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잉크 디자이너 이혜미에게 사명감이란?

지난 8년간 변함없이, 그리고 타협 없이 잉크만의 색을 고수해온 그녀와 나눈 이야기

프로필 by BAZAAR 2023.10.09
 
 메종 잉크에서 만난 디자이너 이혜미.

메종 잉크에서 만난 디자이너 이혜미.

 
 
2022 F/W 시즌부터 파리에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카를라 브루니의 라이브 퍼포먼스와 함께한 2023 S/S 쇼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당시의 소감은?
파리에서 정식으로 하는 첫 쇼이기도 하고, 그곳에서는 아직 신인 디자이너와 다름없었기에 마케팅적으로 화제가 될 요소가 필요했다. ‘파리에서 인지도가 있는 뮤지션과 협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기 시작했고, 두세 다리 정도 건너 인연이 닿아 카를라 브루니를 섭외하게 된 거다. 사실 에이전시를 통해 몇 명 더 제안을 받았지만 리스트 안에서 그녀의 이름만 눈에 들어오더라. 정말 베팅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24시간 만에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웃음) 지금에서야 하는 얘기지만 그녀와 리허설도 없이 쇼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델들의 워킹과 라이브 공연이 잘 조화가 될지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그 여유로움과 포스… 그 자체로 압도되었으니 말이다.
파리에서 세 시즌 동안 쇼를 진행하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 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려본다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쇼의 피날레에서 카를라 브루니가 나를 안아줬던 것. 뭔가 응원해주는 느낌이 들었고 백스테이지에 들어오니 절로 눈물이 났다. 참고로 내가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다. 힘들었던 순간은 촉박한 준비 기간이나 통관 문제로 지난 시즌 권오상 작가의 작품을 직접 핸드캐리해 가져갔는데, 그 엄청난 무게를 직접 가져간 것도 힘들었지만 3피스 중 1피스의 기계 장치가 고장 나서 못 쓰게 되는 상황이 생겼다. 힘든 순간은 너무도 많다. 특히 런웨이 쇼 직전엔 사건사고가 늘 있는 것 같다.
 
 
 ‘S for Somewhere’를 주제로 한 2021 S/S 컬렉션. 팬데믹 기간에 VR을 활용한 디지털 쇼룸을 운영해 주목을 받았다.

‘S for Somewhere’를 주제로 한 2021 S/S 컬렉션. 팬데믹 기간에 VR을 활용한 디지털 쇼룸을 운영해 주목을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서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서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어떤 사명감을 느끼나? 작년 연말 ‘2022년 대한민국 패션대상’에서 국무총리표창을 받기도 했으니 느끼는 바가 다를 것 같은데.
먼저 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잉크가 디자이너 브랜드로서 꾸준하게 브랜드를 꾸려나가는 것에 대해 응원을 해준 게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워낙 온라인에서 강한 브랜드도 많은데 잉크는 클래식한 운영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그 부분이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해외파가 아닌 데다 한국에서 패션을 공부하고 국내 패션회사에서 일을 배운, 정말 왕성하게 활동하는 국내 디자이너들 중 유일할 것 같은 그런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오는 사명감 같은 게 있다. 해외에 나가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들어오면 ‘이제 브랜드 인지도도 생겼으니 좀 편하게 가도 될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사명감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다. 주변에서도 후배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얘길 많이 해준다.(웃음)
팬데믹 기간에 잉크의 국내 매출이 급성장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내 생각이지만 팬데믹 때 럭셔리 브랜드들이 흥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여행을 못 가는 대신에 가치투자의 개념으로 좀 더 좋은 퀄리티의 옷을 사는 데 투자를 한 게 아닐까. 여기에 플래그십 스토어인 메종 잉크를 오픈하면서 우리 식대로 잘 꾸며진 공간에서 컬렉션을 선보이다 보니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도 한층 더 명확하게 각인된 것 같다. 또 메종 오픈과 함께 파리에서 쇼를 진행했는데 그런 것들이 동시에 이루어져서 어떤 시너지를 불러일으킨 듯하다.
 
