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홍이현숙 연대기

지난 35년간 전방위적으로 한국 미술계를 종횡무진한 홍이현숙 작가의 예술 세계

프로필 by BAZAAR 2023.10.09
 
1988년
일갤러리에서 «홍현숙의 은닉된 에너지전»을 열었다. 30세에 여는 첫 개인전이었다.
“여자에겐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40대 중반까지는 집 거실, 베란다, 아파트 공터, 남의 작업실, 공장 등 자그마한 공간이라도 주어지면 작업실로 삼았죠. 1985년에 홍익대 미술대학원 조각과를 졸업하고 그해 결혼했어요. 2년 뒤 첫아이를 낳고 이듬해 봄 둘째를 임신했는데 몸 안에 뭔가 꽉 들어차 숨을 쉬기도 힘든 느낌이었어요. 당장 뱉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죠. 급한 대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화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어요. 그때 대학로 일갤러리라는 곳에서 최정화 씨를 만났죠. 지금은 누구나 아는 미술가가 되었는데 그때는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날 그가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전시를 하자고 했어요. 임신한 상태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웃음) 그때 버드나무로 작업을 했거든요. 당시 북한산 인수봉이 마주 보이는 덕성여자대학교 뒷산 중턱에 살고 있었는데 집으로 가는 대로변에 버드나무가 줄지어 선 것이 참 멋스러웠어요. 그런데 88서울올림픽 준비를 한다고 가로수를 죄다 베어버린 거예요.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루아침에 잘려서 길거리에 나둥그러져 있는데 어찌나 아깝고 속상하든지! 다음 날 다시 길에 나갔는데 나무가 없어졌더라고요. 물어물어 인천의 한 이쑤시개 공장에서 싣고 갔다는 걸 알아내 한달음에 갔어요. 자초지종을 들은 젊은 사장님이 회사 로고를 디자인해주면 나무 한 트럭을 주겠다고 하셔서 오후 내내 공장 사무실에 앉아서 ‘Pine Tree’라는 회사 로고를 그렸죠.(웃음)
첫 번째 개인전을 치르고 연년생인 우리 애들이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전시를 못했어요. 애들 기저귀를 빨면서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애들은 또 예쁘잖아요. 한동안 애들 데리고 열심히 전시 보러 다니고 미술지에 전시 리뷰도 쓰고 그러고 살았어요.”
 
1995년
대학로에 있는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 «은닉된 에너지전»을 열면서 버려진 옷으로 설치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환갑을 일주일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멋쟁이였어요. 평생 옷장수로 살았고 당신 자신도 아름답게 옷 입는 것을 좋아하셨죠. 집안에 예술적인 DNA가 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아마도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겠죠. 마인드는 보수에 마초였는데 스타일만큼은 한겨울에 분홍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매치할 만큼 세련된 맵시를 구가했으니까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지하창고에 아버지가 남긴 옷이 한 트럭이었어요. 마땅히 처리할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 때 아버지가 그 옷을 어떻게 해주면 가장 기뻐할지 생각해봤어요. 두 번째 전시에서 그 옷들로 조촐한 의식을 치르기로 했어요. 전시장 1층 북쪽 편으로 아버지가 남긴 옷들을 가지런히 쌓아 올려 만장을 만들고 작은 관들 안에 흰옷을 넣어 바닥에 길을 만들었죠. 그 길 끝에 아버지가 서있다고 생각하면서. 옷은 인간의 땀과 숨을 간직한 것이잖아요. 옷에 귀를 갖다 대면 속삭임이 들려올 것만 같죠.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위로해줘요. 근사하게 차려입은 사람의 옷차림은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에요. 저는 누군가가 입다가 버린 옷으로 작업했어요. 내 작품이 쓰레기가 되어 지구를 더럽히게 하고 싶지 않았죠. 루이즈 부르주아의 패브릭 작업을 좋아해요. 무엇보다 그분이 그렇게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것밖에 할 줄 몰라서죠, 뭐.”  


원서갤러리 개인전의 작품 일부.

원서갤러리 개인전의 작품 일부.

1997~1999년  
옷을 주요 소재로 한 개인전과 공공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옷과 흙을 켜켜이 쌓고 그 위에 불린 보리 씨앗을 뿌려 갤러리에서 농사를 지었던 원서갤러리 개인전, 국립극장 돌계단 밑에 옷을 접어 넣은 야외 설치작품 <은닉된 에너지-옷들의 켜>, 광화문 지하철역 지하도의 기둥 일부를 옷으로 둘러싼 <물렁한 기둥-공간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야생의 다리>, 2000.

<야생의 다리>, 2000.

2000년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공모에 당선되어 인사동과 안국동을 잇는 육교를 표범 무늬 인조모피로 감싼 작업 <야생의 다리>를 선보였다. 동물에 관한 관심은 일찍이 시작되었는데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치타를 보러 다니며 촬영해두기도 했다.
 
