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물멍'

오래된 유물을 보면서 명상하는 방법

프로필 by 안서경 2025.02.25

유물, 멍


소박하고 초연한 우리 유물의 면면을 담은 책 <유물멍>이 출간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관들이 <바자>에 보내온 사적인 단상.


초등학생 제인이네 가족이 된 앵무새 첫눈이를 꼭 닮은 원앙 모양 청자. 청자 원앙모양 향로뚜껑, 고려 12세기.

초등학생 제인이네 가족이 된 앵무새 첫눈이를 꼭 닮은 원앙 모양 청자. 청자 원앙모양 향로뚜껑, 고려 12세기.

“연잎 위에 곱게 놓인 가을밤의 야참”을 생각나게 하는 소반. 나전칠 연잎모양 외다리 소반, 조선 19~20세기 초.

“연잎 위에 곱게 놓인 가을밤의 야참”을 생각나게 하는 소반. 나전칠 연잎모양 외다리 소반, 조선 19~20세기 초.

바라보고 있으면 허허하고 웃음이 나올 지경이 된다. 이 병을 만든 사람이나 이것을 즐겨서 쓰던 이조시대 사람들이 모두 이 병을 바라보고 느끼는 지금의 내 심정과 같은 흥건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세상사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숨김없는 마음의 자세가 이 병에 새겨진 성근 그림처럼 야무지지도 못하고 모질지도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 최순우, <한국미, 한국의 마음> 中 백자상감초문편병


1980년 초판 이후 최근 45년 만에 복각을 마친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자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의 책 <한국미, 한국의 마음>에는 일생 동안 오랜 유물과 미술품, 건축물에 관해 차분히 써내려간 글이 담겨 있다. 내게 국립중앙박물관은 예술에 관해 아는 척할 필요나 알아야 할 것 같은 의무 없이, 순전히 박물관이라는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장소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만여 점에 달하는 상설전시 작품들을 연보나 사조, 기법에 따라 꿰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저 마음 편히 유물에 둘러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곳의 고예술품들은 어느 부호나 컬렉터가 용처와 미감에 맞게 모은 것만이 늘어선 전시장의 것과는 다른 결을 지닌다. 거친 생활감이나 복원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모양새의 작품들도 부지기수. 신간 <유물멍>은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들과 관람객들이 방대한 유물 전시장에서 자신의 ‘최애 유물’ 100선을 꼽아 감상한 사적인 후기를 모았다. 이를테면 모두가 지극한 시선으로 최순우 선생이 되길 자처한 책 같달까. 책을 펴내기까지 기획을 총괄한 국립중앙박물관 김미소 연구관과 나눈 이야기.


짐을 멘 듯한 자세와 장난기 어린 표정. 보고 있으면 미소가 번지는 ‘걱정인형’을 닮은 토우. 사람모양 토우, 신라.

짐을 멘 듯한 자세와 장난기 어린 표정. 보고 있으면 미소가 번지는 ‘걱정인형’을 닮은 토우. 사람모양 토우, 신라.

하퍼스 바자 책 제목이 직관적이다. 박물관에서 일하다 보면 유물 앞에서 ‘멍’ 때리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나?

김미소 박물관에 관람객들이 오셔서 얻어가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명상’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가만히 멈춰서 유물을 바라보는 시간이 명상의 시간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좀 더 친숙한 표현을 찾다가 정하게 됐다. 이 표현의 원조는 사실 2021년 상설전시관 3층 도자공예실에 마련된 달항아리 감상 공간에서 착안했다. 달항아리, 백자대호 한 점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고 뒷벽에는 영상을 틀어 사람들이 ‘달멍’을 할 수 있게 만든 전시실이 큰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이후 가만히 멈춰서 유물을 보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다.

하퍼스 바자 건축가 최욱과 협업한 반가사유상을 감상할 수 있는 ‘사유의 방’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만든 공간이었지 않나. 국립중앙박물관은 대중에게 유물을 친근하게 소개하는 활동을 확장하고 있다. 이 책 역시, <아침 행복이 똑똑>이라는 뉴스레터에서 시작한 것으로 안다.

김미소 2018년 문자메시지와 메일링을 통해 소장품을 소개하자는 기획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큐레이터들의 글을 소개하다가 이후 관람객들에게 ‘단 하나의 유물’, ‘한류를 찾아라’ 같은 다양한 주제를 내걸고 감상문을 공모하게 되었고 구독자가 10만 명에 달하며 점점 아카이브가 쌓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으로 이전한 지는 20년, 개관한 지는 올해로 80년이 되는 기관이다. 오래된 물건이 많은 공간이기에, 고루하지 않은 인상을 주기 위해 다방면에서 힘쓰고 있다. 전시 도록이나 설명문도 국어문화원연합회와 함께 전시 용어 개선 사업을 펼쳐 한자어를 배제하고 쉬운 용어로 순화하는 작업을 한 게 대표적이다.

하퍼스 바자 하나의 간행물로 엮으면서 특히 고려했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미소 오래된 물건은 그 자체로 서사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물마다 사연과 용처는 모두 다르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전시장에서 무리 지어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보는 경험과 달리, 하나하나 조우하며 찰나의 교감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랐다. 기획이 뾰족하지 않았던 초기에는 출판에 선뜻 응하는 출판사가 없었다. 푸른빛의 청자, 순백의 백자, 금빛과 흑빛, 붉은빛처럼 조형적·형태적으로 나누어 재미있는 유물을 꼽게 됐다. 페이지에 여백을 충분히 두고 다른 데 시선을 뺏기지 않고 유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레이아웃을 배치했다. 방대한 역사나 지식이 유물을 그 자체로 감상하는 데 되려 진입 장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부록 글은 맨 뒤에 실었다. 어렵게 여길 필요 없이 자신만의 느낌으로 볼 수 있도록.

