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화보는 연극 무대에 선 배우의 모놀로그가 콘셉트였죠. 네 가지 무드로 촬영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노란색 도트 드레스를 입은 컷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실제로도 스스로를 자주 “사랑스럽다, 귀엽다”고 표현하신다죠?
임팩트가 강한 역을 주로 연기했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소녀가 있잖아요. 제게도 애 같은 얼굴이 보일 때가 있거든요.
옛날에 오지혜 선배가 저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보고 약간 삐딱하고 반항적인 기질이 있다고 하셨는데 맞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죠. 이런 기질이 제 인생을 좀 더 진보적이고 색다른 모험으로 안내하면 좋은 거고요. 약간 희화화되어 관객을 즐겁게 만들면 그 또한 좋은 거죠.
슬립 드레스는 Zara. 레이스 트렌치코트는 Bluemarine. 양손에 착용한 반지는 모두 Le Mauve Studio.
연기자 입장에선 내면의 천진난만함을 지키는 게 중요하죠?
주디 덴치(Judi Dench) 처럼요. 우아하고 멋있는 할머니지만 랩을 하거나 장난스런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로스쿨〉의 김석윤 감독과는 〈눈이 부시게〉 〈송곳〉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이라죠. 현장의 모 스태프 말을 빌리자면 “이정은 배우가 김 감독의 페르소나가 아니겠느냐”던데.
(웃음) 어우, 이제는 바뀌었어요. 김범 같은 젊은 친구들로요. 우리는 서포트 역할이죠. 사실 드라마 현장에서 카메라가 네 대나 돌아가는 경우가 흔치 않거든요. 카메라에 맞춰서 여러 번 연기를 반복할 필요가 없죠. 감독님께서 배우들이 창조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세요. 제겐 오빠이자 선배님이고요. 제 나이가 이제 50줄을 넘어가다 보니까, 후배는 많은데 제 연기에 대해서 정확한 지적을 해주시는 분들이 없어요.
누가 이정은에게 연기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겠어요.
저도 항상 더 배우고 싶고 더 단련하고 싶어요. 감독님께서 짤막하게 의견을 딱 던지면 그게 굉장히 오래 남아서 제 연기를 돌아보게 돼요. 게을러질 수가 없죠. 일신우일신하며.
이번 드라마에선 어떤 인상 깊은 코멘트를 들으셨나요?
제가 맡은 김은숙은 판사 출신 민법 교수예요. 그런데 감독님이 “이 사람은 꼭 헌법 교수 같은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고민이 시작되죠. 헌법을 가르치는 교수와 민법을 가르치는 교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했나.
그 후 캐릭터를 어떻게 가져갔는지 궁금해요. 평소에 관찰력이 남다르다고 알고 있는데, 직업군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나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하셨나요?
오히려 어떤 직업군을 만나면 평소에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게 되는 것 같아요. 훨씬 더 일반인답달까요. 그러다가도 어떤 조항이나 법의 이치에 대해서 설명할 때 다들 눈빛이 달라지더라고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흥미롭게 말하잖아요. 그런 열정을 발견할 때 재미있어요.
도트 패턴 드레스는 Sonjungwan. 골드 귀고리는 Fruta.
영화 〈자산어보〉에서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시절부터 절친인 설경구 씨와 함께하셨죠. 홍보 인터뷰 자리마다 그렇게 이정은 배우를 칭찬하고 다니신다던데.
제가 그랬어요. 오빠가 나에 대해 너무 좋게 이야기해줘서 사람들이 진짜인 줄 알겠다고. 정말 감사하다고.(웃음) 경구 오빠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인기가 많았어요. 나 혼자 그 오빠가 잘생겼다는 걸 몰랐죠. 내 타입이 아니었거든요. 사심이 없으니까 남매같이 지냈어요. 오빠와 무대도 아니고 영화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가는 길이 아예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제가 영상 쪽으로 넘어온 건 마흔셋 정도였어요.
웃는 모습이 소년 같은 남자?(웃음) 어쩌면 그게 당시 제 모습이었을 수도 있어요.
그때의 저는 소녀가 아니고 소년이었어요.(웃음)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매년 수 편의 작품을 하고 계신데,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나요?
장딴지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확실히 어머님이 절 잘 낳아주셨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체력이 좋은 편이죠. 또 하나의 동력이라면, 저는 이야기가 좋아요. 사실 제 일상생활은 좀 심심하고 진지해요. 그런데 작품 할 때면 그렇게 신이 나요. 엔도르핀이 도는 거죠. 이게 사는 의미인 것 같고. 현장에서 만나는 막내들을 보며, 그 시작하는 눈들을 보며 되레 자극을 받기도 하고요.
