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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원이 프리즈 뉴욕에서 솔로 쇼를 선보인다

우리에게 미디어 아티스트로 잘 알려진 문경원이 5월 7일 열리는 프리즈 뉴욕 2025에서 미지의 풍경을 담은 <소프트 커튼> 연작을 선보인다. 작가가 다시금 회화로 돌아가 발견한 것들.

프로필 by 손안나 2025.05.08

“저는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현실을 그대로 담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심상이나 추상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죠. 저의 생각과 감각과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듯하지만 사실이 아닌 풍경을 그린다는 점에서, 제 작업은 주관적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장소, 익숙하지만 본 적 없는 풍경. 문경원은 그림 앞에 선 당신이 이 부드러운 풍경의 커튼을 기꺼이 열어젖히길 바란다. 그 다음 만나게 되는 세계는 오로지, 당신 자신의 것이다.



하퍼스 바자 이번 <소프트 커튼> 연작을 말하려면, 일단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문경원·전준호 -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 연작은 <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에서 배우 박정민이 연기한 식물학자 A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장소를 상징하는 <풍경>의 연장선으로 보입니다. 당시 <풍경>은 당신이 10년 만에 붓을 잡고 그린 대형 회화로,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요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경원 경기도 파주시 대성동에 위치한 ‘자유의 마을’은 남측 비무장지대 내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입니다. 그곳은 작가인 저희조차 접근할 수 없는 장소였죠. 실존하지만 도달할 수 없는 그곳을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한 점의 풍경화로 응축하게 되었습니다. 그 풍경은 상상된 자유의 마을이었고, 관객들이 전시장 한가운데서 그 이미지를 마주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도 여전히 전준호 작가와 함께하는 미디어 아트를 비롯해 개인 작업인 <프라미스 파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회화를 시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렇게 기존 작업을 다시 꺼내거나 새로 그리며 풍경화라는 명제를 사유해 보았습니다. 어딘가에서 볼 법한 익숙한 풍경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하퍼스 바자 당신의 작업은 종종 특정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로: 도시풍경 숭례문>의 숭례문, <버블 톡>의 삼청동 윈도우 갤러리, <그린하우스>의 온실처럼요. 그렇다면 이번 연작도 ‘자유의 마을’이라는 장소성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을까요?

문경원 ‘자유의 마을’은 단순히 비무장지대와 그 안에 얽혀 있는 남북한의 이데올로기 같은 특정 시스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을 통해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시스템과 그 모순을 반영하고, 제도와 구조의 오류가 만들어내는 전지구적 현실을 반추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자유의 마을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연작의 배경은 실제 장소를 넘어,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할 법한 익숙한 마을이면서도 그 너머의 시간과 개인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풍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전통적인 회화사에서 풍경화가 현실을 어떻게 재현해왔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시도도 병행했습니다. 시작은 특정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이후에는 계절의 말미에 어울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골벽 같은 풍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죽음과 시작, 끝과 시작 사이의 찰나들이 녹아 있습니다.



하퍼스 바자 최근 윤율리 큐레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객관적인 리얼리티는 제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제스처만 남은 추상도 저에게 답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얼리즘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이미 2011년 영화 감독 이창동과의 인터뷰(<환>, 워크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죠. “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적인 태도는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주관적인 삶에서 좀 더 깊은 사색과 소통의 가능성을 생산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소프트 커튼> 연작에 대한 암시로 느껴집니다.

문경원 저는 어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현실을 그대로 담는 방식을 추구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서 심상이나 추상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죠. 저의 생각과 감각과 기억과 감정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듯하지만 사실이 아닌 풍경을 그린다는 점에서, 제 작업은 주관적 리얼리티를 담고 있는 풍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퍼스 바자 이번 연작에서 ‘커튼’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한자로 ‘막’이라고도 번역되지만, 막이 얇고 고정된 구조물이라면 커튼은 보다 쉽게 열어젖힐 수 있는 물체입니다.

문경원 커튼은 무대와 그 뒤편을 나누는 경계라는 점에서, 그 너머의 공간을 더욱 상상하게 만드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대로, ‘막’ 대신 굳이 커튼이라는 영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커튼이 열 수 있는 행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유연하게 변형 가능한 어떤 곳을 암시하는 ‘소프트 커튼’이라는 표현으로 확장되었고요.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제시하지 않더라도, 관객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감각의 세계를 상징하고 싶었습니다.


