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ul McCarthy, ‘Self-Portrait’, 1963, Ink on paper, 27.9x21.6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Paul McCarthy
폴 매카시만큼 악명 높은 예술가도 흔치 않다. 그의 백설공주는 난쟁이 머리를 한입에 먹어버리거나, 색정광 난쟁이들과 성교하듯 뒤엉키거나, 오달리스크처럼 욕정 어린 포즈를 취한다. 심지어 그의 전시장 앞에는 종종 19금 팻말이 붙는데, 안에서는 폭력, 식욕, 섹스, 살인 등 온갖 말세적 행위와 소돔과 고모라 뺨치는 해괴한 풍경이 펼쳐진다. 화이트 큐브의 전시 공간을 벗어나서 서부영화를 성적으로 패러디하거나, 디즈니 캐릭터를 변태 성욕자로 만들거나, 인간들이 테이블 위에서 난삽한 몸 동작을 보이는 등의 행위예술과 영상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우리를 길들여온 세상의 모든 당연한 것들에 ‘똥’을 던지는 그의 노골적인 작업은 말하자면 최악을 통해 차선을 꿈꾸는 형국이다.
고백하자면, 난쟁이를 잡아먹는 백설공주의 전복적인 조각 앞에서 나는 기이한 쾌감을 느꼈다. 백설공주와 궤를 같이하는 숱한 공주들, 그녀들이 지난 수십년 동안 대물림해온 여성-남성의 지리멸렬한 관계를 말 그대로 씹어 먹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백설공주라는 캐릭터를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차용한 그의 변(辯)을 들어보자.
“적어도 서구 문화에서 백설공주 같은 이미지와 스토리가 우리를 현실에 길들이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봐요. 나는 인간의 조건을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죠. 인간이 만들어낸 실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대면하는 것, 서구문화가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보는 것, 폭력성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아는 것, 아름다움에 대한 통념을 부수는 것, 그리고 숨은 모순까지. 이를 통해 지배구조, 인종차별, 여성혐오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게 될 거예요. 내 작품 일부가 디즈니랜드나 할리우드를 비판하는 방식을 취하지만 동시에 이는 나 스스로에 대한 비판입니다.”
올해 75세인 폴 매카시가 평생 그려온 드로잉을 집대성해 L.A. 해머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전시가 열려 다행이라 안도했다. 그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차 있는지는 그가 출현한 그날부터 모두들 궁금했을 것이다. 미술계는 이 위험한 남자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쩔쩔맸지만, 지금 폴 매카시는 격납고만 한 작업실을 할리우드 세트장처럼 사용하고 있다. 그가 소위 ‘성공한 예술가’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운 작업을 누구나 관대히 수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급 원목으로 ‘팔리는 백설공주’를 만들기 전부터 그가 이미 백남준처럼 무대에서 가구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행위예술가였고, 기행적인 작업을 통해 미술사를 다시 쓴 혁신적 인물이라는 확고한 사실만큼이나 분명한 건, ‘미친 놈’ 취급을 받을 때조차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해 작가로 존재하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폴 맥카시의 드로잉들은 그만의 꿋꿋한 생명력을 증언한다.
«Paul McCarthy: Head Space, Drawings 1963–2019»전은 작가의 오랜 아카이브에서 선별한 6백여 점의 드로잉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드로잉 작업 역시 조각과 퍼포먼스 등과 동일한 시각언어를 공유하는데, 이는 폭력, 유머, 섹스, 정치 같은 삶의 문제들을 대중문화 및 미술사와 연관 짓는다는 의미다. 폴 매카시는 어떤 작업도 드로잉으로 시작하는 걸로 유명하다. ‘Life Drawing, Drawing Sessions’라는 제목 아래 연기자들이 드로잉하는 장면을 퍼포먼스에 포함시키고, 〈WS Wh ite Snow〉(2012-13), 〈CSSC Coach St age St age Coach〉(2017), 〈NV Night Vater〉(2019-) 등의 작품을 완성했다. 퍼포먼스 영상에는 종종 케첩이나 땅콩버터를 몸에 칠갑한 인간들이 난립하기도 하는데, 드로잉에서도 이런 재료들은 석탄, 흑연, 잉크, 마커, 콜라주 같은 전통 매체만큼이나 그에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폴 매카시의 드로잉은 곧 행위예술이나 다름 없다. “백설공주 조각에 관한 드로잉만도 수백 장 됩니다. 작업이 팔리지 않을 때부터 나는 드로잉을 그려왔어요. 내게 드로잉 작업은 ‘작품’을 완성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입니다.”
