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제이든 초의 첫 쇼

제이든 초가 소규모 인원만 초대한 채 살롱 쇼를 선보였다. 그의 첫 쇼다.

프로필 by 윤혜영 2025.04.05

FIRST TIME


온통 하얀색으로 채워진 작은 공간. 그 가운데를 제이든 초의 시그너처이자 아틀리에에서 손수 만든기하학적인 패턴의 컷아웃 원단이 가로 지르고 있다. 이 단순한 공간에서 제이든 초의 첫 번째 쇼가 열렸다.디자이너 조성민은 고심 또 고심하며 게스트 리스트를 작성했고 소수의 인원만을 초대해 소규모 살롱 쇼를 선보였다. 쇼가 끝난 며칠 뒤, 한층 여유로워진 모습의 그를 다시 만났다.


백스테이지로 변한 엄버 포스트파스트 매장 1층에서 디자이너 조성민과 쇼의 오프닝을 장식한 모델 이혜승.

백스테이지로 변한 엄버 포스트파스트 매장 1층에서 디자이너 조성민과 쇼의 오프닝을 장식한 모델 이혜승.

하퍼스 바자 첫 쇼다. 당일 무척 긴장하고 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조성민 스스로 평정심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긴장되어 보였나? 쇼는 모든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되었다. 쇼가 끝나고 며칠간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하퍼스 바자 쇼의 주제인 ‘앙코르(Encore)’는 무슨 의미인가?

조성민 ‘한 번 더 해보자’란 의미를 담았다. 브랜드를 시작하고 첫 번째 목표가 ‘3년은 해보자’였다. 론칭 당시 세트 스타일리스트로 꽤 유명세를 탔다. 쉬운 길이 있는데 무작정 옷을 만들고 싶더라. 그렇게 계획했던 3년이 끝났다. 나는 이때를 절망의 3부작이라고도 부른다.(웃음) 생각보다 잘되고, 또 생각보다 기대 이하란 생각이 들었다. 변할지, 변하지 말아야 할지, 직진할지, 멈춰야 할지, 한번은 마침표가 필요했다. 이번 쇼가 제이든 초의 미래를 결정 짓는 어떤 기준점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칭찬과 독려, 즉 앙코르를 받아야 또 다시 젊음과 돈을 투자할 수 있을 것 같은.

하퍼스 바자 인터뷰에 응한 걸 보니 직진할 동력이 생긴 것 같다.

조성민 맞다. 솔직히 ‘더 이상 쇼를 못할 수도 있다’란 전제로 준비했다. 한편으로 칭찬을 받고 싶기도 했고. 브랜드의 승패를 따지는 데 매출이 가장 큰 판단 요소 아닌가? 제이든 초는 돈을 위해 시작한 브랜드가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의 평가가 절실했다.

하퍼스 바자 첫 쇼를 소규모 살롱 쇼로 진행했다.

조성민 이 공간은 나의 또 다른 브랜드이자 몇 달 전 오픈한 엄버 포스트 파스트 매장의 지하 1층이다. 1부는 셀럽과 프레스, 2부는 고객과 그동안 도움 받았던 분들을 초대해 진행했다. 각각 40분씩.

하퍼스 바자 큰 규모의 쇼를 상상하진 않았나?

조성민 당연하다. 넘보면 안 되지만, 프라다 쇼를 떠올려보자. 요즘은 프라다 쇼에 가는 사람이 제이든 초 쇼에 오고 프라다 옷 옆에 제이든 초 옷이 디스플레이되는, 되게 이상한 시대다. 내 입장에서는 꿈꿨던 일이기도 한데 막상 닥쳐보니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분수에 맞는 쇼를 준비하자 싶어 자연스레 이 공간을 선택했다. 너무 소규모인가 싶어 갈팡질팡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더 멋있겠다 싶더라.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하퍼스 바자 피드백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인가?

조성민 쇼가 끝나고 회식을 했다. 회식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집에 가자마자 급격히 기분이 다운되었다. 쇼보다는, 내 인생이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리끌레르>의 전 디렉터가 밤 11시에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치 그날 밤 나에게 이런 피드백이 꼭 필요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쇼장 중간에 막을 두고 모델 두 명이 동시에 워킹하는 구성이 좋았다” 같은 잘한 점과 못한 점, 아쉬운 점에 대한 평가였다. 어떤 단어에 꽂혔다기보단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핑크 컬러, 실크 프린트, 배클리스 트렌치코트 등 제이든 초의 시그너처로 가득한 컬렉션. 톤온톤으로 매치된 펌프스를 들고 리허설을 기다리는 모델들. 디자이너의 대학 동기이자 조력자가 한 땀 한 땀 수놓은 비즈 장식들.

변할지, 변하지 말아야 할지, 직진할지, 멈춰야 할지, 한번은 마침표가 필요했다. 이번 쇼가 제이든 초의 미래를 결정 짓는 어떤 기준점이 될 것 같다.


하퍼스 바자 컬렉션 준비 기간은 어느 정도였는가?

조성민 컬렉션은 작년 11월에 대부분 완성되었다. 일부는 지난 9월, 파리에서 바이어들에게 보여주기도 했고. 큰 주제는 색깔 쪼개기다. 개인적으로 색을 좋아하고 여러 색을 많이 쓰는데 그동안 써보지 않았던 컬러를 더 미세하게 쪼갰다. 또 앙코르란 주제에 맞춰서 지나온 컬렉션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다. 제이든 초의 대표적인 아이템 플래그 드레스는 코트부터 스커트, 셔츠로 변주되었다. 평면 패턴이 런웨이에서 입체적으로 변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퍼스 바자 어떤 부분에 가장 공을 들였는가?

