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편지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 고국의 자연과 가족과 친구를 떠올리며 종일 찍어 내려간 점이 사각의 테두리로 에워싸인 채 화면 전체로 번져나간다.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김환기의 점은 그리움이라고. 그래서 더 궁금했다. 국제적 성취를 위해 '선택한 듯 보였던' 도미 이후 그의 뉴욕 시대가 얼마나 우수에 젖어 있었는지. 그가 남긴 에세이와 일기를 뒤져봐도 화면에서 감지한 그 멜랑콜리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애가 탔다. 말하자면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를 폴 고갱의 말년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비유하는 의견에는 도통 수긍이 어려운 쪽이었달까.
그런데 이번 회고전에서 그가 딸과 사위 윤형근에게 보낸 담담한 안부 편지를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형근과 영숙에게. 오늘이 11월 초 하루. (중략) 어제 저녁은 김으로 밥을 먹었지. 그 속에 든 편지 잘 읽었다. 열심히 제작한다니 축하한다. 나도 여전히 일하고 있다. 내년 봄으로 약속된 개인전이 당겨져서 이번에 문을 열었다. 지금 미국은 험악하다. 정치 경제 사회 질서가 엉망이다. 이런 판국에 미술이란 외로운 딴 세상의 것일 뿐이다. 이번에는 작품에 이름을 붙였다. 침묵의 소리, 하늘과 땅. Air and SOUND 등등. 크기로는 열 자 정도에 여덟 자 정도. 모두 여덟 점. 휘갈긴 듯 삐뚤빼뚤한 육필 서간문 위로 활자화된 인쇄물에서 느껴본 적 없던 한 인간의 고독이 비쳤다. 한 명의 예술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카이빙이란 얼마나 유의미한가. 대단한 심미안을 가진 그가 그토록 아꼈다던 달항아리들이 어떤 선반에 어떻게 놓여있었고 그 정경이 1956년작 〈항아리〉와 얼마나 닮았는지. 1937년 4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젊은 예술가가 얼마나 야심 찬 안광을 가지고 있었는지. 지금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환기의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은 작가의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을 통해 작품 감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과 나눈 이야기.
〈달과 나무〉, 1948, 캔버스에 유채, 73x61cm, 개인 소장.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고미술 중심이던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현대미술 전시다. 1년 반 동안의 레노베이 션을 끝내고 여는 첫 전시를 김환기의 회고전으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번 호암미술관 재개관 전시는 미술관 시설 뿐 아니라 호암 전시의 레노베이션을 알리는 전시이기도 하다. 첫 전시는 호암미술관의 성격, 장소성, 시대성을 견지하면서 미래의 전시 방향을 시사해야 했고, 보다 중요한 것은 호암미술관이 전시를 위해 의미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호암미술관은 자연, 전통, 예술이 공존하는 장소로, 이는 김환기의 예술과 서로 조응한다. 또한 한국 전통과 국제 미술 동향을 포괄하는 김환기의 예술은 그 자체로 향후 고미술과 국내외 현대미술을 아우른다.
“그러나 김환기를 수식하는 최근의 단편적인 수사들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다시 한 번 총제적으로 살펴보는 전시가 필요함을 일깨운다”고 회고전의 의의를 밝히기도 했다.
‘수사’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안타깝게 느끼는 부분이다. 김환기의 점화가 경매에서 이중섭, 박수근을 넘어서면서부터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경매 최고가’, ‘132억의 작가’, ‘가장 비싼 한국 작가’…. 어떻게 보면 그 덕분에 이중섭과 박수근에 대해서는 미디어도 일반인도 ‘경매가’ 강박에서 벗어났다. 모두 틀림이 없는 사실이고,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형성된 가격이지만 김환기의 이름이 자극적인 시장 이슈로 반복 소비되고 빠르게 확산되는 반면 그의 예술 본연의 모습은 채워지지 않은, 어떤 간극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회고전이 조금이나마 그 틈을 채우는 일에 기여하기를 기대했다.