영국의 평론가이자 화가 존 러스킨은 이렇게 말했다. “드로잉의 목적은 잘 그리거나 화가가 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리는 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보는 법’에 대해 일찌감치 설파한 존 버거 역시 직접 드로잉을 그리곤 했기에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다.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드로잉을 그립니다.”(〈벤투의 스케치북〉 中) 즉 예술가에게 발견이자, 다르게 보는 법, 의외의 곳에 다다르기 위한 비밀스러운 발걸음이 된다는 점에서, 드로잉은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비물질적인 영역이다.
전시 제목을 구성하는 단어 ‘Head Space’와 ‘Drawing’을 통해서도 드로잉의 속성을 짐작할 수 있다. ‘헤드 스페이스’의 사전적 의미는 ‘제대로 생각할 시간’이며, ‘드로잉’은 ‘그리다’ 이외에도 ‘꺼내다’ ‘도출하다’ ‘돈을 인출하다’ 등 다양한 뜻을 지닌다. 특히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다’라는 의미와 ‘사람의 마음을 끌다’라는 의미가 동시에 한 단어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새삼 흥미롭다. 어떤 동물은 가끔 그림을 알아보기도 하지만, 드로잉을 알아볼 수 있는 동물은 없다 할 정도로 드로잉은 인간적인 동시에 한편 인간성을 초월한 매체다. 한 장의 종이에 허술하지만 선명한 발상의 기록은 작품의 향방과는 상관없이,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현재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지금처럼 대우받게 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산업혁명 후 교회, 왕족, 귀족 등 대부호들의 절대적 권력이 약해지면서, 요청 및 의뢰에 맞춰 ‘예술해주는’ 데서 벗어나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예술가가 기술자였던 근대 이전에는 이들의 생각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드로잉도 필요 없었다. 따라서 드로잉은 예술가가 오랜 세월 획득한 자율성과 ‘자기 충족성’을 대변한다. 폴 매카시의 원숭이 혹은 유인원을 닮은 자화상 드로잉 앞에서 관객인 나의 시선은 그의 사유가 그려낸 선을 천천히 따라가며,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 달라야 하는 이유를 이토록 별난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 순간만큼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주인공이 된다. 그간 내가 드로잉 북을 사 모으는 데 유난히 집착했던 이유도 단순히 작가들의 비싼 작업을 구입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드로잉은 작가로서 생존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 존재하기 위한 최적의 매체일지도 모르겠다.
생존하기와 존재하기. ‘살다’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엄밀히 둘은 제로섬의 관계다. 생존의 악전고투 앞에서 존재하기 위한 노력은 사치스럽고, 제대로 존재하기 위한 시도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해결된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훗날 작금의 사태가 현대적 재앙으로 기록된다면, 인간의 한계와 삶의 조건, 생존과 존재의 간극을 새삼 각성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올 초 나름 야심 찼던 나의 계획은 소리소문 없이 서랍 속으로 숨어버렸다. 크고 작은 비껴감 혹은 어그러짐의 직간접적 경험은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결국 세상의 일부일 뿐”이라는 진실에 나를 포획했다. 용기를 잃었고, 자신감은 증발했다. 사태가 잠잠해지고, 경기가 회복되고, 미래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이런 상태 역시 복구될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드로잉의 단출한 선과 색이 중요한 이유라면 단순히 무엇을 봤는가를 기록하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보도록 이끌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폴 매카시가 지난 50년 동안 묵묵히 그려왔다는 호작질 같은 드로잉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직면한 내게 선사한 격려의 현 상태다. 탱큐, 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