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BIRTH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딜쿠샤(Dilkusha)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연합통신 통신원이었던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그의 부인 메리 L. 테일러 부부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이 공간을 소설에 비유하자면 틀림없이 대서사시다. 이야기는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에 빠진 서양인 부부는 지금의 행촌동에 터를 잡고 꿈같은 집을 짓는다. 완공된 지 4년 만에 화재를 겪고 다시 지었는데 1942년 일제가 부부를 추방하면서 결국 주인을 잃는다. 이후 개인이 구입했지만 재산이 몰수당하여 국가 소유가 되었다. 오랜 기간 방치되어 ‘기쁨’을 잃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갈 즈음 테일러 부부의 아들이 어릴 적 살던 집을 찾아 66년 만에 다시금 세상에 알려진다. 집 자체가 박물관이자 갤러리인 딜쿠샤는 많은 이들의 손을 거쳐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1층에 있는 너비 14미터의 넓은 거실은 그 앞에 있는 포치에 가려서 많이 어두웠기 때문에 벽에 황금빛이 도는 노란색 페인트를 칠했다. 이 거실은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디너 파티나 연회, 무도회에 사용되었다.”(테일러 가의 자료인 〈호박목걸이〉 중에서) 이처럼 생생한 기록과 사진이 전해져 영화의 시대가 우리 눈앞에 또렷하게 펼쳐진다. 실내 디자인도 그렇지만 인상적인 붉은 벽돌의 외형도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벽을 세울 때 벽돌과 벽돌 사이에 공간을 두는 ‘공동벽(空洞壁) 쌓기’는 우리 근대건축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건축 기법이다. 1백 년의 시간을 품은 딜쿠샤. 이곳의 심장부가 할 수 있는 2층 응접실 창 너머로는 브랜드 이름이 붙은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로10길 34-16
전시와 음악가의 뮤직비디오, 힙합 뮤지션 공연과 미디어 아티스트의 퍼포먼스까지 장르 불문하고 열리는 이벤트마다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으니 ‘TINC’다. 르네 마그리트가 파이프를 그리고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쓴 문구가 떠오르며 현대미술과 말장난의 덫에 걸린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지었다기 보다 공사하는 동안 인스타그램 계정 소개글에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라고 써놨다가 그대로 이름이 됐다고.)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는데 아무리 봐도 교회다. 바깥에는 명성교회라고 쓰인 오래된 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단상과 기다란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십자가 같은 성물이나 스테인드글라스는 없지만 흘깃 봐도 45%쯤 교회다. TINC는 운영자 중 한 명이 동네에 나온 교회 건물을 보고 덜컥 인수하면서 출발했다. 여러 방면으로 사용하고자 했는데 복합문화공간보다는 덜 쑥스러운 다목적 공간으로 용도를 정했다. 매끈하게 정돈된 전시장이나 공연장에 비하면 채광도 불규칙하고 시원하게 쓸 벽면도 별로 없다. 그런데 도리어 제약된 환경 아래 생기는 변수를 취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교회였던 과거를 최대한 드러내고 어떤 이들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사용한다. 문 연 지 막 일 년 된 TINC는 아직도 느슨하고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고 당분간 간판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오밀조밀한 성북동 주택가 안에서 오래된 교회는 최고의 길잡이가 되니까.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풍문여고가 헐린 부지에 무엇이 들어설까 많은 기대와 관심이 이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 7월 서울공예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학교라는 특성상 굳건했던 담장과 문이 헐리고 너른 운동장은 공원처럼 모두가 드나들 수 있는 개방형 공간이 되었다. 서울공예박물관은 한옥을 포함한 일곱 개 건물과 공예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새로 지은 건물은 안내동 한 채뿐이다. 옛 건물을 보수해 전시실과 수장고, 아카이브실 등 알차게 활용했다. 동그란 모습이 독특한 교육동은 풍문여고의 ‘정보관’이었다. PC나 영어 교육을 하던 공간이 이제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 공간이 된 것처럼 바통을 이어받듯 쓰임이 이어지고 있다. 공간을 바꾸며 수많은 아이디어가 왜 없었겠냐만은 훼손을 최소화하고 보존하는 데 중점을 뒀다. 학교이기 이전에 조선시대 별궁인 ‘안동별궁’ 터였던 연유에서다. 역시나 건축 전 문화재 조사에서 기초석이 발견되어 그 위에는 건물을 올리지 않고 보도블록을 깔았고 자리에 검은색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예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상기하자는 의미다.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 전문 박물관의 내실을 들여다볼 차례. 자수와 보자기 같은 생활과 가까운 전통공예부터 선사시대의 역사가 보이는 금속공예, 지역별 공예와 그를 다루는 장인들까지 조명하는 다양한 상설, 기획전이 열린다. 이런 다양한 전시를 통해 전통공예와 현대공예 사이의 단절을 메우고 우리 공예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우리 공예를 ‘유물’로, 서양 회화를 ‘작품’으로 부르는 걸 알게 됐다. 전국에서 공들여 찾아내고 선별한 것들로 채운 전시는 우리 공예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보여준다. 서울공예박물관을 한바탕 돌고 나선 길에는 안국동 거리가 뻗어 있다. 조선시대부터 경공장이 모여 왕실에 납품할 공예작품을 만들고 유통하던 곳. 서울공예박물관이 지금 여기 있는 건 우연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번뜩 스친다.
박의령은 〈바자〉의 피처 디렉터이다. 몇 번이나 허물고 새로 세워진 곳에도 지나간 시간의 파편이 조금씩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건 유령이 아닌 씨앗 같은 것이라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