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꿈의 정원 프로젝트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평생 예술의 시선으로 세상의 본질을 응시해온 최재은의 DMZ 프로젝트 <자연국가: 대지의 꿈>은 그녀의 삶과 시대를 관통한다. 지금 도쿄 하라 미술관에서는 역사와 자연, 인간이 일군 역설의 시공간인 DMZ의 꿈이 가없이 만개해 있다. | 전시,전시회,건축,미술,예술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과연 현실화될 수 있을까요?”3년 전 최재은 작가와의 첫 인터뷰를 장식한 나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녀가 이라는 DMZ 프로젝트로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공표한 직후였고, 베니스는 건축가 시게루 반과 함께 DMZ를 진정한 ‘꿈의 정원’으로 만들고자 청사진을 공식 발표하는 무대였다. 철원 궁예도성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연결하는 20여km의 보행로 ‘공중정원’, 정자와 탑, 생명과 지식의 저장소, 생태계를 이루는 재래종의 치유, 이를 위한 지뢰제거안 등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상 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해 보였기 때문에, 도리 없이 나의 시선은 꿈의 실현가능성 여부에 고착됐다. 어쨌든 맥 빠지고 즉물적인 우문에 대한 최재은의 현답은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의구심이 들 때마다 짤막한 글귀를 읽어요. ‘무엇이 두렵습니까! 빛이 있고, 물이 있고, 바람이 부는데요!’ 물론 현실화된다는 전제하에서 밀어붙이기는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꿈을 꾸는 거죠.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진화해가는 자체가 작품이에요.” 그런 점에서 현재 도쿄의 하라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7월 28일까지)은 2015년부터 진행해온 프로젝트를 미술전시로 우선 소개하는 자리이자 ‘진화’의 최초의 결과물이다. 검박하고도 고아한 하라 미술관에서 다시 만난 최재은이 일행을 반기며 말했다. “그야말로 꿈을 꾸자고 시작한 프로젝트가 하나의 전시로 정립되어 선보인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고, 특히 여러 분들에게 매우 감사해요.” 수많은 ‘여러 분들’ 중에서도 최재은의 예술적 비전을 신뢰하고 동참, 프로젝트를 성장시킨 20여 명의 예술가, 건축가, 생태학자, 과학자들의 존재가 그 중심에 있다. 시게루 반, 승효상, 조민석, 정재승, 가와마타 다다시, 김태동, 이불, 이우환, 스튜디오 뭄바이, 올라퍼 엘리아슨 & 세바스티나 베흐만 등의 다채로운 작업이 미술관 곳곳에서 ‘현실화’되어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최근에는 중국의 건축가 장영호가 합류, 새로운 정자 디자인을 내놓을 예정이다.) 최재은을 포함한 이들의 존재는 이번 전시가 DMZ를 둘러싼 박제된 정치사를 사실적으로 톺아보는 게 아니라 예술가의 시선과 상상으로 진행 중인 스토리라는 방증이다.불과 몇 시간 전, 나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 현해탄 상공에서 DMZ라는 경계를 생각하고 있었다.1953년 7월 27일 정전 당시 남북이 전투경계선에서 2킬로미터씩 물러나 설정한 ‘완충지대’인 동시에 ‘비무장’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 인간의 명분과 탐욕이 낳은 비극적 지대인 동시에 역사도 변명도 모두 흡수한 채 침묵하는 무중력의 공간. 매설된 지뢰 사이 숱한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 곳. 사회화가 더디게 이뤄진 생태계인 동시에 유일하게 총성, 바람 소리, 꽃향기, 발굴 못한 유해, 지정학적 역학관계 등 숱한 레이어가 복층으로 쌓인 역설의 땅. 한반도의 분단 및 분쟁 상황을 생득한 우리로서는 DMZ를 존재하되 부재한 가상의 땅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작가가 인용한 영국 소설가 T.R 페렌바흐의 소설 (1963)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더 이상의 전쟁도 없지만, 더 이상의 평화도 없는 곳.”그러므로 하라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자연국가’의 풍경은 무정한 역사에 갇혀 관념에 머물러온 DMZ의 존재, 지도에는 있지만 닿을 수 없었던 곳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실제 두 눈으로 보고, 인지하고, 감각하고, 경험한다는 건 이 땅의 오늘을 사는 나의 존재, 나의 삶과 직결되는 일이다. 각각의 전시장이 독립된 영토처럼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튜디오 뭄바이가 인도 전통건축 방식을 활용, 나뭇가지를 엮은 정자는 동서남북, 땅과 하늘 모두에 열린 구조로 어떤 경계나 중력에도 얽매이지 않는 풍경을 만든다. DMZ를 깊이 가로지르는 철원 터널을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생명과 지식의 저장소’로 제안한 조민석의 전시장 바닥에는 지도가 꽉 차게 깔려 있는데, 지도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밟다 보면 새로운 차원의 땅을 밟는 듯하다. 올라퍼 엘리아슨과 세바스티나 베흐만의 정자 ‘물방울 파빌리온’은 메시 소재의 원형 구조물 너머로 일대의 수목, 공기, 바람, 수분 모두를 끌어안으며 날씨나 보는 각도에 따라 느낌을 달리한다. 시게루 반이 실제 크기의 절반으로 만든 구조물은 미술관 정원에 솔 르윗의 작품과 함께 서 있었는데, 바람이 대나무 잎으로 내는 청량한 소리가 들린다. 승효상의 ‘새들의 수도원’, 디스토피아도 유토피아도 아닌 그 세상에서 울려 퍼지는 오라토리오는 내 마음을 어루만진다. 특히 최재은의 신작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는 감각과 경험의 수위를 고도로 증폭시킨다. 그녀는 DMZ 경계선 지역의 철조망을 녹여 여러 개의 조각으로 만들었고, 바닥에 깔아 밟고 지나다닐 수 있도록 했다. 물리적 경계인 DMZ는 또한 국가와 국가주의에 얽매인 추상적 경계였다. 이 사물을 물리적으로 녹여 없앰으로써 최재은은 추상의 경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꿈을 담아 누구나 한 발씩 내디딜 수 있는 징검다리로 만들었다. 뒤로는 철조망을 녹여내는 영상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앞에는 김태동이 포착한 DMZ의 정적인 밤하늘 사진이 걸려 있다. 