2002년
DMZ를 소재로 한 전시에 참여해 통일전망대를 화려한 유머의 장소로 꾸미는 설치 프로젝트 <꼬리를 흔들다>를 선보였다. 북에서도 볼 수 있기를 꿈꾸며 크라운제과에서 협찬받은 ‘죠리퐁’ 과자 봉지를 가지고 전망대를 긴 꼬리를 가진 호랑이 몸통으로 탈바꿈시켰다.
 
2004년
미술인회에서 곽은숙 작가가 “나는 가상의 딸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 데서 촉발한 전시 «가상의 딸» 전을 기획하고 참여했다. 이 전시는 2006년까지 세 차례 열렸다.
 
<날개>, 2005.

<날개>, 2005.

2005년
대안공간 풀에서 개인전 «풀과 털»을 열었다. 7년 만에 ‘화이트 큐브’에서 선보인 전시였고, 이를 계기로 영상작업을 시작했다. 황금빛 날개를 통해 ‘여성에게만 강요된 매너’를 풍자한 <날개>, 여성성을 상징하는 머리털을 밀고 물을 주어 자라게 하는 <물주기>, 당시 유행하던 이소라의 비디오테이프를 따라 하는 <달밤의 체조> 등을 선보였다.    
 
2006년
관훈갤러리에서 자신이 사는 집의 심리적 공간을 전시장으로 옮겨오기 위해 갤러리 바닥에 장판을 깔고 개인전 «비니루방»을 열었다. 냉장고 원피스를 입고 방바닥을 몸 전체로 쓸며 뒹구는 모습을 담은 영상작품 <구르기>를 발표했다.
“모래내시장이라고 아세요? 그쪽에 친한 친구가 살았거든요. 거기 시장 좌판에서 5천원 주고 산 거예요. 그때 ‘냉장고 원피스’가 유행했어요. 더운 여름에 간신히 선풍기를 켤 수 있는 도시 변두리의 아줌마들을 표상하는 의상이라고 할까요? 당시 제 형편이 딱 그랬어요. 그래서 2005~2006년부터 거의 10년 넘게 그 원피스를 입고 구르기도 하고 재개발 지역을 헤매기도 하고 심지어 몽골 노마딕 레지던시에도 입고 갔죠. 몽골에 갔더니 아줌마들이 죄다 저 원피스를 입고 있던데요?(웃음) 그런데 이제는 이 원피스를 입기에는 괴리감이 있어요.” 


<비닐 장판 바닥에서의 항해>, 2008.

<비닐 장판 바닥에서의 항해>, 2008.

2008년
스페이스 빔에서의 3인전에서 노란색 싸구려 비닐 장판으로 천장과 벽, 바닥을 전부 깐 설치작품 <비닐 장판 바닥에서의 항해>를 선보였다.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에서는 길거리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쓰레기 봉지에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담아서 숲을 만든 <바람의 주문>으로 참여했다.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여성주의 전시 «언니가 돌아왔다»에서는 데크에 색색의 옷을 끼워 넣은 <틈의 속>을 설치했다.
 
2009년
교하아트센터에서 <난곡의 추억>을 선보였다. 불량 주거단지를 정비한다는 정부의 계획에 따라 사라진 난곡(서울 신림 3, 7, 11~13동) 재개발지구의 어떤 집 평면도를 원래 크기 그대로 전시장에 재현한 작품이었다.
“전시장에 난곡에 있는 집과 똑같은 크기의 공간을 선으로 재현해 놓아 그 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을지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 작업이었어요. 같은 해 서울 북가좌동 재개발지구에 있는 빈집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영상작품 <북가좌동 엘레지>도 만들었죠.”


<폐경의례2>, 2012.

<폐경의례2>, 2012.

2012년
폐경을 소재로 복합문화공간 에무에서 개인전 «폐경의례»를 열고,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정확히 2011년 1월부터 생리가 멈췄어요. 처음엔 이게 웬 떡이냐며 좋아했는데 얼마 안 있어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은 이상한 느낌에 시달렸어요. 장기 하나하나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뜨거워지기도 하고 결리기도 하고 목소리까지 달라진 듯했죠. 자연스럽게 ‘폐경을 위한 파티를 해야겠다’라고 마음먹었어요. 폐경에 관한 여러 문구를 쓴 현수막을 만들어 구마다 있는 광고 현수막 게시대에 설치했는데, 그 과정에서 느낀 바가 많았죠. ‘폐경’이란 글자를 빨간색으로 쓰면 안 된다, 글자 수가 적으면 구호처럼 보여 오해를 살 수 있으니 글자 수를 늘려라, 작가 전화번호를 써넣으면 안 된다 등등 생각하지도 못한 조건들이 있었어요. 서대문구청, 마포구청과 타협한 문구들은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폐경을 맞이했습니다. 어떡해야 좋을까요?”, “50금, 폐경파티합니다. 놀러들 오세요” 등이에요. 폐경하고 나니 내 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 몸을 사진으로 남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오랜 친구들과 찜질방에 가게 됐고, 그때 친구들과 함께 찍으면 어떨까 싶어서 제안했는데, 한사코 싫다고 거부하던 친구들이 한 달 새 마음을 바꿔 촬영에 응해줘서 <장수탕탕탕>을 만들게 됐죠. 내부순환로에 매달려 있는 철제사다리에도 올라가 보고 남의 집 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축지법도 공부했어요. 폐경이 해방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2016~2019년  
요가 동작 가운데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사자자세를 연습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작품 <사자자세>를 선보이기도 하고, 혹등고래의 소리를 받아쓰고 언어를 배우기 위해 연습하는 모습을 담은 <고래 자세>로 울산 태화강변 국제설치미술제에 참여했다.
 
