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라는 생명체에 혈관처럼 뻗어나가는 소셜미디어 덕분에 세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또 비슷해졌다. 나라 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보편적인 세상을 만나게 됐다. 세계화란 이름하에 무뎌지는 민족성은 의식주 전반으로 퍼졌다. 편향된 알고리즘의 세상에서 다양성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 중 가장 ‘글로벌 스탠더드’로 변화한 건 패션이다. 서울, 파리, 뉴욕, 도쿄, 런던 그 어느 도시에서도 비슷한 스타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전 세계의 트렌드가 몇 개의 스타일 안에서 움직이고 나라별은커녕 대륙별 특징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듯, 진화란 다양성의 증가다. 이 역행하는 사회의 흐름에 의문을 제기한 건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다.
나는 패션이 세계적이어야 한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 로랑에게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생 로랑이 파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당신의 몫입니다.
지난해, 어느 인터뷰에서 세계화와 새로운 마켓으로의 확장을 위해 좀 ‘덜 구체적인’ 패션을 만들어야 된다는 압박은 없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가 쏘아붙인 말이다. 그는 여전히 이브 생 로랑이 생전에 함께했던 지극히 프랑스적인 셀럽들(이를테면, 카트린 드뇌브와 베티 카트루)을 쇼장 프런트 로에 초대하고, 친구로 지낸다. 안토니 바카렐로에게 생 로랑이란 단어는 프랑스적 우아함과 동의어였고, 이를 지켜내는 것을 사명처럼 여기는 디자이너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이브 생 로랑과 같은 사람 같아요. 그는 모든 것을 현대 세계에 적응시켰어요. 그게 바로 생전에 이브 생 로랑이 한 일이죠. 그건 패션 그 이상이며, 새로운 역사였죠.” 전설적인 모델이자 세기를 뛰어넘어 이브 생 로랑과 안토니 바카렐로 이 두 디자이너를 모두 친구로 둔 베티 카트루의 말이다.
기성복이 등장하던 혁신적 순간에도 오트 쿠튀르와 프랑스식 패션을 지켜나갔던 이브 생 로랑과 가속화된 세계화 속에서 프랑스의 민족성을 이어가려는 안토니 바카렐로 간의 공통점은 이번 2023 F/W 여성 컬렉션에서도 드러난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마치 태양처럼 빛나던 무대는 1970년대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주 무대였던 인터콘티넨탈호텔의 연회장을 연상시킨다. 생전의 이브 생 로랑 역시 이곳에서 매번 프랑스의 영혼이 담긴 오트 쿠튀르를 선보였다. 검은색 래커를 칠한 나폴레옹 3세 시절의 의자와 패브릭 위로 부서질 듯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빛, 그리고 공기마저 프랑스적인 향기로 채운 쇼장은 그 시절, 그 짙고 우아했던 감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무대 위라고 다를 건 없다. 이브 생 로랑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핀스트라이프 투피스를 입은 우아한 여인들이 런웨이 위를 채웠다.
샤넬이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면, 이브 생 로랑은 여성 턱시도를 디자인하며 여성에게 권력을 주었다
라는 말이 있다. 생 로랑에게 우아함이란 지극히 프랑스적인 접근법이다. 그 우아함은 여성의 권력, 즉 당당함으로부터 나오는 날카롭고 강력한 우아함이다. 이번 쇼에서는 날렵하면서도 탄탄한 어깨 라인을 가진 투피스로 ‘편안함’이란 단어가 모든 패션 트렌드를 이끄는 지금, 또 다른 뉘앙스의 우아함을 만들어냈다. 그건 보편적인 것과는 사뭇 다른, 스스로 ‘다름’을 찾아갈 때 나오는 우아함이다. 스커트수트를 비롯해 레더 재킷과 샤프한 레깅스 팬츠 등이 단단하게 컬렉션을 이끌었다. 여기에 시어한 블랙 스타킹과 풍성하게 스며드는 빅 보타이 블라우스, 어깨를 따라 유려하게 흐르는 대범한 사이즈의 스카프, 강렬한 보잉 선글라스까지 룩에 살아있는 리듬감을 더하는 포인트들이 한 톨의 촌스러움도 없이, 완벽히 1980년대식 파워 수트 룩을 현대화했다.
“신발이 대성당만큼이나 한 문명에 대해 잘 말해줄 수 있다.” 미술사가 프리트 랜더의 지적처럼 패션은 변화하는 시대를 가장 예민하게 포착한다. 2023 F/W 생 로랑의 유니폼에는 두 남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의 모습이 담겨있다.
“생 로랑의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숨길 줄 안다.” 컬렉션 노트에 적힌 이 문장이야말로 생전의 이브 생 로랑과 지금의 안토니 바카렐로가 동시에 그리는 프랑스식 우아함의 정의이자 지금의 여성들에게 생 로랑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