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아그네스 마틴이 남긴 것들

오는 5월, 솔올미술관에서 아그네스 마틴의 국내 최초 미술관 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에 게스트 큐레이터로 참여하는 테이트 모던 명예관장 프란시스 모리스와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모호하고 신비로운 영감과 은둔의 아이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프로필 by 안서경 2024.05.03
 <Untitled>, 1955, Oil on canvas, 118.1x186.3cm. © Estate of Agnes Marti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Pace Gallery Photo by Gordon Riley Christmas

<Untitled>, 1955, Oil on canvas, 118.1x186.3cm. © Estate of Agnes Marti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Pace Gallery Photo by Gordon Riley Christmas

독립영화 제작자 메리 랜스의 다큐멘터리 <세상을 등지고(With My Back to the World)>에서 아그네스 마틴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웅얼거리듯 말한다. “나는 세상을 등지고 그림을 그린다.” 작가의 삶에서 고립의 역사는 유년기에서 유래한다. 1912년 캐나다 서스캐처원의 외딴 농장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가학적일 만큼 엄격했다. 마틴은 30세 가까이 되어서야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며 창작을 시작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수련하거나 돈벌이로 갖가지 일을 하며 지내다 마침내 시작한 미술이었지만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작품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바람에 이 시기 작품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40대 중반이 된 작가는 딜러 베티 파슨스를 만나 로어맨해튼에 정착하면서 우리가 마틴 하면 떠올리는 기하학적인 추상작품을 선보였다. 옅게 채색한 화면에 반복되는 그리드(격자무늬)의 미묘한 변주. 언뜻 서로 비슷해 보이는 작품만큼 작업 과정도 동일했다. 며칠 혹은 몇 주간 명상을 하기도 하며 영감을 기다리다 비교적 완벽한 상이 떠오르면 노트에 그리드를 구성하기 위한 간단한 수식을 휘갈기며 상을 확대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자를 대고 연필로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작업은 고요하고 빠르게 진행되지만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이 끼어들면 과감히 새로운 캔버스로 옮겨간다. 1967년, 예술은 영감에서 비롯된다고 믿었고 “가장 완벽한 순간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던 작가는 미술계를 떠나 뉴멕시코의 외딴집에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켰다. 1974년 떠났을 때처럼 홀연히 돌아온 작가는 페이스 갤러리의 설립자 안 글림처를 찾아가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며 전시할 수 있는지 물었고 이후 두 사람은 인생과 예술에서 최고의 친구가 되었다. 60대가 된 아그네스 마틴은 뉴멕시코에서 작업에 전념하며 여러 점의 최고작을 제작했다. 말년에 작가는 고급 실버타운으로 이주해 새하얀 BMW를 몰고 작업실을 오가며 은은한 일상을 즐기다 2004년 가까운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세상을 떠났다. 여기까지가 2015년 프란시스 모리스가 기획한 아그네스 마틴의 회고전 도록을 비롯해 여러 책을 통해 알게 된 작가의 삶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1987년 테이트에 큐레이터로 합류한 프란시스 모리스는 2000년에는 디스플레이 책임자, 2006년에는 국제 미술 컬렉션 디렉터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선구적으로 연대순이 아닌 주제별로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2016년부터 7년간 테이트 모던 관장을 역임했다.

1987년 테이트에 큐레이터로 합류한 프란시스 모리스는 2000년에는 디스플레이 책임자, 2006년에는 국제 미술 컬렉션 디렉터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선구적으로 연대순이 아닌 주제별로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2016년부터 7년간 테이트 모던 관장을 역임했다.