배우를 기다림의 직업이라 하잖아요. 하지만 그 기다림을 어디까지 감당해야할지 여전히 혼란스러운 청춘들에게 어떤 위로를 전하고 싶은가요?
어느 누가 누구에게 자질이 있고 없고, 연기자가 되고 안 될 거라 판정할 수 있겠어요. 저는 단 한 번도 동료에게 그런 얘기 해본 적 없어요. 좋아하면 끝까지 하세요.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오직 자신의 선택이에요. 최근 〈노매드랜드〉라는 영화를 봤는데 거기에 집을 마련하는 데 평생을 쓰고, 결국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물이 나와요. 어느 때 누굴 만나야 하고 어느 때 돈을 벌어야 하고, 어느 때 성공해야 하고. 남의 속도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기 속도대로 가세요. 자신의 길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 거예요. 연기가 좋은데,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때문에 삶이 힘들다면 먹고사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겠죠. 그런데 만약 돈으로 측량할 수 없는 어떤 걸 하고 싶다면, 잠시 그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요.
원피스는 Munn. 싱글 이어커프는 Vokchoi.
저는 그냥 어떤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어요. 그게 연극이든 영화든. 당시 제가 했던 아르바이트들이 매체에 모험담처럼 회자되기도 했지만 그땐 그렇게 힘들지 않았거든요. 부끄럽지도 않았고요. 여전히 나중에 배우로 쓰이지 않으면 뭘 할까 생각해요. 답은 하나예요. 또 무대에 서는 생각 하면서 일해야죠, 뭐. 옛날처럼 마트 캐셔 일을 다시 할 수도 있고, 화장실 청소도 할 수 있어요. 그때 사람들이 날 보고 웃더라도 ‘난 괜찮아요’라는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요. 이 마음을 항상 갖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이게 두려우면 이 일 못해요.
모 소설가가 사적인 자리에서 비슷한 얘길 하더라고요. 글을 쓰다가 생활고에 시달릴 때는, 쿠팡에서 로켓 배송 아르바이트 하면서 계속 쓰면 된다고, 그런 결론을 내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고요.
게다가 노동도 창의적인 일이거든요. 식당에서 일할 땐데요. 저는 고추장 봉지를 들고 손에 힘을 주어 꽉 짜내고 있는데 같이 일하던 언니는 고추장 봉지를 테이블에 탁 놓더니 밀대로 쓰윽 밀고 끝내더라고요. 그 언니는 나보다 몇 년 먼저 일하면서 노하우를 터득한 거죠. 그게 예술이죠. 노동은 삶의 예술이에요. 그걸 우습게 보면 안 돼요. 그래서 먹고사는 데에만 필요한 일을 하더라도 늘 나라는 존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힘든 시기에 흔쾌히 연극 제작비를 빌려준 배우들, 예를 들어 신하균, 지진희, 우현 씨 이름이 적힌 메모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요.
혹시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돈부터 갚으라는 의미에서.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요. 처음에는 금방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좋아하는 연극을 놓지 않으면서 돈도 벌려고 하니까 수입에 한계가 있잖아요. 거의 신용불량이었죠. 사람에겐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도 하고요. 그때는 우울감이 있어서, 안 좋은 생각 할 때도 많았어요. 이렇게 남한테 신세만 지면서 살다가 없어지면 그 사람도 얼마나 억울할까. 어떻게든, 내 신발 하나를 팔아서라도 갚아야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이었죠. 저보단 저한테 그 돈을 빌려주신 배우들이 대단한 분들이에요. 풍족해서 제게 그 돈을 빌려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기꺼운 마음으로 동료를 격려해준 거라 생각해요. 그 고마움을 갚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방송을 시작하고 2013년쯤 갚았어요. 처음엔 너무 기뻤죠. 그런데 빚이 사라지고 나니까 그 다음엔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잘 못 찾겠더라고요. 우리 회사 대표님이, 집도 사고 차도 사야지, 하시는데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그냥 부모님을 위해서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정도죠.
화이트 셔츠, 재킷, 스커트, 슈즈는 모두 Dior. 골드 목걸이는 Mama Casar. 양손에 착용한 반지는 모두 Le Mauve Studio.
배우들이 흔쾌히 돈을 빌려준 이유도 본인이 워낙 업계에서 좋은 사람으로 통했기 때문이겠죠.
