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최고은이 선보이는 요새

동 파이프로 만든 신작 조각 '메르디앙'을 완성하기까지의 이야기.

프로필 by 안서경 2026.05.08

최고은 : 꿰뚫는 선


최고은은 에어컨이나 수도 설비에 쓰이는 동 파이프 같은 산업화된 기성 소재를 휘고, 절단하고, 조합하며 작업을 이어왔다. 실내 전시장을 넘어선 조각들은 장소 안에서 견고한 맥락을 만들며 조각이 놓인 자리와 외부 환경의 경계를 오간다. 신작 <메르디앙(Meridian)>은 한국관 안팎을 넘나들며 해방공간의 영역을 확장한다.


작업실에 놓인 <메르디앙> 앞에서, 작가 최고은.

작업실에 놓인 <메르디앙> 앞에서, 작가 최고은.

2년여 만에 조각가 최고은의 작업실로 향했다. 2024년, 그가 프리즈 서울 어워드 아티스트로 전시를 준비할 무렵 이곳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양의 파이프가 겹쳐 있었다. 올해는 다른 풍경이다. 작업실 한가운데 곡선 진 목재 가벽이 놓여 있고, 벽 사이로 단단한 선 형태의 금속 조각들이 바깥에서 안으로 찔러 넣은 듯 내외부를 관통한다. 이 모형은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자르디니 공원에 자리한 한국관의 실린더 공간을 재현한 것이다. 작품을 베니스에 보내기 전 현지 스케일에 맞춰 제작했다. 작가는 이제 막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에서 선보일 신작 <메르디앙>의 설치를 위한 테스트를 마쳤다.

“‘메르디앙’은 지리학적으로는 북극과 남극을 잇는 ‘자오선’을, 동양 의학에서는 인체 내에서 기가 흐르는 통로로 여겨지는 ‘경락’을 뜻해요. 몸과 공간의 이면을 가로지르며,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인간이 만들어낸 선이죠. 한국관을 하나의 신체로 상상해 보았을 때, 실린더 공간은 이 선을 잇는 통로이자 경계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동안 기성품을 작업의 재료로 삼아온 최고은의 작업은 도시나 환경의 비가시적인 인프라와 맥락에 영향 받아왔다. 작업을 구상할 때, 한국관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실린더 공간이라는 물리적인 요소에 이끌렸던 건 작가로서 필연적인 수순이었을 것이다.

“처음 한국관을 ‘해방공간의 기념비’로 만든다는 최빛나 감독의 기획을 접한 뒤, 저희 팀은 공간 답사와 아카이브 스터디를 통해 한국관에 대해 함께 공부했어요. 답사를 하다가 실린더 공간 중앙에서 기둥을 발견했는데, 그 기둥을 열어보니 전선과 난방 시스템 같은 것들이 있었죠. 한국관 전체로 확산되는 주요한 인프라가 지나가는 통로였던 거예요. 그 과정에서 창고로 쓰이던 실린더 2층 공간을 비워내고 벽을 제거해 초기 개관할 당시의 한국관 모습처럼, 실린더 공간을 개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공간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는 과정이 중요했어요. 저는 조각적인 방식으로 이 공간을 원복하고 싶었습니다.”


작업실에서 설치 테스트 중인 <메르디앙>.

작업실에서 설치 테스트 중인 <메르디앙>.

5월 첫 주 비엔날레가 공식 개막하면, 방향을 알 수 없이 뻗어 있는 파이프 조각은 실린더 공간은 물론 옥상, 한국관과 맞닿아 있는 일본관 사이 수풀까지 곳곳에 배치될 예정이다. 작품의 외형만 보면, ‘요새’처럼 한국관을 두고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는 모양새다. “<메르디앙>으로 작업의 개념을 확장하기 전, 이 작업의 가제는 <니들스(Needles)>였어요. ‘바늘’ ‘침’이라는 의미도 있었지만, 어원을 좇다 보니 ‘needle’과 ‘nest’가 같은 계열에서 비롯되었단 걸 알았어요. 둥지는 사실상 가는 선들을 엮어 묶는 행위로 완성되죠. 침은 단지 무언가를 찌르고 관통한다는 공격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봉합하고 치유할 때도 쓰이잖아요. 둘 다 선으로 이루어지고, 무언가를 꿰어낸다는 점이 맞닿아 있죠. 실제로 아이데이션 과정에서 제비가 집 짓는 영상을 자주 찾아보기도 했어요. 몇 달 동안 나뭇가지를 물고 쌓고 엮으며 밀어내는 과정을요.(웃음) 노혜리 작가의 소프트한 조각이 한국관 내부에 부드러운 공간과 막을 형성한다면, 제 금속 작업은 외부에서 베니스의 자연 환경과 여러 국가관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다이내믹을 맞닥뜨려요. 전자를 통해 막 안에서 밖으로 사람들이 이동한다면, 제 작업을 통해 선들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움직이죠. 선의 방향 역시 보는 이들에게 다른 감각을 부여하고요.”