‘세상을 등지고’ 작품에 매진한 아그네스 마틴은 현대미술에서 가장 열렬하게 사랑받는 페인터이자 의외로 스타일 아이콘입니다. 머리를 땋아 내리고 누빔으로 된 워크웨어를 입은 채 작업을 준비하는 그 단호하고 초월적인 옆 모습은 SNS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어요. 빛나는 예술가들을 좇다 보면 이런 역설적인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되는데 마틴의 경우 더욱 극적인 것 같아요. 아그네스 마틴이 20세기 미술가 중에서도 특별히 모호한 작가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녀는 자기 작업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매우 신비롭고 추상적이죠. 그래서 매리 랜스의 다큐멘터리가 아그네스 마틴의 회화작품만큼이나 중요한데요, 마틴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일일이 증언해주는 영화이기 때문이에요. (붓을 쥔 채 좌우로 붓질하는 동작을 흉내 내며) 이 영화를 보면 마틴이 붓질을 이렇게 하면서 마치 집을 짓는 사람처럼 작품을 제작하는 마술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아그네스 마틴은 “이미지가 자신에게 온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마틴의 예술 세계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은 그와 같은 이미지의 탄생과 회화를 만드는 노동 사이의 관계성에 있습니다. 작품을 실제로 보면 만드는 과정을 인지하게 하는 물성이 명확하게 확인되는데, 작가는 이에 관해 직접 이야기한 적이 없거든요.
말씀하신 대로 아그네스 마틴의 그림을 보다 보면 자글자글하게 진동하는 선이나 물감이 번진 자국 같은 인간적인 흔적이랄까 허락된 오류 같은 걸 볼 수 있어요. 작가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 밑바탕 작업을 대강 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캔버스 표면에 미세한 돌기 같은 것들이 남게 됐을 거고 그게 영향을 미친 거겠죠. 다른 화가들이 표면을 최대한 고르게 하려고 수고를 들이는 것과 대조적으로 돌기 같은 것을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우 역설적인 부분이죠. 아그네스 마틴은 엄격한 시스템 안에서 작업했고, 특히 1970년대 초 이후부터는 스트라이프나(줄무늬)와 그리드(격자무늬) 형상의 작업만 했어요. 작가는 우표 크기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것을 확장해서 작업으로 만들었는데, 이때 자, 연필, 마스킹테이프 같은 것을 가지고 매우 엄격하지만 동시에 편한 마음, 캐주얼한 태도로 그렸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그 과정에서 우연성의 기회를 충분히 받아들인 것 같아요. 덕분에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발견하는 선의 번짐 같은 것을 통해서 회화가 가진, 마치 액체처럼 흐물거릴 수 있는 유동성(liquidity)과 일종의 수행성(performativity)을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이 지점에서 작가는 추상표현주의와의 연관성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시스템적인 작품 안에서 작가의 제스처라는 것도 동시에 볼 수 있는 독특한 예술세계가 형성된 겁니다.