최초로 공개되는 1950년대 스케치북과 1970년대 점화 그리고 작가의 유족이 수십 년간 간직해온 유품과 자료의 일부가 일반에 다수 공개된다. 소장가들과 유족의 협조를 통해서 가능한 성과다. 어떤 설득 과정이 있었나?
대여로 출품작을 구성해야 하는 전시에서 대여는 가장 길고 높은 관문이다. 기대와 우려, 기쁨과 실망 속에 거쳐야 하는. 김환기는 기관 소장보다 개인 소장 작품이 훨씬 많아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놀랍고 다행스럽게도 이번 회고전의 취지에 공감해주시고 기꺼이 대여해주신 소장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유명한 작품이든 그렇지 않은 작품이든 전시에는 모두 소중해서, 혹여 소장가들이 대여를 망설이실까봐 해당 작품의 의미와 전시에서의 필요성을 작품별로 각각 적어서 전달드리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해도 대여하지 못한 작품들이 있다. 대여도 인연이다. 유족은 오히려 방대한 자료를 먼저 보여주시고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이 자료들이 전시를 계기로 올바로 사용되고 알려지고 나아가 연구되기를 바라셨다. 어떤 식으로든 이 자료들이 김환기에 대한 흥미롭고 새로운 연구를 이끌어냈으면 한다. 그간 김환기에 대해 연구자들이 살펴볼만 한 자료와 기록이 거의 없었다.
큐레이터 입장에서 분명한 목표 의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료는 예술가의 흔적이고 분신이다. 유족 댁에서 60년, 70년, 80년 전 작가의 손에 쥐어 있었을 물건들을 볼 때마다 순간순간 현실감을 잃었다. 쉴 새 없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읽고 또 읽고 했던 작가의 글, 일기와는 다른 감흥이었다. 글은 상상과 유추가 발동했지만, 자료와 물건들은 매우 즉각적이었다. 그 자체로 작가의 존재로 다가왔다. 김환기에 대한 이해가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한 이름 석 자와 자극적인 경매 정보에 국한된 이들에게 이 경험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들도 분명 작가의 존재를 가까이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한 점 하늘»이라는 전시 제목은 어디서 왔나?
40년에 걸친 그의 추상 여정이 말년에 이르면서 점이라는 작은 요소로 집약되었고 그 점에는 예술과 삶에 대한 작가의 큰 사유가 담겨있다는 의미이다. 점은 추상의 한 요소이기 이전에 기법의 하나이기 때문에 점화 이전은 물론 1950년대 초반의 작품에서도 씨앗처럼 발견된다. 그것이 1950년대 후반부터 추상 요소로 의미를 띠기 시작하고 뉴욕 시기에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발아하여 독창적 예술세계로 꽃을 피웠다. 형식의 요소였던 점들이 작가가 50대를 지나면서 자연과 인간, 예술을 아우르는 보편적 사유가 투영된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말년에 동양사상에 심취한 작가에게 그것은 ‘하늘’로 함축된다. 달을 바라보며 항아리를 그리고 별을 바라보며 고국과 친구를 그리워하던 김환기에게 하늘은 예술의 원천이었고 자연과 삶, 세상을 함축하는 개념이었다.
창작 동기를 뒷받침하는 작가의 아카이브가 풍부하게 소개된 것과 물 흐르듯 유려한 구성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그동안의 회고전과 어떤 차별점을 두고자 했나?
