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관람객들

멋있는 작품, 근사한 건축 말고. 전시장 안팎의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 익숙하고도 낯선, 아름다운 장면들.

프로필 by 고영진 2024.09.03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날씨다. 전시 리플릿을 부채 삼다, 양산 삼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분주히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 사이 고요히 벤치를 지키고 앉은 부부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전시 다 보고 집에 가기 전에 아쉬워서 좀 앉아 있는 거예요. 오랜만에 ‘꼭 봐야지’ 했던 전시거든요. 한국 근현대 자수전이요. 나이가 들수록 뭔가를 궁금해하는 마음이 귀하게 느껴져요. 꼭 보고 싶은 전시가 생기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전시도 그렇고 여기 풍경도 그렇고, 아름다운 걸 많이 보니 더위도 견딜 만해요. 집에 가야 되는데 자꾸 엉덩이가 무거워져서 문제죠.(웃음)” 대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전시를 관람하듯 풍경을 담는다. 사실 덕수궁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 부부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몇 살 때인지도 모를 기억에 늘 이곳이 있었고, 오늘 또 기억의 한 페이지를 채웠다.

일요일 오후 다섯시의 미술관
교육동 벽면으로 해가 길게 드리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얼굴이 벌겋게 익은 채 뛰노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마구 뛰고 가끔씩 시원하게 소리도 내지를 수만 있다면, 이곳이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놀이터든 상관없는 일 아닐까. 다 관람하지도 않은 전시를 뒤로한 채 떼를 써 밖으로 나온 건지, 애초에 전시장에는 들어갈 생각도 없었던 건지. 안에서는 한창인 정영선의 전시보다도 또래 친구들이 점령한 전시관 앞 잔디 마당이 궁금했을 아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네모난 놀이터였을지도.

박물관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여느 때보다 한적한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말도 없이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쉬운 휴대폰 보는 일도 마다한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멍하니 창밖을 보게 만든 사연을 헤아려본다. 푹푹 찌는 여름날. 숨 막히는 바깥 공기와 달리 박물관 안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상쾌했을 것이다. 땀이 식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관람을 미룬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것뿐.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올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작품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생기를 되찾고 바라본 오색빛의 공예품은 더욱 생생한 감동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관으로의 피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을 휴가지로 택한 가족도 있다. 심지어 군인인 아들의 일정에 맞춰 온 가족이 함께 낸 귀한 휴가. “언젠가부터 우리 삶이 영상에 치우쳐 있는 것 같아요. 지금도 보세요. 우리 아들은 유튜브 보고 있지, 딸은 SNS 하느라 정신없지.(웃음) 이제 전시는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 같아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시작일 뿐. 남은 2박 3일의 휴가 동안 이 근처 미술관과 박물관, 갤러리들을 가능한 많이 둘러볼 생각이란다. “휴가에 왜 미술관을 가냐고 할 수 있지만 휴가라서 가는 거지요. 자고로 쉬려고 갖는 게 휴가잖아요. 저는 새로운 뷰를 봐야 진짜 쉼이, 충전이 되더라고요. 멋있고 예쁜 곳이야 서울에 얼마든지 많겠지만 사람이 많아도 눈이 피로하지 않은 곳은 미술관밖에 없는 것 같고요.”

전시를 왜 봐야 하냐고 묻는다면
“전시는 지금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한정적인 거잖아요. 그래서 예술 이벤트 중에서도 더 특별하게 느껴져요.” 건축을 배우고 있다는 두 학생에게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서펜타인 파빌리온전은 손꼽아 기다리던 전시다. <바자 아트>를 레퍼런스 삼아 예술, 건축 동아리 매거진을 만들었다는 이들은 우리의 취재를 누구보다 반가워한 관람객이기도 하다. 걸려 있는 작품들 사이 사이 배치된 영상, 전시장에 빛이 들어오는 모양, 작품의 진열 방식…. 한눈에 담기는,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전시장이지만 이들에게는 꼭꼭 씹어 삼키듯 관람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굳이 시간 내서 전시를, 예술을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감수성 때문이라 말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이제 먹고사는 데 어느 정도의 여유를 갖췄고, 남 일에는 딱히 관심도 없어요. 이렇게 딱딱해진 사회를 조금이라도 말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예술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나 공간이 주는 감동은 다른 것으로는 쉽게 대체할 수 없으니까요.” 이토록 적극적인 관람객이 있기에 전시가, 예술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대학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 두 사람과 기분 좋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그런 생각도 했다.

고영진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전시장의 작품만큼, 때로는 작품보다 관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Credit

  • 글/ 고영진
  • 사진/ 김연제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