은둔의 아이콘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예전에는 마틴의 예술세계를 전적으로 독보적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사실 작가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지배적인 흐름이었던 추상표현주의와 그 뒤에 대두된 미니멀리즘 모두에 영향받은 중추적인 인물이더군요. 마틴은 정작 자기를 추상표현주의자로 여겼지만 주된 방법론인 기하학적 구성과 반복은 미니멀리스트와 닮았다고 평가되는데요. 물론 작가가 발견해낸 그리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제스처적인 추상 작업에서 상당한 통제가 관여되는 기하학적인 추상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미니멀리즘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그리드를 도입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여기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보통의 미니멀리스트들과 달리 아그네스 마틴은 산업 생산, 기계로 인한 기술 생성과는 관련 있는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서 칼 안드레는 산업용 벽돌 같은 재료로 그리드를 구성했고 솔 르윗의 경우에도 금속성의 페인트 같은 것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반면에 아그네스 마틴은 미니멀리즘적인 방법론을 손으로 그린 행위가 인식되는 추상표현주의의 제스처와 결합했어요. 그런 점에서 보면 마틴은 결국 두 진영 모두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작가이기도 했던, 매우 독보적인 예술가이죠.
이번 솔올미술관 전시에서도 선보일 1964년 작 <The Tree>는 작가가 자신의 첫 그리드 작품으로 꼽는 그림인데요, 나무의 순수성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골몰하다가 격자무늬를 떠올렸고 그게 순수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해 그린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그 부분에서 관장님이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한 테이트 모던의 «Hilma af Klint & Piet Mondrian: Forms of Life»에서 본 몬드리안의 <The Red Tree>(1908)가 생각났어요. 몬드리안은 그 작품에서 나무를 현실 세계의 나무가 아닌 수직과 수평의 ‘조형적 표현’으로서 압축해 그려냈습니다. 뭔가 재밌는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미있는 우연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뉴욕 미술계에서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주로 활동한 몬드리안의 전시가 대거 열렸습니다. 1940년 미국으로 망명해 4년 뒤 뉴욕에서 사망한 몬드리안은 이미 미국에서 추상미술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어요. 아그네스 마틴은 전시를 열심히 보러 다닌 작가였기 때문에 그 시기에 분명히 몬드리안의 전시를 몇 번쯤 봤을 거로 생각합니다. 1950년대 뉴욕에서 열린 몬드리안의 전시에는 초기 작업은 물론 이 자리에서 언급된 <The Red Tree>와 선구적인 추상회화 작품을 포함하고 있었죠. 전시가 아니더라도 아그네스 마틴은 몬드리안에게서 큰 영향을 받고 기하학적 형태의 추상회화를 실험하게 된 엘스워스 켈리와도 친했기 때문에 분명 몬드리안의 작품을 소개받았을 거예요.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았을 때 아그네스 마틴이 자연 풍경을 다루는 작업에서 더욱 추상적인 작업으로 넘어갈 때 자기보다 앞서 그와 같은 경로를 밟은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사료해볼 수 있습니다.
<With My Back to the World>, 1997, acrylic on canvas, 152.4x152.4cm. (1 of 6 pannels) © Estate of Agnes Marti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Pace Gallery Photo by Fredrik Nilsen