김환기의 글과 일기는 매우 솔직하다. 현학적이지 않고 삶과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예술가로서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수필과 일기는 이미 환기미술관을 통해 책으로 나와 있고, 환기미술관과 화랑의 크고 작은 개인전 때마다 그의 글이 발췌되어 사용되어 왔다. 대부분은 예술에 대한 명제 또는 예술적 깨달음 등 어떤 ‘대가’스러운 말들이었다. 나는 이번 회고전에서 작가의 존재가 느껴지기 바랐기 때문에, 대가풍의 발언만이 아니라 한 예술가로서의 열망과 자신감, 갈등과 좌절, 작업에 대한 태도, 삶의 단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기왕에 솔직하게 쓴 작가의 글을 임의로 정제하기보다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너무 재밌다. 활자로만 읽을 때보다 그림과 함께일 때 그 의미도 재미도 배가된다. 작품과 글의 상호작용을 경험해본 나로서는 내가 좋으면 남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착각이긴 하지만 어떻든 관람객이 나와 마찬가지로 전시장에서 김환기의 글과 그림을 같이 감상하는 것이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심지어 전시기획자의 설명이 없어도 작품 사이사이에서 작가의 얘기를 들으며 작가와 함께 전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고 싶었다. 작가와 관람객의 무대를 만들어놓고 나는 뒤로 들어가 있는 느낌으로. 회고전의 흔한 방식인 작품의 시대 구분도 최소화했다. 분석하고 나누기보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작품의 변화 과정과 그 안의 일관성을 감지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아니어도 무방했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을 시기적으로 잘라서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환기가 사랑했던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그의 작품에도 달을 닮은 달항아리, 달항아리를 닮은 달이 종종 등장한다. 말하자면 김환기에게 달항아리란 자연 그 자체였다. 〈백자대호(김환기 구장)〉, 조선 17세기말~18세기 초, 높이 45cm, 개인 소장.
전시 1부 ‘달/항아리’ 전시장은 김환기의 한국적 추상의 서막이라 할 수 있는 〈달과 나무〉로 시작하는데 가벽을 김환기의 그것과 닮은 짙은 블루로 칠하고 어두운 조명을 비추어 작품처럼 푸르고 어둡게 조성했다. 한편 2부 ‘거대한 작은 점’의 전시장은 가벽을 직각이 아닌 곡선으로 연출했다. 어떤 의도였나?
〈달과 나무〉는 1948년 신사실파 창립 전에 출품된 작품이다. 푸른 달밤의 정경의 심상을 그린 작품인데, 이미 이때 작가는 달항아리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푸른 달밤, 흰 달항아리의 중첩이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전반의 작업을 지배한다. 달과 항아리는 원이라는 구성 요소로 반복 사용되었다.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을 추출해서, 푸른 어둠, 두 개의 원이 만나는 공간으로 전시의 첫 공간을 디자인했다. 아래층의 2부 전시장은 딱딱한 사각형이 아닌 구비구비 곡선 벽으로 부드러운 공간을 만들었다. 그가 점으로 안착한 이후 점화의 발전은 유려하고 때론 역동적인 곡선의 사용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점화를 그 이름 때문에 미시적으로 점만 보기보다 부드러운 곡선과 다채로운 색면을 관객이 느꼈으면 했다. 실제로 점화가 아름다운 건 그 점들이 기계적으로 찍힌 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환기는 ‘고전’이 되었지만 여전히 오늘날 젊은이에게 소구하고 동시대에 공명한다. 그 마력은 어디에 있을까?
남녀노소 막론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내재된 동양적, 한국적 특징에 이끌리는 것 같다. 특히 젊은 층은 그의 1950년대 그림을 오히려 새로워한다. 국적을 초월해서 작가의 숨결과 손길이 하나하나 배어든 점들 사이에서 분명한 오라와 숭고함을 느끼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시대를 초월해 보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주기 때문일 텐데 그런 점에서 김환기는 정말 행복하게 성공한 예술가일 것이다. “예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할 것 같다”며 ‘시정신’을 평생의 예술 신조로 삼았던 화가이니 말이다.
〈무제〉, 1970, 종이에 색연필, 30x21.5cm, 개인 소장.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무제〉, 1970, 캔버스에 유채, 180x98cm, 개인 소장.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 ≪한 점 하늘_김환기≫는 5월 18일부터 9월 10일까지 호암미술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