하퍼스 바자 “우리는 물건에 둘러싸인 삶을 보내지만 어떤 것은 내게 오기까지 특별한 사연을 갖는다.” 서문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저마다 꼽은 유물은 잘 알려진 국보나 보물도 있지만 유적에서 대거 출토된 낯선 유물도 많더라.

김미소 반가사유상, 금동대향로처럼 스타 유물들은 유명한 만큼 아름답지만, 특별전 때 잠시 전시된 후 수장고로 돌아가는 작은 유물들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예를 들어 토우가 그렇다. 삼국시대에 저승길에 친구가 되어주라는 의미로 무덤에 함께 넣은 작은 인형들인데, 들여다볼수록 너무 귀엽다. 투박한 것 같기도 한데, 최순우 전 관장님은 신라 토기들을 두고 “무재주의 재주”란 표현을 하셨다. 일부러 기교를 부려 화려하게 만든 게 아니라, 조물조물 진성성을 담아 만든 것. 재작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은 같은 기간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과 전시기간이 겹쳐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는데, 현재 3월까지 광주박물관에서 순회전을 열고 있다. 꼭 한번 감상해보시길 권한다.

하퍼스 바자 어쩐지 책을 읽으며 에세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연구관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유물 곁에서 일한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 또 현대인에게 유물을 감상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나?

김미소 그 책에서 박물관에서의 시간을 ‘정적을 음미하는 시간’이라 칭했던 것 같은데, 무척 공감했다. 다른 동료 연구관분들이 유물을 깊게 파고들어 연구하고 조사하는 걸 보면 애정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 느낀다. 나 역시 내가 느낀 아름다움을 콘텐츠의 형태로 잘 전하고 싶다. 요즘 콘텐츠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이클이 무척 빠르지 않나. 따라가기 힘든 속도일 때가 많고, 그렇게 소비하고 나면 압박감이 쌓일 때도 많다. 박물관은 이와 반대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이고, 그렇기에 이곳에서 사람들이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이 공간이 주는 유익함이 아닐까.

하퍼스 바자 <유물멍> 2탄을 고려 중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김미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은 총 44만여 점에 달하는데, 상설전시실에 전시된 건 1만여 점이고, 책에 소개된 건 100점이니 더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드리고 싶은 유물이 많다. 뮤지엄 굿즈인 ‘뮷즈’가 유행하듯 박물관의 출판물을 통해 좀 더 친근한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이라는 플랫폼을 보면 크기, 시대, 국적별로 소장품을 검색해볼 수 있다. 미리 책과 플랫폼을 보고 박물관에 오셔서 자기만의 최애 유물을 찾아보셨으면 좋겠다. 요즘 e뮤지엄을 통해 5cm 미만 초소형 유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떠나보낸 이의 마음

관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음악에 맞춰 마치 춤을 추는 듯 두 팔을 벌린 사람들이 따르고 있다. 그 옆으로 개구리 뒷다리를 문 뱀 위에 사람이 올라타 있다. 사람, 동물, 사물을 빚어 토기 뚜껑에 장식한 신라의 ‘토우장식 토기’.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는 뜻의 토우(土偶)는 아주 작지만 사실적으로 표현된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생겼구나 당시에는 이런 동물들과 함께 살았지, 끊임없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토우장식 토기는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며 만든 것이기에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사람을 보내는 이들의 삶,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함께했던 일상의 순간들과 하늘·땅·바다의 모든 동물, 음악과 춤이 있는 축제와 같은 장례를 표현한 토우장식 토기에서 1천6백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해지며 마음은 똑같구나 느끼게 된다. 떠나보낸 이가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는 마음 말이다. ‐ 이진민 연구관

토우장식 토기, 경주 황남동 유적, 신라 5세기.


손자국이 움푹 나 있는 투박한 모양새가 귀여운 토우. 사람모양 토우, 신라 5세기.

꿈결 같은 그 얼굴

반가사유상이라고 하면 우아하고 근엄한, 모두가 알고 있는 유명한 국보가 떠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더 애착이 가는 반가사유상은 따로 있다. 고개를 숙이고 척하니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나른한 단잠에 빠진 것 같아 그 꿈결 같은 얼굴을 계속 바라보게 되는 작품. 반가사유상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전인 싯다르타의 태자 시절 모습, 깨달음을 잠시 미룬 보살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삶에 대한 깊은 생각, ‘사유’하는 모습을 특징으로 하는 불상이다. 하지만 이 반가사유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심오한 말보다는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을 꾸듯 사랑스럽고 엉뚱한 모습에 미소 짓게 된다. ‐ 양수미 연구관

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높이 8~9cm, 지름 15~17cm에 달하는 조상님의 밥 공기는 현대인의 밥 공기보다 5배가량 크다. 청동 합, 경기 화성시, 조선. 제사를 지내기 전 손을 씻기 위한 제기. 물레를 돌리며 하얀 흙으로 붓질을 한 흔적이 근사하다. 분청사기 귀얄제기, 조선 15세기 후반~16세기.


Credit

  •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