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플래그십 스토어 이전, 사진전 개최, 그리고 '렉토'가 계획하고 있는 다음은?

정백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프로필 by 윤혜연 2025.06.12

변화의 여백에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각자의 미감을 구축한 하나의 세계로 확장 중인 두 이름, 렉토와 로우클래식. 척박한 서울의 패션 지형에서 출발한 이들이 한 시대의 막을 내리고 더 넓고 높은 무대로 향하는 화려한 2막을 시작하려 한다. 로우클래식의 이명신 대표, 렉토의 정백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그 이야기를 나눴다.


렉토 정백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렉토 정백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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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는 브랜드 정체성 수립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이것이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기억으로 남는지가 중요해졌어요. 방향보다 태도, 결과보다 연결이 중심에 놓인 셈이죠.” 렉토가 서울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인식되곤 했으나, 오히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정백석은 특정한 ‘한국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절제된 미감과 섬세한 디테일을 통해 자연스럽게 브랜드 고유의 결을 드러내고자 한다. “국적을 넘어 감각 중심의 브랜드로 인식됐으면 해요.” 그의 포부처럼 더 이상 서울이라는 지역성에 브랜드를 한정 짓기보다는, 렉토가 수년간 정립해온 감도와 미학을 바탕으로 인식의 폭을 확장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렉토의 시선은 해외 시장으로 이어진다. 글로벌 확장 역시 단기적 성과보다는 브랜드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파트너를 찾는 데 집중했다. 지난달 일본 아이웨어 브랜드 이펙터(Effector)와 협업해 선글라스를 론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시장 진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완성도는 물론 렉토가 추구하는 감성적 깊이까지 함께 담아낼 수 있는 파트너로 이펙터를 만났어요. 그 결과 브랜드 간 시너지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었고요.” 그도 그럴 것이, 렉토는 언제나 ‘진정성’과 ‘깊이’를 가장 중요한 성장 전략으로 삼아왔다. 시간을 들여 브랜드 고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다. 외적인 확장보다는 내적인 밀도를 먼저 다진다는 신념. “렉토에게 확장이란 단순히 범위를 넓히는 것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감도와 태도를 더 입체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이에요. 렉토가 바라보는 세계를 보다 정교하고 풍부하게 구성해나가는 일에 가깝거든요.”

렉토의 철학은 정백석이 디렉팅하는 비주얼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025 S/S 시즌 캠페인은 여러 패션 하우스의 러브콜을 받는 포토그래퍼 앤서니 세클라위(Anthony Seklaoui)와 함께했으며,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모델은 클레망 샤베르노(Clement Chabernaud)와 사스키아 드 브라우(Saskia de Brauw).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멋진 그들과 렉토의 이번 시즌 옷이 가진 가치가 잘 어우러졌어요. 앤서니의 감각적인 시선 덕분에 컬렉션의 메시지가 더욱 깊고 매력적으로 전해진 것 같고요.”

렉토가 수년간 정립해온 정체성은 어떤 모습일까. “브랜드의 언어를 잃지 않는 것”, 그게 렉토가 정의하는 지속가능성이다. 절제된 디자인에 고유한 분위기와 태도를 담고자 하는 철학은 최근 오픈한 플래그십 스토어와 새 프로젝트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렉토는 지난해 말 한남동에 새로운 건물을 설계해 플래그십 스토어를 이전한 바 있다.) 자연광이 깊게 스며들고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색감이 달라지는 공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렉토의 결을 공간으로서 경험하길 바랐다고. 자연스럽게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 정백석은 가구공예가 강우림과 협업했다. “처음 완성된 공간을 마주했을 때, 생각보다 조용했어요. 그런데 그 조용함 속에 모든 감각이 살아 있더라고요. 말없이 스며드는 분위기. 그게 렉토가 만들고 싶었던 ‘여운’이었죠.” 강우림은 쓰임의 정체성을 조형언어로 치환하는 작가다. 거대한 나무 덩어리를 유려한 형태로 깎아내는 그의 작업은 렉토의 미감과 깊이 닮아 있다. 플래그십 곳곳에 배치한 오브제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브랜드 감도를 드러내는 하나의 언어다. “오브제가 가진 고유한 ‘흔적’을 존중하는 강우림의 태도는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과도 닮아 있어요.” 정백석은 이 협업이 렉토의 미감을 더욱 선명하게 시각화하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오브제와 가구, 인테리어 등 공간 전반을 큐레이팅한 정백석이라 회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제품 출시 또한 단순한 판매를 넘어 브랜드 세계관을 보여주는 하나의 행위다. 렉토는 새로 론칭한 선글라스를 플래그십에서 사진전 형태로 공개했다. 목정욱 사진가와 협업한 흑백 사진전은 렉토가 바라보는 시선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이 컬렉션의 판매 수익 전액은 예술재단에 기부됐다. “창작 생태계를 존중하는 렉토의 철학을 반영한 결정”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렉토는 쉼 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간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던 ‘리지(Llege)’ 로고 셔츠는 이제 독립적인 세컨드 레이블로 새 출발을 앞두고 있다. 렉토가 본질과 감도, 태도에 집중하며 조용한 존재감을 구축해왔다면, 리지는 보다 외향적이고 유연한 시선으로 경쾌한 에너지를 풀어낼 예정이다.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 렉토의 움직임은 언제나 조용하지만 분명하다.


렉토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에 있는 가구공예가 강우림의 작품. 렉토x이펙터 신제품. 렉토와 사진가 목정욱이 협업한 전시 «리플렉트(Reflect)».

Credit

  • 사진/ 목정욱(정백석 포트레이트),ⓒ Low Classic,ⓒ Recto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