하퍼스 바자 이번 <소프트 커튼> 연작은 네 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형 회화 <소프트 커튼_자유의 마을>을 중심으로 <화이트>, <잔상>, <나무>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화이트>에서 나뭇가지 위에 두텁게 쌓인 눈은 그 자체로 겨울입니다. 죽음 혹은 종말은 당신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지만, 겨울은 봄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유난히 희망적입니다.

문경원 종말이나 죽음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전제로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유용한 키워드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하나의 페스티벌이죠.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념일이죠. 말씀하신 대로, 겨울은 세계의 마지막 모습이자 시작의 암시입니다. 저는 언젠가 겨울의 앙상한 가지를 삶의 골격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뼈대로 비유했을 때, 그 위에 살짝 내려앉는 강설은 저에게 삶에 대한 또 다른 커튼처럼 느껴집니다. 눈은 아름답지만 금세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눈을 바라보며 눈이 사라졌을 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눈이 내려 그 모습을 덮어도 결국 언젠가 삶의 가지, 세계의 본질이라는 실재가 드러나는 법이죠.


문경원, <소프트 커튼_화이트 IV>,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화이트 IV>,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화이트 III>, 2025, 캔버스에 유채, 117 x 8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화이트 III>, 2025, 캔버스에 유채, 117 x 8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하퍼스 바자 《서울 웨더 스테이션》의 돌이나 《경로: 도시풍경 숭례문》의 숭례문처럼, 이번 연작의 나무는 시간의 퇴적을 기억하는 유구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특히 <나무>는 그런 기억을 품고 서 있거나 쓰러져 있는 한 명의 사람처럼 느껴지고 <잔상>은 객관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 시간에 대한 은유처럼 다가옵니다.

문경원 <나무>는 저 자신을 투영하듯 그린 존재들이에요. 《사물화된 풍경》에서도 사람 형상이 나무를 이고 있는 드로잉 연작이 있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처럼 비인간의 시점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한 그루의 나무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작업이 전개된 것 같아요. <잔상>은 색이 사라진 듯하거나 지워진 듯한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물이 차오르며 풍경이 서서히 사라지는 장면이 겹쳐져 있습니다. 물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흐르는, 움직임을 전제로 하는 요소인데, 그것이 정지된 풍경 안에서 정동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의 흔적이 바로 <잔상>입니다.


문경원, <소프트 커튼_나무 II>, 2024–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나무 II>, 2024–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나무 I>,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나무 I>, 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하퍼스 바자 이번 연작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매체가 영상이든 카펫이든 회화이든 언제나 노동집약적인 작업을 지향하는 듯 보여요. 이를 ‘직조’라는 행위에 빗대어 종종 설명해왔습니다. 예술에 수고로움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믿나요?

문경원 테크네의 어원처럼, 저는 예술에서 기술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단순히 테크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노동과 시간이 어떻게 예술에 어떻게 스며드는가에 대한 이야기죠. 점을 하나하나 찍거나 형식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이나 주석이 없더라도, 작가의 수고가 동반된 작업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에도 과도할 만큼 공을 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수고로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비유는 바로 직조입니다. 직조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하나 만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펼쳐지는 어떤 것이죠. 실제로 디지털 편집이나 조작 방식에서도 직조를 연상케하는 코드가 매우 많습니다. 풍경화 또한 그렇습니다. 결국 시간과 공간의 그리드 위에 펼쳐지는 하나의 직조 작업이에요.


