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투명하고 단단한 빛
맨홀 뚜껑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 흔들리는 찰나에 포착된 얼굴, 벗겨진 손끝의 피부. 빛과 어둠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작가 양유연의 시선은 주로 모호한 이야기를 품은 것들에 닿아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 단단한 시선으로 세상과 대상을 응시한 뒤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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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연, <Afterglow in Between>, 2023, 장지에 아크릴릭, 142.8x76.3cm.
작년 가을 프라이머리프랙티스에서의 개인전 «그 사이에서 빛난 후»를 통해 작품을 처음 접했는데, 빛이 드는 순간을 담은 이미지를 품은 한지 위로 자연광이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빛과 어둠은 내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2019년부터 온전한 대상으로 빛을 다루고 있다. 이전에는 대상이나 이야기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면, 빛 자체를 관찰하기 시작한 거다. 장지라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전에는 흰색 물감을 발랐다면, 빛을 잘 투과하는 특징이 있는 질료의 특성상 흰 부분을 칠하지 않고 비워둔 채 남기게 됐다. 처음 작업을 구상할 때 의도한 대로 완성되면 괜찮지만, 구도나 요소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을 땐 중간에 수정하기가 어려워 까다롭다. 종종 그리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릴 때도 많다.(웃음)

양유연, <Afterglow in Between>, 2023, 장지에 아크릴릭, 142.8x76.3cm.
캔버스 대신 한지의 일종인 장지(닥나무나 뽕나무 껍질로 제작되는 한지의 일종)를 활용하는 작가가 꽤 늘고 있는데, 동양화를 전공한 당신이 장지를 고집해온 건 당연한 선택이었나?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은 매일의 놀이이자 일상이었다. 초등학생 무렵 다들 도화지에 수채화를 그릴 때 나는 늘 수묵화처럼 그리곤 했다. 쨍하게 밝고 선명한 색이 아니라 아니라 살짝 어둡고 칙칙하게.(웃음) 그러다 중학교 때 처음 동양화 재료를 접했는데,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흡수되고 퍼지는 그 감각이 되게 좋았다. 예고 입시를 준비할 때도 도화지와 수채화보다 장지에 목탄 드로잉을 택했는데, 수채화를 그릴 때보다 작업이 훨씬 수월하게 잘 됐다. 이 질료 자체가 나한테 너무 잘 맞았던 것 같다.
재료의 특성상 수묵화처럼 물감을 번지듯 표현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당신의 그림은 여러 겹의 붓질이 몹시 밀도 있게 쌓여 있다. 비법이 무엇인가? 옅은 밀도의 물감을 수십, 수백 번 쌓고 하나의 색을 만들기 위해 여러 색을 겹치는 게 나만의 방식은 아닐 거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기꺼이 인내하려고 한다. 장지는 물을 칠하는 행위에도 종이의 성질이 크게 달라지고 습도에 민감해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서양화에서 밑작업으로 젯소 칠을 하듯 동물의 젤라틴을 고체화한 아교반수 작업을 꼼꼼히 하는 편이다. 흔히 동양화를 전공한 이력과 내 작업의 결과만을 보고 작업 과정이 정적이고 차분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동양화 전공 작가에게 관습적으로 붙는 수행이나 명상 같은 단어와 거리가 멀다. 작업실에 놀러 온 친구들이 촐싹이는 나를 보면 영상을 찍고 싶다고 할 정도로 혼자 분주하다. 물감이 흡수되기 전에 정신없이 움직일 뿐이다.(웃음)
지금 작업실에 보이는 작업들도 그렇고 유독 손의 모양새를 그린 작품이 많다. 작업 초기에는 발갛게 피가 맺힌 손끝이나 벗겨진 손가락 피부 같은 이미지를 볼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움직이는 형태의 손가락이 자주 등장한다. 손이 제일 관찰하기 쉬운 신체 부위이니 무의식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2010년쯤, 아크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며 서양화 재료에 대한 정보 없이 전통 재료인 먹처럼 아크릴을 손에 묻히고 문지르며 그리다가 독소 때문에 피부병이 생겼다. 당시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던 때라 복합적인 이유로 피부염을 꽤 오래 앓았다. 증상이 심할 땐 늘 장갑을 끼고 다닐 정도였고 감각이나 심리도 예민해졌다. 상처가 변화하는 과정을 계속 기록으로 남기면서 손을 점점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매개처럼 활용했다. 그동안 손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화면에 가져왔다면, 올해 홍콩 블라인드스팟에서의 개인전 이후로 보다 능동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방치되거나 나약한 대상으로서의 손이 아닌 손의 쓰임을 고민하며 신작을 완성했다. ‘노동’이라는 주제를 틈틈이 다뤄왔는데, 전면에서 다루는 시도를 해본 전시다.