Goen Choi, <Airlock>, 2024, Stainless steel pipe, steel tie, paint on wood, ø50.8x1200cm, ø750x250cmx6. Commissioned by the 7th Changwon Sculpture Biennale 2024.

Goen Choi, <Airlock>, 2024, Stainless steel pipe, steel tie, paint on wood, ø50.8x1200cm, ø750x250cmx6. Commissioned by the 7th Changwon Sculpture Biennale 2024.

상이한 감각과 시선이 하나의 장소에 같은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점은, 이번 전시 주제인 ‘해방공간’과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 다양한 이념과 공존하는 시간대를 아우르는 이 주제를 최고은은 공동체 속 개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전시를 계기로 ‘해방’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되었지만, 막 마흔이 된 지금에서야 해방과 역사 의식이 작가이자 개인으로서 꼭 필요한 질문이라는 점을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어요. 저는 ‘해방’을 역사와 국가의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관점에서 고민해 왔어요. 큰 서사보다 개별의 움직임과 관계를 만들어 가려는 전시의 방향 속에서, 제게 가장 친밀한 언어인 구체적인 물질과 공간에 집중해 이 주제를 풀어가고자 했죠. 제가 사용하는 기성품은 사회 안에서 사용되어온 물건이지만, 그 안에는 개인의 삶과 공적인 역사가 동시에 축적되어 있어요. 공공성과 개인을 둘러싼 구조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면 그것이 해방에 가까운 상태가 아닐까 싶어요. 저는 이번 전시가 다른 작가들의 작업, 펠로들, 관객들 간의 관계와 얽히며, 계속해서 움직이는 토대 위에서 그 균형을 다시 조정해가는 시도 같아요. 어쩌면 진정한 해방이란 그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일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해요. 베니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계속해서 해방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요.”

자신의 방식대로 해방의 개념을 고심하며, 동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낯설게 바라보는 경험도 했다. “동 파이프를 반으로 가르면, 탄성이 생겨서 활처럼 유연해져요. 본래 파이프라는 소재는 가장 튼튼하고 모듈화 가능한 소재지만, 이걸 가르는 순간 텅 빈 내부가 드러나고 약해지는 점이 흥미롭죠. 앞서 말한 대로 <메르디앙>은 인간이 만든 선인 만큼, 선의 형상을 유연하게 풀어나갈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국가나 단체 안에서 개인의 해방을 떠올려봤을 때, 물리적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주는 지점이 필요했죠. 지금껏 야외에 설치했던 제 조각들은 먼 산이나 공장지대 같은, 움직이고 있지만 멀리서 보면 풍경 같은 요소와 어우러져 왔어요.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이번 전시 전체의 움직임 속에, 제 작업이 어떻게 묻어날지 궁금해요.”


Goeun Choi, <Gloria>, 2024, Copper water pipe, wood, 8000x3500x4500cm. Commissioned and Produced for Frieze Artist Award 2024.

Goeun Choi, <Gloria>, 2024, Copper water pipe, wood, 8000x3500x4500cm. Commissioned and Produced for Frieze Artist Award 2024.

노혜리의 작업과 펠로십 프로그램이 실제적으로 관객을 대면하는 작업이라면, 최고은의 작업은 작가의 말에 빗대면 ‘조금씩 꼬리를 발견하듯 상상을 요하는’ 작업이다. “주로 모여 있는 곳은 실린더지만, 파이프가 이면에 계속 숨어 있거나 돌아다니고 있다는 감각을 지닌 채, 전체 파이프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길 바라요. 최빛나 감독님께서 한국관이 사람들이 가장 오래 머무는 국가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 있어요. 마치 쉼터처럼요. 옥상과 야외, 내부와 일본관과 접경한 경계, 나아가 다른 국가들과의 국경까지 <메르디앙>이 멀리 가게 된다는 상상이 가능하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최빛나 감독, 노혜리 작가와 함께 한국관의 역사와 지금 시대 다양한 해방의 면면을 좇아가는 과정이 작가 최고은에게는 무엇을 남겼을까.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이번 작업은 예술가로서 공적인 역할과 제 내밀한 경험, 두 과정에 모두 충실했던 작업이었어요. 기성품을 자르고, 배치하고, 다시 보며 저는 제 작업을 주로 우리가 존재하는 도시나 환경이라는 맥락 안에서 사유해 왔어요. 반면 누군가는 집 안이나 지하에 자리하던 기성품이 조각을 통해 외부에 놓임으로써 제 작품을 보면 필연적으로 정치성을 떠올리기도 하죠. 해방공간이 그러하듯, 모든 해석에 열린 채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에 임하는 저의 전략이에요.”


안서경은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동양의 전통 침술처럼, <메르디앙>이 한국관에 꽂혀 있을 때 어떤 또 다른 기류가 공간에 퍼질지 기대하고 있다.

Credit

  • 사진/ 박규태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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