하퍼스 바자 2022년에 한쪽 눈에 시력 손상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시각 예술가로서는 커다란 시련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본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문경원 회화를 다시 시작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영상 작업을 하면서 어두운 공간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망막에 이상이 생겨 시력이 거의 상실된 상태였고, 무리할 경우 영구적인 손상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휴직했고, 몇몇 전시는 취소하게 되었죠. 그로 인해 놓친 기회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잠시 멈추고 쉬어갈 수 있는 기회였어요. 책은 오디오북으로 읽었고, 시나리오는 보이스 레코딩으로 썼습니다. 메신저도 거의 사용하지 않다 보니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이 지금 돌아보면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은 시각 이론을 물리적으로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세상이 얼마나 시각 중심의 인터페이스로 작동하는지를 절감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살면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디어 아트를 가르치지만, 이 감각이 어디까지 확장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했던 것 같아요. 예술이 다양한 감각을 포섭하려 하지만, 여전히 그 중심에는 시각이 있습니다. 결국 그림도 눈을 감고는 볼 수 없잖아요. 조각은 손끝에서 나오는 촉각의 표현이지만, 그조차도 감상은 시각을 통해 이뤄지죠. 이 경험이 ‘보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하퍼스 바자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회화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당신은 영상, 프로그래밍, 컴퓨터 그래픽 등 다양한 매체를 다뤄왔기 때문에 전통적인 회화를 다시 만났을 때의 감회도 남달랐을 거라 짐작합니다.

문경원 학생들도 자주 묻습니다. 회화가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중세 시대에는 작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전면에 크게 그렸다면, 근대 이후에는 원근법을 활용했어요. 한때는 디지털 이미지처럼 표면이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회화가 유행했고, 또 한때는 붓질이 살아있고 질감이 풍부한 회화가 선호되었죠. 저는 이러한 모든 현상이 동시대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회화가 전통적인 매체일지라도 그 방식이 달라졌다면, 그것은 다른 회화입니다. 오늘날의 회화는 과거의 회화와 분명히 달라요. 최근에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밀도에 대한 감각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작업은 사진으로 담을 때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큰 작업은 사진에 담기면 그 맛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요. 어쩌면 큰 그림은 디지털 시대를 역행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큰 그림이 가진 ‘현존성’이 오늘날의 회화를 과거와 다르게 만듭니다. <나폴레옹 대관식>과 같은 거대한 회화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림 앞에는 보통 의자가 놓여있잖아요.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 머물라는 듯한 메세지가 느껴지죠. 그래서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보는 행위가 상대적으로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모나리자가 인쇄된 머그컵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아무도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원본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줄을 서요. 인스타그램 같은 이미지 중심의 플랫폼이 일상화된 만큼, 오히려 오늘날의 회화는 현존성이 강해지고 나아가 정동성이라는 강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멈춤 안에서 움직임을 연상하고, 해석하며, 상상의 문을 열게 됩니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기입되는 미디어와 반대되는 지점이라 더욱 매력적입니다.


문경원, <소프트 커튼_화이트 I>, 2024–2025, 캔버스에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문경원, <소프트 커튼_화이트 I>, 2024–2025, 캔버스에 유채, 140 x 140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갤러리현대 제공.


하퍼스 바자 아트 듀오로서 전준호 작가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도 계속됩니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습니까?

문경원 잃어버린 계절을 소재로 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계절을 알지만 앞으로의 세대는 개구리의 울음소리로 봄을 떠올릴 수 없을 거예요. 봄과 가을이 사라지면, 먹거리, 꽃, 옷처럼 그 계절과 함께했던 모든 감각이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잃어버린 계절, 특히 봄과 가을을 시적으로 추적하고 발굴하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먼 미래의 사람들이 2025년에 존재했던 봄과 가을을 알게 된다면, 지구의 파멸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합니다.


하퍼스 바자 극장 상영을 목표로 한 영화도 준비 중이라죠.

문경원 2026년 개봉을 목표로 오는 9월에 촬영을 시작할 것 같아요. 지금은 화이트 큐브냐 극장이냐의 구분 없이,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예술가가 활동할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중세 시대의 예술가들은 거의 주술사와 같은 존재였잖아요. 미켈란젤로도 해부학과 수학을 공부했죠. 2012년 카셀 도큐멘타에서 전준호 작가와 <세상의 저편>을 선보였을 때만 해도 ‘이것이 예술인가’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당시엔 예술가는 혼자 작업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고, 콜렉티브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어요. 공동 작업이라 하면 누가 몇 퍼센트를 기여하는지, 크레딧은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한 질문이 뒤따랐죠.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콜렉티브가 유행처럼 많아졌죠. 시대가 바뀌었어요. 앞으로의 예술가들은 음악도 하고, 영화도 만들고, 유용한 도구라면 AI도 활용하게 될 겁니다. 매체적 확장은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고,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혼합하여 자신의 언어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시대니까요. 저 역시 언제까지나 그런 예술가 중 한 명이고 싶습니다.

Credit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김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