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로 맛나분식
떡볶이는 흔히 하찮은 음식의 대표격으로 폄훼된다. 불량식품으로 몰렸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드는 떡볶이라면 어떨까. 쌀떡은 방앗간을 대놓고 일정한 굵기와 품질로 매일 받는다. 엿기름에 숙성시켜 부드럽게 만든다. 양념의 시작은 봄동을 얹어 밥을 짓는 것이다. 배추의 단맛이 밥에 밴다. 여기에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섞고 물 대신 육수로 감칠맛을 더해 양념장을 만든다. 말하자면 매번 약식으로 고추장을 만드는 셈이다. 육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모든 떡볶이집이 그러하듯 육수라면 지당히 오뎅(어묵이라고 쓰면 그 맛이 안 난다) 국물의 육수다. 육수도 유별나다. 진하다 못해 검붉은 색이 난다. 육수 재료로 여수산 멸치를 쓰는데, 말 그대로 한가득 넣는다. 청양고추도 제법 들어간다. 결코 깎아 내릴 수 없는 것이 성의다.
맛나분식 김귀엽 씨는 올해로 68세. 단단한 인상이다. 평일에는 대여섯 시간만 잔다. 3시에 일어나 4시면 집을 나선다. 심야버스가 출근 버스다. 32년째 종로3가 5호선 쪽 후미진 골목에서 떡볶이를 팔고 있다. 튀김도 하다가, 손이 많이 가 내려놓고 떡볶이와 오뎅, 김밥에 순대만 판다. TV 방송 등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주변 직장인에 떡볶이 애호가까지 손님이 늘었다. 꼭두새벽에는 김밥이 1백 줄 이상 나가고, 점심부턴 떡볶이와 김밥이 고루 나간다. 떡볶이나 매한가지로 김밥도 재료 하나하나 손 안 간 데가 없다. 몽고간장에 졸인 햄이 메인으로 들어간 옛날 스타일 김밥인데 떡볶이와 쌍끌이다. 음식은 방송 전이나 후나, 똑같이 해서 똑같이 판다. 방앗간, 엿기름, 멸치, 고춧가루. 무한반복이다. 아침 나절엔 딸이 나와 일을 돕고 1시면 퇴근한다. 아이가 있어서다. 전엔 며느리가 나와 일을 도우며 배웠다. 외곽으로 이사 나가며 딸이 역할을 이었다.
오빠 둘 육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서울서 시댁살이를 했다. 집 안에만 있을 기개가 아니라 밖에 나왔다. 장사 경력 40년째다. 종로 거리에서 좌판 놓고 장사할 때도 있었고, 광화문에서 멀쩡한 식당을 한 적도 있었다. 손맛을 보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전라도 출신. 독특한 조리 과정은 그저 “이리저리 해보다가” 추구하는 맛을 낼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셰프들이 메뉴 개발하는 것과 비슷하다.
굳이 떡볶이 하나를 그토록 번잡스럽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손에 익어서 괜찮아.” 짐짓 너그러워 보이지만 후계에 대해선 걱정이 있다. “눈으로 보면 못해. 직접 해야 배울 수 있는데….” 맛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단맛이 음전하고 짭짤함도 거칠지 않다. 감칠맛은 깊숙한 곳까지 두툼하게 들어오고, 뒤에서 육수의 청양고추가 탁 친다. 뭇 떡볶이가 어찌 되었건 간에, 맛나분식만이 내는 귀중한 맛은 성실과 신념으로 평생 낸 결과물이다. 그러니까, 아무 떡볶이나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서촌 영광통닭
딸 염은진 씨는 1986년생. 영광통닭은 1984년 개업했다. 태어나서부터 통닭집 딸이었다. 서촌 토박이다. 그 어머니 박선녀 씨가 1대째라 할 수 있다. 단정하지 않는 것은 이 통닭집이 박선녀 씨가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는 친척이 하던 통닭집이었다. 상호를 바꿀 이유도 없이 통닭집을 넘겨받았다. 부부가 함께였다. 남편은 배달을 하고, 부인은 닭을 손질하고 튀기고 통닭도 팔고 생닭도 파는 그런 흔한 동네 닭집. 아버지는 14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후로 배달은 하지 않고 오로지 포장만 해갈 수 있다.
