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연못을 하나 품었다 생각하자. 그 연못 속에는 신화가 혹은 색채가 그 무엇이든 자리할 수 있다. 도나 후앙카는 자유의 연못 속으로 관람객을 인도한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볼리비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도나 후앙카(Donna Huanca)는 고대 문화에서 비롯된 탄생과 소멸, 재생산의 순환을 총체적인 예술로 구현한다. 그의 첫 서울 전시 «블리스 풀(Bliss Pool)» 입구로 다가가는 길에는 희미한 향이 풍겼다. 전진할수록 몸속으로 흘러들어가 머리 위쪽 언저리 어딘가에 딱 붙는다. 도나 후앙카는 마치 콜라주처럼 향을 만들어 기억의 표식으로 활용한다. 팔로산토 나무와 머리카락을 태운 잔향이 공기처럼 퍼진 가운데 무대가 드러난다. 연못 같은 한 뼘 높이의 타원형 구조물에는 뇌 CT를 닮은 메탈 조각이 서있다. 구석구석 관능적인 피어싱이 걸려있고 곧 몸에 색색의 그림을 새긴 여성들이 등장해 그 사이사이를 천천히 움직인다. 메탈의 차가운 은빛 속에 관람객과 움직이는 색채가 뒤섞인다. 퍼포머들은 흰 벽을 스치듯 지나가며 자국을 남긴다. 이 광경을 든든히 받치고 서있는 거대하고 둥그런 벽에는 과거 퍼포먼스 사진 위에 모래와 오일 페인트를 섞어 문지른 회화작품이 걸려있다. 예측할 수 없는 ‘블리스 풀’의 하루는 다가올 미지의 작품으로 순환된다.
옷감과 머리카락 매듭 등으로 만든 작품 〈신기루의 문턱〉 앞에 자리한 작가.
퍼포먼스를 준비하느라 많이 다니진 못했지만 굉장히 깨끗하고 현대와 전통이 잘 어우러진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멕시코시티, 뉴욕, 베를린에서 활동하며 여러 도시를 돌았는데 그 어느 곳보다 내 작업을 궁금해하고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치를 먹기도 했다.
이전에 «옵시디안 래더(Obsidian Ladder)» 전시를 연 마르시아노 아트 파운데이션은 스코티시 라이트 매소닉 템플(Scottish Rite Masonic Temple)을 개조한 현대미술관이다. 비밀 단체 프리메이슨의 사원이라는 독특한 정서를 안고있다. 전시에 건축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왔는데 이번 전시는 공간과 연계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려고 했나?
콜라주를 작품 전반에 사용한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미지 위에 의미와 소리를 겹쳐서 어떤 일종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번 제목 ‘블리스 풀’은 내가 만든 공간의 부드러운 구조를 둘러싸는 원에서 착안했다. 부드럽고 촉각적인 표면과 색채들이 벽을 이루어 둘러싸듯 연출했는데, 마치 전시 전체가 관람객을 감싸안는 듯한 느낌을 줄 것이다.
활동 초기, 회화가 남성 중심 미술계를 상징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보디페인팅을 한 모델들이 벽에 자취를 남기는 퍼포먼스는 여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더라도 여성의 주체성이 드러나는 열쇠라 생각하는데.
퍼포먼스를 대상화하거나 수단처럼 여기고 싶지는 않다. 벽에 몸을 문지른 흔적은 내 작업에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나의 공동 창작자들에게 지분을 내어주는 페인팅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론 전시 공간 내에 보통 커다란 크기로 제작, 설치되는 페인팅과 조각에 대조되는 휴먼 스케일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보디페인팅은 신체로부터 시작되며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의 몸이 드러나는 것이지 일부러 이분화시키진 않는다.
인체에 작업을 하는 동안 어떤 감정을 느끼나?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것 같다.
퍼포머와 나 사이의 관계가 페인팅을 이끌어간다. 사람 몸에 그리는 것이 모든 작업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도 이 작업을 위해 스케치를 해두거나 계획을 짠 적은 없고 항상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그려왔다. 나는 사람 몸에 작업하는 것이 즐겁고 그것이 가진 유한함이 좋다. 보디페인팅을 하면서 퍼포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동안 생기는 상호작용이 페인팅을 좋은 방향으로 데려간다. 나는 언제나 과거를 지닌 재료를 사용해 작업하는 것이 좋다. 이번에는 작업에 여러 층을 더해줄 자신만의 과거를 지닌 사람들과 작업하고 있다.