<With My Back to the World>, 1997, acrylic on canvas, 152.4x152.4cm. (1 of 6 pannels) © Estate of Agnes Marti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Pace Gallery Photo by Fredrik Nilsen

흥미로운 얘기네요. 큐레이터라는 직업은 이토록 세세하게 작가들의 삶과 예술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재미가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웃음) 네, 동시대 미술은 끝이 없고 결론이 없다는 점에서 정말 흥미로워요! 항상 우리 앞에 미래가 있고 진화를 거듭하죠. 새로운 작업이 탄생하고 그 작업을 통해서 옛 작업을 비춰보기도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죠. 말하자면 ‘살아 있는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미술은 끝없이 매혹적이고 만약 이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탐구하는 기쁨에도 끝이 없습니다. 언제나 새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니까요. 좀 아까 기자님을 만나기 전에도 이곳 페이스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가나 출신의 페인터 기디언 아파의 작품을 관람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어요. 포스트 모던화된 세계에서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다양성과 폭이 엄청나다고 생각합니다.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 앞에서 마치 바다를 바라보듯이 15분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모든 물감의 덩어리와 선을 빠져들 듯 감상할 수도 있고, 가나에서 온 젊은 작가가 탈식민주의를 바탕으로 미술사를 어떻게 새롭게 스토리텔링 하는지 살펴볼 수도 있어요. 페이스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리움미술관에서 필립 파레노가 어떻게 기술과 인간을 결합하여 메타적인 세계를 창조했는지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세계에 시시각각 반응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들의 작업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선물과도 같은 일입니다.
관장님은 2016년부터 2023년 4월까지 테이트 모던 관장을 지내며 여성 예술가에 대한 인식을 재정의하는 흐름을 주도했어요. 루이즈 부르주아, 쿠사마 야요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야기 나눈 아그네스 마틴 등의 전시를 선보이면서요. 아그네스 마틴을 연구하던 중에 그녀가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에 로어맨해튼의 방치된 해운 창고를 여러 예술가가 나눠 쓰는 작업실 단지 코엔티스 슬립에서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곳에는 잘 알려진 대로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션버그, 엘스워스 켈리 등이 모여 살았는데, 레노어 토니도 있었죠.(이 작가들은 당시 주요 미술 흐름이었던 윗동네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영웅적이고 격정적인 예술세계와는 대척점에 있는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레노어 토니는 수천 개의 리넨 실을 그리드에 달기도 하며 굉장히 혁신적인 작업을 했던 작가로, 마침 첼시에 재단이 있어 방문한 적이 있죠. 저는 그곳에서 그녀가 사적으로도 또 예술적으로도 아그네스 마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됐어요. 레노어 토니 작업의 씨실과 날실의 구조가 아그네스 마틴의 그리드 작업으로 이어졌다는 걸 말이에요. 그런데 이상한 건 마틴은 이미 미술사로 편입되었지만 레노어 토니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여성들은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제도적으로 소외되어 왔는데 남성과 같은 조건에 예술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특정한 과목에서 배제되는 식의 일들이 있었습니다. 왕립예술학교에서는 여성이 누드 드로잉을 배우는 것을 금지했고, 바우하우스에서는 여성들에게 건축·디자인 대신 도자나 직조만 허락했죠. 많은 여성 작가가 헌신한 직조를 포함한 섬유예술은 전통적으로 공예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미술사에서는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테이트에 가면 아그네스 마틴의 회화와 레노어 토니의 직조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저는 그 풍경이 마치 역사가 탄생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 그 광경을 꼭 보고 싶네요! 아그네스 마틴은 클로짓 레즈비언이었고 레노어 토니와도 연인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저는 작가의 개인사를 그의 작품과 연결 짓는 유혹을 거부할 수가 없는데요, 마틴이 도교와 선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작품이 자아내는 정적인 숭고함과 연결되거나 평온하고 고요한 틈 사이 느껴지는 무거운 텐션이 그녀가 클로짓 레즈비언이라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거나 하는 연상을 해봅니다.아그네스 마틴은 작품이 자신의 개인적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언했는데도 불구하고요. 저는 그런 해석을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큐레이터들도 작가의 자서전이나 일대기를 정말 열심히 보거든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작품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모더니즘적인 생각이 스며들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작품 뒤에는 작가가 존재하고 모든 작가는 인간으로서 각자의 경험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작품을 통해서 말할지, 밝힐지 하는 것은 작가의 결정이지만 말이에요. 물론 그런 인과관계를 너무 단순화시키는 오류는 조심해야겠지요. 하지만 저에게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을 그녀가 살면서 일상적으로 경험했을 풍경과 장소와 연관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몇 년 전에 캐나다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틴이 태어나 인생 초반기를 보낸 서스캐처원에 가볼 기회이기 때문에 그 강연을 수락했어요. 아그네스 마틴은 거대한 하늘 아래 전봇대만이 공간을 구획하는 대초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훗날 뉴멕시코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곧 시작하는 봄학기부터 석좌교수로 이화여대 대학원 강단에 서신다고요. 또 다른 계획이 있나요? 5월에 런던에 돌아가자마자 기차를 타고 서머싯으로 가야 해요. 지난해 3월 작고한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필리다 발로의 대규모 전시를 작가 없이 치르는, 무거운 책임감과 큰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이죠. 하우저 앤 워스 서머싯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이고 원래 작가가 살아 계실 때 하기로 되어 있던 터라 작가의 대역처럼 그곳에서 전시를 열어야 한답니다.(웃음)
※ «아크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전은 5월 4일부터 8월 25일까지 솔올미술관에서 열린다.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영감이 요구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텅 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 아그네스 마틴이 전해준 고독과 충만을 사랑한다.

Credit

  • 에디터/ 안동선
  • 사진/ 이현준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