영광통닭을 하기 전엔 이 부부도 별일을 다 했다. 20대에 서촌에 정착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네 개 1천원 하는 접시를 팔기도 했고 연탄을 배달하기도 하고, 지하도 위에서 노점도 해봤다. 동네 밖에서 찾아올 정도로 꽤 유명해진 지금까지도 영광통닭은 동네 장사나 다름없다. 대구의 치킨 명가들처럼 전국적인 프랜차이즈가 되지도 못했고, 어디 방송에서 떠들썩하게 소개된 적도 없다.
9호 아니면 10호 닭을 쓴다. 1kg 남짓하다. 치킨으로 튀겨 먹기에 적당한 크기다. 육질이 야들야들하고 살집도 섭섭하지 않다. 튀김옷이 파삭파삭하게 붙어 있는 스타일이다. 매일 생닭을 치고 너무 짜지 않은 농도로 염지하고, 생강이며 소주를 넣고 반죽도 쳐서 예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치킨을 튀긴다. 강원도 인제가 외가다. 틈만 나면 내려가 밭농사를 짓는다. 고추를 키워 일 년 내내 쓸 고춧가루를 빻기도 했는데 이제 감자가 주된 작물이다. 영광통닭은 치킨 한 마리에 두툼한 감자튀김과 닭똥집을 섞어준다. 분이 많이 나는 포슬거리는 감자를 바로 까서 치킨과 함께 튀긴다. 닭똥집은 야박하지 않을 정도로 몇 줌 섞어주는데, 감자와 닭똥집은 1만원치를 추가로 주문해도 된다. 눈치 좋은 단골들은 3천원치 하는 식으로 조금만 추가해 사 가기도 한다. 치킨 못지않게 인기 좋은 메뉴다.
염은진 씨는 시간날 때마다 통닭집에 나와 어머니 일손을 돕는다. 대학에서 호텔 경영을 전공했지만 통닭집 대를 잇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당장은 따로 하고 있는 일이 있지만 대를 이어야 한다고 당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 어머니 역시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손님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앉아서 먹고 갈 수 없다는 것. 갓 나와 김이 모락모락할 때 맥주 한 잔 곁들이면 참 좋은데 말이다. 맥주도 마실 수 있는 근사한 가게로 영광통닭 시즌 2를 시작할 궁리를 하고 있다. 물론, 서촌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역전회관
노포는 게을러 보이기 쉽다. ‘이전 세대가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는 것이 밖에서 보는 생각이고, ‘이전 세대가 하던 대로 하는 게 더 힘들다’는 게 후계들의 생각이다. 오래된 집들은 괜히 일을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맛에 대한 고집이 있어서, 효율적이라고 하는 요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덕분에 흔들리지 않는 맛을 인정받는다. 후계로서는 죽을 맛이다. 벅차다고, 대개가 말한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 보니 게을러 보이기가 쉽다는 것이다. 역전회관 4대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1대 증조할머니는 순천에서 식당을 하면서 가양주를 만들어 팔았다. 그 전통을 4대 신유경 씨와 신산호 씨 남매가 이었다. 각각 팀장, 대리 직함을 달고 역전회관에 출근하고 있다. 둘 다 아직 30대로 젊다.