 
  
해외에서의 반응도 뜨겁다. 특히 중국 시장에서의 성장이 눈부시다고 들었다. 해외 시장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은?
2021년부터 중국 에이전시와 손을 잡고 중국 내에 잉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운 좋게 브랜드가 빠르게 자리 잡혔고, 중국 바이어들에게 퀄리티 면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신뢰가 쌓였다. 팬데믹 시기에는 온라인으로 옷을 바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잉크는 옷을 제대로 만들어 보내는 브랜드이니 사진만 보고 바잉을 해도 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브랜드에 좀 더 집중을 해줬던 게 아닐까 싶다. 해외 시장에 대한 앞으로의 계획은 일본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을 해볼까 한다. 2023 F/W 컬렉션에 도매 형태로 선보였고 올해 가을부터 몇몇 편집숍에 입점하기로 했다. 프레스들을 초대해 프레젠테이션도 선보일 계획이다. 어떻게 보면 파리에서 지속적으로 피지컬 쇼를 하는 것도 아시아 시장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잉크를 정의함에 있어 ‘레터 프로젝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인가? 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잉크를 시작할 때쯤 국내 시장에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밀려들어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 변화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디자이너로서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다.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고민도 있어서 내가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다면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걸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레터 프로젝트라 이름 붙였던 것도 카테고리에 한정을 두지 않고, 내가 갖고 싶고 소장하고 싶은 어떤 리미티드 에디션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브랜드를 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막 소셜미디어가 시작되던 시기였는데 알파벳마다 아이템을 만들어 스토리를 더하면 SNS상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더 나아가 해당 알파벳의 아이템들을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나중엔 다시 A로 돌아가서 아카이브(Archive) 컬렉션을 만들어보자’라고까지 생각했다. 정말 길게 내다보고 고민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선보인 레터 프로젝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H for Handbag’과 ‘I for iPhone Case’. 잉크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프로젝트다. 특히 아이폰 케이스는 그 특유의 핸들 장식으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사실 옷만 놓고 보면 ‘K for Knit’ 컬렉션이 제일 맘에 든다.
개인적으로 잉크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것을 제일 먼저 시도하는 브랜드라고 생각된다. 최초로 VR 컬렉션을 진행한 것도 그렇고. 잉크만의 강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잉크는 시즌마다 콘셉트가 명확한데, 그러면서도 시즌이 지나도 옷장에서 꺼내 입을 수 있는 시대를 초월하는 디자인을 선보인다는 것이 강점인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디자인의 힘보다는 퀄리티에 대한 욕심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디자인과 퀄리티에 있어 타협이 없다.
 
 
 가장 최근에 파리에서 선보인 2023 F/W 컬렉션.

가장 최근에 파리에서 선보인 2023 F/W 컬렉션.

 
 
그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지키고 있나?
패턴 수정과 같은, 옷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프로세스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한번 바꾸는 데도 꽤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유지하기에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그런데도 퀄리티에 대한 포기가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하는데 마음에 들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계속하는 거다. 잉크는 디자인 팀원들은 물론이고 생산팀, MD팀 모두 그런 부분을 이해하고 응원하며 격려해준다.
현재의 브랜드 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그너처 아이템이 있다면?
재킷. 특히 더블 브레스트 재킷이다. 잉크라는 브랜드가 여성스럽다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사실 남성복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때문에 매 시즌마다 그 시즌의 주요 소재와 무드를 담은 더블 브레스트 재킷은 꼭 선보인다.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가 누구인지, 또는 요즘 주목하는 아티스트가 있나?
최근 프리즈에서 인도네시아의 ROH, 그리고 한국의 휘슬 갤러리가 함께한 부스에서 데이비드 링가르(Davy Linggar)라는 작가의 작품을 마주했다. 자카르타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로 그가 그린 페인팅 작품 하나가 마음에 꼭 들었다. 글래드스톤 갤러리 소속의 설치미술가 아니카 이(Anicka Yi)도 좋아한다.
2024 S/S 컬렉션을 오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어떤 모습인가?
벌써 알파벳 Y에 이르렀다. 테마는 ‘Y for Yesterday’. 이번 컬렉션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어제가 오늘이 된다(Yesterday becomes Today)’다. 과거의 복식, 한국 전통 복식에 대한 재해석도 있을 것이고 수공예에 대한 향수, 또 잉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여성스러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 깨부수는 컬렉션이 될 것이다. 아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실루엣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아, 그리고 이번 파리 쇼에서는 남성복도 선보일 예정이다.
 
 

Credit

  • 에디터/ 이진선
  • 사진/ 김상우(인물),
  • Getty Images, Imaxtree(런웨이), ⓒ Eenk(룩북 이미지)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