«휭, 추-푸» 전시 전경.

«휭, 추-푸» 전시 전경.

2021년 초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 «휭, 추-푸»를 열었다. 이 전시에서는 지난 30여 년간의 작업을 여러 주제로 분류하여 소개했으며 인간의 언어로 온전히 들을 수 없는 고래 8종의 목소리를 녹음한 데이터를 변형해 전시장에 재생하는 <여덟 마리 등대>, 재개발 예정지에서 길고양이들과 비언어적 소통을 나누는 <석광사 근방> 등의 신작을 선보였다.
“‘휭’은 고래가 바람을 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소리고, ‘추푸’는 남미 토착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물의 저항을 받으면서 수면 아래로 휙 들어갈 때 나는 소리예요. 아무래도 ‘풍덩’보다는 ‘추푸’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나요?  «휭, 추-푸»를 준비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의 앞바다인 태평양 몬터레이만에 있는 아쿠아리움 연구소에서 녹음한 고래 8종의 목소리를 얻을 수 있었어요. 고주파와 저주파 음역대를 오가는 고래의 소리를 전문적으로 분석한 연구자들이 분별해낸 소리죠. 고래들은 소리를 통해 동족 간에 소통하고 외부 세계를 인지한다고 해요. 그런데 최근 선박과 비행기 등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이 소통이 방해를 받고 심지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늙은 고래들이 더 빨리 죽는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 소리를 약간 변형해서 전시장에 재생했어요. 관객들이 지구상의 또 다른 생명체인 고래를 느끼며 심해를 떠다니기를 바랐어요. 제가 이렇게 비인간 생명체와의 합체를 수행하고 매개하는 이유가 뭐냐고요?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권력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남성보다 여성이 좀 더 주변부에 있을 것이고 그보다 바깥쪽에 동물, 그리고 더 바깥쪽에 식물이 있을 거예요. 우리가 주변부, 즉 바깥쪽에 자리한, 차별당하는 존재들을 더 예민하게 인지하는 것은 지구상의 다종다양한 생명체를 환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하기 때문이에요.”
 
2021년 말
부천아트벙커B39에서 감각확장체험전시 «오소리 A씨의 초대»를 열었다. 안전 장비를 갖춘 관객들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며 5개의 길과 방으로 이뤄진 공간을 투어하고 마지막에 전시장에서 경험했던 감각을 되살려 묘사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2020.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2020.

2023년
광주비엔날레의 무각사 전시장에서 두 점의 영상작품을 선보였다. 북한산 승가사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손 대신 카메라로 훑고 어루만지면서 상상의 촉감과 감상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2020년)과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작품으로 월출산 시루봉에 오르면서 만나는 시루봉의 촉각 지도를 영상으로 그린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월출산 시루봉>(2023년)이 그것이다.
“항상 승가사 마애불을 만져보고 싶었어요. 너무 높기도 하고 문화재이자 종교적 상징성이 담긴 조각이니까 쉽게 만질 수 없었거든요.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은 볼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 시각예술에서 시각을 배제하면 다른 감각은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그 다음 해에는 시각을 배제하고 신체 다른 감각의 민감성을 높이는 경험을 해보자는 의도로 «오소리 A씨의 초대»를 기획했어요. 그때 이 마애불을 만들고 싶었는데 어려워서 대신 경주 남산에 있는 칠불암 마애석불을 제작했어요. «오소리 A씨의 초대» 마지막에 거대한 조각을 손으로 만져보고 무엇인지 알아맞추는 순서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마애석불이죠. 네다섯 명과 함께 팀을 이뤄 어둠 속을 줄지어 이동시킨 이유를 물으셨는데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지만 연대감을 느끼길 바랐어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토끼’ ‘앵무새’ ‘사자’ 등으로 짓고 서로를 호명할 수 있게 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는 동물의 우월함을 느껴보자는 취지를 담은 것이에요. 왜 여성 아티스트만이 이런 작품을 하는지 의문이 있다고 하셨는데 저는 여성이 가정, 사회, 지구에서 자연과 같이 수동적·억압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연대하여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것들에 새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에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알아채고 공감할 수 있는 감각, 돌봄을 행할 수 있는 행동력을 가진 여성으로서 우리 자신을 말이에요.” 


컨트리뷰팅 에디터 안동선은 파란색 꽃무늬 ‘냉장고 원피스’를 입은 채 고래나 길고양이를 따라 하는 홍이현숙 작가의 천진하고도 근사한 행태를 보며 후후후 웃다가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동물권에 관한 진지한 관심을 되새겼다.  


Credit

  • 글/ 안동선
  • 사진/ 이재안,ⓒ 홍이현숙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