내가 다루는 결과물이 늘 불분명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하고, 또 내 작업을 보고 선(아우트라인)이 없는 게 특징이라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아예 실루엣이 사라진 대상을 묘사하면 어떨까 싶었다. 흔들린 대상을 정교한 붓질로 묘사한다는 행위 자체도 아이러니해 재미있었고. 화면을 분할하는 건 전시공간에서 작업을 일정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블라인드스팟은 M+가 후원하는 지그 프라이즈를 수상한 왕츠오(Wang Tuo),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인 아이작 총와이(Isaac Chong Wai) 등 사회 시스템에 관심을 두는 젊은 작가들이 속해 있는 갤러리다. 전속 소식을 듣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과거 1970년대 방직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얼룩>, 2017)을 그리기도 했고, 올 초 타데우스 로팍의 그룹전에서 선보인 작품(<섬광>, 2024) 또한 도로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플래시를 비춘 광경이라는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내 작업은 삶의 변화에 따라 너무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회와 정치적인 사건에 관심을 두었을 땐 거시적인 이미지를 다루었다. 줄곧 노동 현장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몸으로 하는 노동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이 좀 있지 않나. <얼룩>은 작품에서 다룬 사건의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감정에 이입해 화면에 투영하고 싶었고, <섬광>은 실제로 목격한 노동의 현장이 순간의 빛으로 아름다워 보였던 기억을 최대한 화면에서 재현하고자 했다. 맨홀 아래 노동자들의 모습을 포착했던 작품을 그린 적이 있는데 그 이미지를 붙잡고 지난 전시에서 발전시켰다. 또 이번에 훼손되고 버려진 사물을 그린 신작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물을 보면 나는 늘 사물과 나를 동일시하게 된다. 집이 시외 외곽인데, 지나다 보면 버려진 물건이 그렇게 많다.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리기 전 교외에 버려진 마네킹을 대상으로 한동안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일상에 밀접한 이미지, 풍경이 다 작품 소재가 된다.
인물을 그릴 때 눈빛 초점이 불분명한 채 흐릿하게 표현할 때가 있다. 또 초상을 이분할로 나누어 그리는 등의 특성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진’ 같다고 느끼게 한다. 의식적으로 눈길이 가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 한다. 주로 낮보다 밤에 깨어 있어서 어두운 밤 이미지가 화면에 많이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웃음) 2년 전쯤 초점이 흔들린 이미지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던 때가 있다. 내가 다루는 결과물이 늘 불분명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또 내 작업을 보고 선(아우트라인)이 없는 게 특징이라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아예 실루엣이 사라진 대상을 묘사하면 어떨까 싶었다. 흔들린 대상을 정교한 붓질로 묘사한다는 행위 자체도 아이러니해 재미있었고. 화면을 분할하는 건 전시공간에서 작업을 일정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요즘의 화두나 앞으로 작업에서 시도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 준비한 전시를 모두 끝내고 그걸 고민하는 시기다.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는 건 생경한 것을 그리고, 생경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보여주는 거다. 최근의 관심사는 다시 신체,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 여태껏 사람을 사람처럼 보이는 작업을 했으니, 이제 사람을 사람답지 않게 보여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몇 해 전 사람의 몸을 무기물 혹은 빛을 발하는 대상으로 상정하고 <The Site>(2022)라는 작품을 그린 적 있는데, 비슷한 맥락의 작업을 시도하고 싶다. 내년 상반기 해외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양유연, <맨홀>, 2022, 장지에 아크릴릭, 150x210cm.
안서경은 <바자> 피처 에디터다. 버려진 물건을 향해 시선을 두고 감정적 동기화를 서슴지 않는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 잠시 문학적인 상상을 해봤다.
Credit
- 사진/ 이우정(인물),스티븐 프리드먼 갤러리 제공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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