장녀 신유경 씨는 미술을 전공했다. 영국으로 유학도 다녀왔다. 3대째인 어머니 김도영 씨와 의기투합해 한국 술을 배웠다. 시험도 보고 자격증도 땄다. 양조시설도 총 4층 중 1층 잘 보이는 곳에 마련했다. ‘역전주’를 출시했다. 바싹불고기를 비롯, 역전회관 메뉴에 페어링해 양조한 막걸리다. 도수가 일반 막걸리보다 살짝 높아 배가 과하게 부르지 않고, 말끔하게 뽑은 맛이라 음식 맛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감미롭게 어우러진다. 음식에 전통이 있는데 그에 걸맞은 술을 왜 진작 아무도 만들지 않았을까. 노포의 혁신이다.
아들 신산호 대리는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다. 나파밸리의 요리 학교에서 셰프 수업도 받았다. 과학적 조리에 대한 관념이 명확히 잡혀 있는, 요리사다. 4년 전 돌아와 바로 역전회관 주방에 취업했다. 20년째 역전회관 주방을 도맡고 있는 전찬길 실장 아래다. 반죽처럼 뭉쳐놓은 바싹불고기는 석쇠에 펴가며 굽는 게 쉽지 않은데, 아직도 100점을 주지 않는 엄격한 상사다.
사실 역전회관은 3대째에서 명맥이 끊길 뻔했었다. 용산 재개발 후 현재의 염리동 자리에 오기 전이다. 3대째 아들인 신한식 씨의 고려 중엔 폐업이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무거운 책임감으로 오래 하다 보니 잠시 그로기가 찾아왔던 것. 아내 김도영 씨가 소매를 걷어붙여 역전회관은 제2의 전기를 맞게 됐다.
“정체돼 있다고 느끼던 때에 아이들이 들어오면서 공기가 달라졌어요. 아이들 시선으로 바뀌어가고 있죠. 아이들이 싱싱하게 가지를 펼쳐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3대로서 저희의 역할이죠.” 김도영 씨와 신한식 씨는 4대를 위한 든든한 기둥이 되는 것이 3대째의 사명이라 여긴다. 역전회관은 1928년 순천에서 평범한 식당으로 개업해 4대까지 대를 잇고 있다. 9년 후면 100주년. 아무튼 오늘도 역전회관은 만석으로 밤을 보낸다.

태극당
태극당은 1946년 명동에서 시작해 1973년 현재의 장충동 자리로 본점을 옮겼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태극당 최고의 전성기. 직영점 7곳을 운영했고, 예식장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남양주에 목장을 두고 빵과 과자에 들어갈 우유와 달걀도 자체 생산했다. 한동안 잠잠했다. 가게는 대를 이었지만 손님은 대를 잇지 않았다. 그저 낡고 오래된 빵집으로 남을 뻔했다. 2014년 리뉴얼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진. 네 남매가 모두 태극당에 매달렸다. 대대적인 리뉴얼이었다. 서체를 개발하고 전문적인 브랜딩을 입혔다. 공장(주방이라고 하지 않고 공장이라고 한다) 시설을 개비했다. 태극당은 새로운 무엇으로 자신을 바꿨다. 활발하고, 젊다. 단 5년 사이에 가게의 공기가 바뀌었다. 대를 이은 손님도, 새로운 손님도 태극당을 찾아온다. 많은 것이 새것으로 개비되었지만 사람은 그대로다. 노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재는 척도 중 하나가 직원들의 근속년수다. 1974년 입사한 이성길 공장장, 1968년 입사한 김영일 부장, 1966년 입사한 한청수 부장이 빵공장 곳곳에서 현직으로 일하고 있다. 날랜 손놀림은 고인 물이 썩지 않고 숙성되었음을 잘 알려준다.
사워도 빵이며, 프티갸토니 하는 요즘 것들을 태극당이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태극당은 등줄기를 곧게 펴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속한 시장은 여기다.” 태극당의 경쟁력은, 새로워졌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태극당 그 자체다. 태극당에서는 현재 130~150여 종의 빵과 과자를 매일 만든다. 그 중 구닥다리 옛날 것이 아직도 있나, 싶은 것은 모두 도태되지 않은 현재의 옛것이다. 누군가 사 가고 있으니 만든다, 단순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