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상파, 임직순의 색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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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상파, 임직순의 색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적 인상파’ 작가 임직순. 그의 빛과 색채는 살아 숨 쉬는 것들에 대한 내면의 진실한 응답이다.

BAZAAR BY BAZAAR 2022.04.30
 
〈휴식〉, 1984, 캔버스에 유채, 97x145cm. © 개인소장

〈휴식〉, 1984, 캔버스에 유채, 97x145cm. © 개인소장

임직순은 근현대미술사에서 ‘한국적 인상파’라는 화풍을 구축한 작가다. 말년의 피에르 보나르가 그랬듯 ‘색채의 마술사’라는 칭호를 붙이기에도 적절하다. 여인과 꽃은 그가 추구한 진실한 색채를 구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그는 1980년 화문집 〈꽃과 태양의 마을〉에서 이렇게 말했다. “빛의 주인, 여인의 앉음새에서 빚어지는 선과 선의 변화는 내가 추구해온 회화성의 흐름이다. 빛과 색채와 여인이 작가의 내면에서 이루는 조형적 화음, 그것은 영원한 신비다.” “적어도 나는 어느 여자를 모델로 정할 때, 먼저 내 속의 예술적 충동을 점쳐본다. 그런 후 ‘모사’에 착수하고, 점차 그 여자의 겉모양으로부터 멀어져간다. 나의 관심은 이제는 그녀의 내부 세계이다.”  
 
〈가을과 여인〉, 1974, 캔버스에 유채, 116.8x80.3cm. © 개인소장

〈가을과 여인〉, 1974, 캔버스에 유채, 116.8x80.3cm. © 개인소장

임직순의 예술은 사물의 객관적 형태가 아닌 조화, 구성, 어울림 같은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다. 1957년 제6회 국전에서 첫 대통령상을 수상한 임직순의 〈좌상〉이 바로 그런 작품이었다. 한 소녀가 있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소녀는 한쪽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한쪽 다리를 꼰 채 담담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앞쪽에는 또 다른 의자가 놓여 있고, 뒤편으로 창문 너머의 여름 풍경이 어렴풋하다. 좌상화는 당시 아카데미즘 전시에서 주된 흐름이었지만 임직순의 그것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인물이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배경과 어우러지며 서로 밀도 있는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표현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특징은 갈수록 도드라지는데 〈여인〉(1983) 〈휴식〉(1984) 같은 작품에서는 어디까지가 여인이고 어디까지가 꽃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인물과 배경이 하나의 이미지로 일체화된다. 작가는 말한다. “화가란 겉모양만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아무 뜻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화가는 그 내용에 접근하기 마련이다. 화필을 들면 여자와 꽃은 그 형태를 떠나 정열과 고뇌와 사랑으로 다가온다. 여자와 꽃에 어울리는 모든 것도 통일된 이미지로서 나를 반긴다. 하나의 작품이 끝나면 그 대상의 존재는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떠나 모든 이의 존재, 모든 이의 대상으로 옮겨간다.”  
 
〈서재에서〉, 1976, 캔버스에 유채, 117x80cm. © 리움미술관

〈서재에서〉, 1976, 캔버스에 유채, 117x80cm. © 리움미술관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소재를 추구하는 것이 인상파의 태도임을 감안하더라도 임직순이 그리는 소재가 매우 한정적이었다는 데 있다. 주된 모티프는 여인(대부분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 꽃(대부분 화병에 꽂혀 있는 장미) 그리고 풍경화(대부분 산)였다. 이런 이유로 소위 아카데미적이고 보수적인 작가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괘념치 않았던 듯하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추상미술이 대세였다. 그러나 임직순은 평생 동안 극도로 제한된 모티프를 통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구상미학에 천착한다. 1961년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고 모든 예술가들이 서울로 향하던 시기였지만 그는 반대로 서울을 떠나 광주로 내려온다.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광주의 무등산과 시골 풍경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안정적이고 탄탄한 구도, 정겨우면서 강렬하고 색채가 돋보이는 남도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힘찬 기세가 느껴지는 〈무등산의 설경〉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흔히 호남 서양화단의 선구자를 말할 때 추상의 김환기·강용운·양수아, 구상의 오지호·임직순을 꼽는다. 충주 출신인 그가 남도 화가로 인정받는 건 이 시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건희 컬렉션의 하나인 임직순의 〈포즈〉가 광주시립미술관에, 〈여인좌상〉이 전남도립미술관에 각각 기증되었고 광주시립미술관은 임직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준비하고 있다.
임직순은 1974년 14년간의 광주시대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2년 뒤 급성간염으로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작품이 시각적인 진실에서 심각적인 진실로 탈바꿈하였다고 회고한다. “빛의 만남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색깔을 추구하는 것이 오랜 나의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색채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이 보여주는 어느 순간의 색이 아니라 본질적인 색깔을 갖고 싶다. 이것은 ‘현장’으로부터 떠난 그림을 그리려는 변화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태양 아래서의 색이 아니라 내면의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눈으로 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충동으로 캔버스 앞에 앉곤 한다.” 그의 화업은 1980년대 이후 절정을 이룬다. 주요 무대가 선전과 국전 같은 아카데미즘의 중심이었다는 것, 지역 미술을 위한 활동보다는 개인 작업에 치중했다는 것 등의 이유로 작가에 대한 평가가 미온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면 가득 생생한 색채 감각, 힘 있는 붓 터치와 진득한 마티에르는  꽃과 소녀와 무등산을 막론하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어느 예술가의 진실한 응답이다.
 
〈해바라기와 소녀〉, 1959, 캔버스에 유채, 144x98cm. © 한국은행

〈해바라기와 소녀〉, 1959, 캔버스에 유채, 144x98cm. © 한국은행

흑색이나 갈색을 기조로 파리 시민의 일상을 차분하게 묘사하던 ‘앵티미스트’ 보나르는 말년으로 갈수록 빛과 색채에 천착하며 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로 불렸다. 임직순이 보나르를 인용하며 남긴 글을 통해 평생에 걸쳐 그가 추구한 빛과 색채의 진실, 그 무한한 예술적 깊이를 감히 가늠해본다.
“‘눈 먼 채로 태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떴으면 한다. 그러면 눈앞에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르는 채로 그리게 될 테니까.’ 말년에 보나르가 한 말이다. 대상의 존재보다 빛과 색채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한 색채화가다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눈 먼 자의 최초의 개안. 나도 그 빛과 색채의 만남으로 건강한 생과 자연에 대한 헌사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
 
※ «임직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4월 19일부터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참고 문헌/ 임직순, 〈꽃과 태양의 마을〉, 경미문화사, 1980. 임직순, 〈내가 좋아하는 소재〉, 현대화랑, 1989. 이경성, 〈임직순론〉, 현대화랑, 1989, 오광수, 〈임직순 10주기전 화집〉, 갤러리현대, 2006
 
손안나는 〈바자〉의 피처 에디터다. 나혜석과 이응노에서 출발한 20세기 한국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오래된 화문집과 도록을 뒤적거리는 취미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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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손안나
    사진/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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