조성민 걸을 때마다 찰랑이는 비즈 소리, 이리저리 반짝이는 광택, 노란색과 주황색, 파란색이 차례로 나오는, 바라만 봐도 기분 좋은 쇼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장치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했다.

하퍼스 바자 섬세한 자수와 비즈 장식 등 제이든 초는 국내에선 보기 힘든 오트 쿠튀르의 미학을 보여준다. 함께하는 장인이 있나?

조성민 퀄리티에 따라 단계가 있다. 아틀리에에서 팀이 하는 경우도 있고, 까다로운 건 대학 동기인 친구에게 맡긴다. 예를 들어 꽃들이 비즈로 수놓인 그레이 코트는 손 기술이 필요한 패션 자수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기계로 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맡길 만한 업체가 없다. 샤넬 공방 같은 곳이 없다는 얘기다. 사실 인도에 있는 디올 공방과도 진행해본 적이 있는데 원하는 퀄리티에 미치지 못했다.

하퍼스 바자 그 친구는 믿고 맡길 수 있는 공방인 셈이겠다.

조성민 우리의 협업은 졸업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졸작을 위해 자수를 한 땀 한 땀 하고 있는 걸 보던 친구가 만사 다 제쳐두고 6개월간 나를 도와줬다. 나는 디렉터를, 그 친구는 르사주(Lesage, 샤넬의 자수와 직조를 담당하는 공방) 행세를 했다고 할까? “나 꽃이 필요해”라고 하면 친구의 샘플을 쫙 깔아두고 고르는 일종의 역할극도 즐겼다. 그 친구는 나에게 “네 자수 파트는 내가 평생 책임질게”, 나는 친구에게 “자수 장인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줄게”라며 약속을 했다. 그게 벌써 10년째다. 서로 망해서는 안 될 관계라고 할까? 그 친구가 더 이상 못하겠다 백기를 들면, 조성민의 많은 피스들이 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한다.


길게 늘어진 플래그 톱이 쇼에 드라마를 더했다. 쇼 직전 마지막 점검 중.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던 비즈 스커트. 디자이너가 사랑하는 꽃 프린트가 담긴 실크 톱이 걸을 때마다 하늘거린다. 쿠튀르의 미학을 보여주는 장식적인 피스. 디자이너가 꼽은 콤비 룩 중 하나인 블록 드레스. 그는 이 드레스를 통해 처음으로 주황색을 사용했다.

하퍼스 바자 그렇다면 이 코트는 한 달에 몇 피스 정도 만들 수 있는가?

조성민 한 피스. 이걸 아는 고객은 가격이 너무 저렴하다고 얘기한다.

하퍼스 바자 또 다른 조력자도 궁금하다.

조성민 브랜드의 숍 매니저이자 주얼리 브랜드 스테디 스트림(Steady Stream)의 디자이너가 이번 쇼의 주얼리 메이커로 활약했다.

하퍼스 바자 모든 룩이 소중하겠지만, 원 픽을 꼽는다면?

조성민 이 질문이 가장 스트레스 받는 질문이었다.(웃음) 룩 하나보다는 콤비를 뽑겠다. 제이가 입은 카디건과 스팽글 스커트, 그리고 김지원이 입은 하얀색과 주황색 블록 드레스. 이 조합이 나에게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하퍼스 바자 실험이란 의미를 잘 모르겠다.

조성민 블록 드레스의 주황색은 실크 소재엔 잘 쓰지 않는 색이다. 말도 안되는 색이랄까? 레이어링된 니트 톱, 스팽글 스커트, 브로치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룩에 단순한 블록 드레스가 연달아 나오는데 리허설 때 그 대범한 조합을 보니 스스로에게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더라.

하퍼스 바자 제이든 초하면 핑크 아닌가? 주황색 옷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조성민 주황색은 너무 중성적이고 약간 메슥거리는, 한마디로 지겨운 색이다. 난 환타 오렌지도 싫어한다. 노란색도 비슷한데 이번 컬렉션의 과제가 ‘노란색’이었다. 런웨이 곳곳에 자리한 셔츠와 드레스가 그 결과물. 스스로 컬러를 통해 모험을 해나가고 있다. 최근 과제로 주황색을 택했다. 쇼 직전까지 없던 주황색이 생기게 된 이유다.

하퍼스 바자 과거 쇼 피날레에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요즘은 휴대폰으로 찍기 바쁘다. 이 부분이 아쉽진 않은가?

조성민 원단 사각거리는 소리, 코앞까지 온 모델들, 실제로 봐야 알 수 있는 미묘한 광택감까지 현장에 오신 분들만 느낄 수 있는 걸 보여주는 게 쇼의 목표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쉽긴 했다. 이래서 더 로우가 휴대폰을 빼앗았구나.(웃음)

하퍼스 바자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긴다면?

조성민 75점. 콤팩트하게 하는 게 좋을 듯해서 룩을 꽤 많이 걷어냈다. 그러다 보니 쇼가 짧았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하퍼스 바자 두 번째 쇼가 벌써 기대된다. 몇 가지 힌트를 줄 수 있을까?

조성민 일 년에 한 번씩을 계획했는데 당장 10월이 어떨까 싶다. 똑같은 형태에 색만 다른 드레스 50벌을 선보이거나, 앙상블을 주제로 모든 룩을 투피스로 하든지, 아니면 제이든 초답지 않게 컬러를 모조리 배제한 화이트 룩은 어떨까. 재밌는 아이디어가 솟구치고 있다.

하퍼스 바자 계획되어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조성민 여섯 명의 디자이너가 창경궁에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패션 분야는 제이든 초가 유일하게 참여한다. 4월 26일 공개될 예정이고.

Credit

  • 사진/ 유동군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