현장에서 웬만하면 괴로운 얼굴을 하지 말자고 다짐해요. 저는 좀 늦게 좋은 작품, 좋은 역들을 맡게 됐잖아요. 이게 참 복된 일이구나. 다시는 안 올 수도 있는 기회구나. 그러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낯빛을 밝게 하고 다닌다고 해야 하나요?
생각보다 쉬워요. 인상 찡그리고 있으면 너무 못생겨 보이거든요.(웃음) 이왕이면 현장에서 맑은 얼굴로 “해볼 수 있어.” “할 수 있어.” 하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요?
그런데 참 어려워요. 속에선 매번 내가 나와 싸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어떤 역할이 오든 다 소화할 것 같지만, 사실 한계를 많이 느끼거든요. 그래도 해내야죠. 어려움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는 거니까.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 이후에 평범한 연기에 자신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신 적 있어요.
주말드라마에 맞는 혹은 평범한 역할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의견을 들었는데, 기분 나쁘기보다 정말 새겨듣게 되더라고요. 장면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너무 많은 꾸밈을 넣지 않았나 반성도 했고요. 그 다음에 신수원 감독과 〈오마주〉라는 작품을 찍었는데 감독님이 저한테 신을 위해서 무언가 더 하는 게 아니라 덜 하는 쪽으로 연기하라고 한 것도 도움이 됐어요.
수십 년 해온 분야에 대해 여전히 열린 마음으로 치열하게 연구한다는 점이 대단해요.
당연하죠. 이거 가지고 밥 먹고 살아야 하는데요.(웃음) 아마 선배님들 중에서도 자기 연기에 만족하는 분들 별로 없을 거예요.
셔츠 롱 드레스는 Oct31. 핸드 커프는 Once-In-A-Lifetime.
초반에 말씀하신 대로 개성 강한 역할을 주로 연기하셨죠. 가장 본인과 다른 캐릭터로 누굴 꼽으시겠어요?
사람들은 다르게 봐주시는데 제 입장에선 연기할 때 차이를 크게 두진 않아요. 체중을 늘리고 줄이고 대단한 노력을 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사실 외모가 얼마나 바뀌겠어요. 가장 기본은, 그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겠죠. 예를 들어 극중 인물이 교통사고로 죽은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나도 같이 그 생각을 하는 거죠. 결국 연기란 인물탐구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 맥락에서 묻자면, 〈기생충〉의 초인종 신은 사실 시나리오상 “술에 취해 상처 입은 얼굴로 찾아왔다” 지문 한 줄이 전부였는데요.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가요?
사채업자들을 만났을 테고. 술을 마셨겠죠? 그 집에 찾아가기까지 아주 큰 용기를 냈을 거예요. 거기서 인물이 난관을 뚫고 나가는 힘이 나와야 이후 다른 행동들에도 동력이 된다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저보다는 감독님이 대단한 거죠. 감독님께서 늘 그래요. “아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요? 나는 그렇게 안 찍은 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해도 나중에 보면, 배우들보다 훨씬 깊고 다양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 수 있죠.
〈내가 죽던 날〉로 김혜수 씨와 현장에서 만난 날, 두 분이 손을 붙잡고 펑펑 울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오랫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연기해온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어떤 감정이 있었을 것 같아요.
지인의 공연장에서 만났던 사이라 사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알았어요. 하지만 그쪽은 주인공으로 쭉 탄탄한 자기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었고 저는 무대 위주로 연기하다가 뒤늦게 영상으로 와서 만난 거죠. 중년의 배우로 살면서, 지금까지 쌓인 어떤 삶의 경험들에 대해서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더라고요. 나이를 먹어가는 여자 배우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어떤 비슷한 관점일 수도 있고, 동질감일 수도 있고요.
젊은 친구들에게 ‘언니’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시간이 빨리 흐르는 시점이 오거든요? 저는 한 마흔다섯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 마음이 급해지죠. 언제 집 사고 언제 결혼하고 언제 퇴직하고. 그런데 오늘이 있어야 그 ‘언제’도 오는 거잖아요. 저도 스무 살 때 만 가지 고민을 안았던 것 같아요. 너무 미래에 가 있으려고 했죠. 그런데 그 미래는 걱정하지 않아도 곧 오더라고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을 망치지 마세요.
본인의 삶에서 ‘지금은 알고 그때는 몰랐던 것’은 무엇인가요?
50대에도 20대의 마음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있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