퍼포머의 움직임이나 동선에 작가는 어느 정도 개입하나? 전시를 마치고 퍼포머들과 나눈 뒷이야기도 궁금하다.
퍼포머들이 안전하고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주의 깊은 디테일과 보호가 퍼포먼스를 준비하는 과정에 요구된다. 이런 전제가 있기 때문에 퍼포머들이 그 긴 명상적인 시간에 주어진 안무도 없이 주도권을 가지고, 각 전시마다 새로운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퍼포먼스의 기회가 줄어든 팬데믹을 거치며 반사되는 구조물을 사용해 관람객을 전시의 일부로 수용하는 방법을 취했다.
전시에 사용된 거울은 기울어지고 왜곡되어 설치를 둘러싼 작업물을 굴절시키기도 한다. 이는 사람들이 서있는 전시 공간에 따라 각각 다른 시야를 보여주면서 관점을 다양하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건 모든 관람객 각자에게 특별한 이미지를 남겨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거울은 공간의 일부로 위장해 숨어들어가거나 주변을 둘러싼 다른 그림들로 씻겨나가기도 한다.
언뜻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과거 퍼포먼스 사진 위에 모래 등을 섞은 오일 페인트로 채색한 12점 회화를 벽처럼 세웠다.
보디페인팅을 받은 퍼포머가 거울과 같은 메탈 작품 앞에서 동작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한 돌 위에 전시된 조각 〈긍정적인 일기〉.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을 확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위에 색을 입혀 대형 작품을 완성한다. 완벽하게 박제할 수 없는 순간을 되려 나이테처럼 쌓아 다음 작업으로 가져가기도 한다.
어떤 매체에서는 나의 언어라고 하더라. 전시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다. 퍼포먼스 의상도 아카이브로 보관되고 작품이 다음 작품의 일부로 이어진다. 한국에서도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이 입던 옷을 태운다고 들었다. 사람의 에너지가 스며있어서가 아닐까 싶은데 나 역시 퍼포먼스 의상에 에너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다시 조각 등으로 활용한다.
어떤 공간에서 맡은 향이 그 순간의 기억을 점령할 때가 있다. 관객이 후각의 경험을 통해 무엇을 가져가길 바라나?
모든 걸 설명하기보다는 보는 사람들의 경험에 맡기고 싶다. 하지만 한 가지 원하는 바는 있다. 나는 사람의 기억을 자극하는 작업을 한다. 시각이나 청각, 후각을 일깨우는 방법을 사용하는 건 휴대폰으로 촬영해서 단편적으로 남는 시간이 아니었으면 해서다. 조금이나마 더 길게 공감각적으로 전시의 기억을 가져가길 바란다.
‘블리스 풀’은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종합예술이다. 추상화가라 불리길 경계한다고. 당신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수식어나 호칭은?
추상화가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진 않는다. 다만 아티스트는 묘함과 미스터리함의 오라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호칭보다 중요한 건 관람객이 들어가길 선택하고, 그런 다음 자신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시장에서 드럼 스틱이 삐죽 튀어나온 가방을 멘 소녀 관객을 봤다. 당신이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드러머였던 경력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때의 예술적 경험이 지금의 예술 작업에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볼리비아 문화라는 자양분과 미국이라는 생활 반경, 지금 자리 잡은 베를린 이 세 장소는 당신의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작업적으로는 보이는 그대로다. 이들 장소는 내 삶의 일부분이다. 어릴 적 볼리비아에서 전통 축제를 보며 자랐다. 뉴욕에서 살 때는 스튜디오가 좀 작았다. 베를린은 작가들에게 오픈된 도시다. 자연 경관도 훌륭하고 삶의 질 또한 높다. 저렴한 가격에 큰 스튜디오를 구할 수 있고 좋은 사람들과 지낼 수 있어 한동안 베를린에 정착했다.
2017년 아트 바젤의 퍼포먼스 이후 빠른 속도로 지금의 자리에 왔다. 앞으로 쌓고 싶은 것은?
AI를 혼란스럽게 할 작은 결함들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
박의령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이번 전시가 다음 전시에는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자리가 꼭 한국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