잘 적는 어린이가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고 다만 오른손으로도 글자를 잘 적어보았던 뿌듯한 꿈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구 구의 꿈: 일하지 않는 월요일 오후의 꿈 이야기
친구 구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아직 꿈속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지요. 꿈속에서는 응당 그러하듯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들이 당연하게 일어나고 꿈의 주인 또한 그것에 대해 좀처럼 의문을 품지 않기에 구 또한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일하지 않는 월요일 오후를 당연하다는 듯 느긋하게 누렸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벤치에 앉아 퇴근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고는 퇴근하는 사람들 무리에서 퇴근하는 자기 자신을 보았지요. 구는 퇴근하는 구를 뒤쫓았습니다. 퇴근하는 구는 무척 피로해 보였지만 잘 걸었고, 중간중간 휴대전화를 들어 어둑해진 하늘 사진과 전봇대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퇴근하는 구가 뒤를 돌아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구는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퇴근하는 구가 알아서 뒤를 돌아보았고, 두 사람이자 한 사람의 두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잘 모르겠어. 구는 그날 퇴근하는 구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고 하는데, 앞서 꿈에서 깬 꿈을 꾼 터라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잘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너 지금 내가 보여? 응. 그럼 현실이야. 너는 꿈에서도 보이는데? 아무튼. 꿈속에서 저는 어디에 있었냐고요? 저는 퇴근하는 구가 찍은 아름다운 전봇대 중 하나였습니다.
친구 오영의 꿈: 식물도감을 읽는 꿈 이야기
봄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자라나고 봄에 피는 꽃이 피어난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 아래 식물의 잎이 무성해지고 곡식도 무럭무럭 자란다. 가을과 겨울은 어쩐지 쓸쓸해서 알고 싶지 않아요. 들에서 피는 풀꽃은 토끼풀, 제비꽃, 엉겅퀴, 자운영. 산에서 피는 풀꽃은 애기풀, 초롱꽃, 노루귀, 솜나물. 바람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는 20데시벨…… 친구 오영이 책장을 넘기며 오밀조밀 저를 읽어나갈 때마다 저는 온몸이 간지러워 하하 웃었습니다. 오영이 식물도감을 읽는 꿈을 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는데요. 중요한 시험을 앞둔 날이면 이와 같은 꿈을 반복하여 꾼다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식물들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요. 그렇다면 저에게 생기는 의문 한 가지: 식물들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된 만큼 식물도감인 나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는 것일까? 제 질문에 오영은 으음, 그건 잘 모르겠고…… 꿈을 꾼 뒤에 지독한 여름 감기가 단번에 나았다고 합니다.
김채원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25년 소설집 <서울 오아시스>를 펴냈다.
Credit
- 에디터/ 고영진
- 일러스트/ 진주희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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