옆에는 불행히도 어떤 ‘징검다리’도 없이 너무 먼 길을 와 버린 남북 분단의 사연이 아카이브로 자리한다. 조명에 반사된 징검다리 조각의 표면이 천장에 강물처럼 어른거렸고,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로 뒤섞였다. “철조망을 녹여보니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이 물체를 절대적 경계로 삼아 많은 시간을 농락당한 것 같아요. 나는 그 끔찍한 걸 기념비로 상징화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어요. 오히려 자유롭게 밟으며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카펫을 떠올렸죠. 누군가의 집 입구에 하나씩 깔아두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올려보는 게 아니라 발 밑으로 가야 했어요. 베를린 체크포인트 근처 바닥의 선을 누구나 넘나들게 되었듯 말이죠.” 최재은의 의도는 작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에서 목격한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DMZ 일대,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불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전하는 바람은 벽이 막는다고 막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움직임을 막으려 해도,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은유적이에요.”경계에 대한 최재은의 사유 혹은 DMZ 프로젝트는 2014년 ‘리얼 DMZ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인간의 경계, 자연의 경계에 대한 네온 작품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1999년 독일 통일 10주년 기념으로 만든 에 닿는다. 20세기에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부질없고 무자비한 경계에 대한 이 이야기는 당시 아홉 살인 문근영의 모습과 함께 아우슈비츠부터 베를린, 한국의 판문점에까지 이르는 풍경을 담고 있다. 최재은은 자신의 말대로 “한 번도 DMZ와 경계의 문제와 단절된 적이 없었다.” 실제 작품들의 존재와 함께 이 프로젝트가 발화 후 어떻게 성장해왔는지에 대한 결정적 증거는 바로 제목이다. 당시 ‘꿈의 정원’이었던 제목은 ‘대지의 꿈’으로 바뀌었다. 물론 번역 과정에서의 뉘앙스 차이일 수 있지만, ‘자연국가’라는 단어에 힘입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꿈의 정원’의 꿈의 주체가 인간이라면, ‘대지의 꿈’의 꿈의 주체는 자연이다. 최재은은 금단의 땅에 방치된 염원, 가능성, 희망을 길어 올리되, 죽음의 땅으로 전락한 DMZ가 인간들이 물러선 후 서서히 되살아난 자연 그 자체임을 분명히 상정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공동의 미래’를 향해 있음을 말한다. “DMZ는 생태계의 보고이면서도 무자비한 군사 작전으로 황폐화된 곳이기도 해요. 즉 치유의 공간입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장소를, 오랫동안 깃들여 있던 평화를 생명이라는 귀중한 존재를 통해 찾아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봐요.” 문득 2017년 가을 서울에서 열렸던 심포지엄에 참석, 이 프로젝트에 힘을 실은 의 저자 앨런 와이즈먼이 떠올랐다. 그는 DMZ를 “비극이 기적을 낳은 곳”이라 표현했다.하라 미술관의 마지막 방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공존법을 제안하는 시적 은유로 방점을 찍는다. 시각적 조형물뿐 아니라 생태계 연구에도 오랜 시간을 투자한 최재은은 DMZ에 서식하는 101개의 멸종위기종의 이름을 새긴 101개의 세라믹 조각을 거울 위에 설치한 ‘이름 부르기’를 선보인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모두를 비추는 우주를 상징한 거울 위에 조각을 하나하나 가져다 놓는 모습을 일종의 의식처럼 촬영한 영상은 이 존재들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애정을 갖고 이들의 호명하는 행위와 태도가 선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 존재들과 가까워지려면, 그 메커니즘 안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그들을 존중해야 하니까요.” 최재은은 조만간 ‘네이밍 퍼포먼스’를 열 예정이라고, 또 통독 직전 베를린 장벽에서 역사적 공연을 한 데이비드 보위를 언급하며, 이번 DMZ 프로젝트에도 환경운동에 뜻을 둔 뮤지션과 함께 작업할 계획이라 귀띔했다. “이 프로젝트가 나름의 내용을 충실히 다녀가고 있는 걸 보면 어쩌면 꿈에 그치지 않겠구나 싶어요. 현실에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만큼 이상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 공존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들어요.” 최재은이 지난 2년 동안 프로젝트의 현실화를 가정(혹은 대비)해 실질적인 운영 매뉴얼을 정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국가’의 하루 방문자 수 및 방문 시간을 엄격히 제한하고, 모든 방문자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하여 쓰레기가 배출되지 않게 하는 순환 시스템이다. 주먹밥, DMZ에 던질 씨앗 하나,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 타월 하나, 끈 의자 하나. 이 정도면 8시간을 견디기엔 충분하다.처음 이 프로젝트가 탄생한 시절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에 격세지감이다. 허구한 날 남북의 첨예한 대치 상황과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일상에 기본사양처럼 탑재되어 있던 시절을 지나, DMZ의 평화둘레길 개방 소식과 참여를 독려한다는 뉴스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정치적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묵묵히 이끌어온 최재은은 현 상황에 대해 조심스럽게 첨언한다. “지금 DMZ의 운명이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방식이 더 좋다는 문제가 아니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DMZ라는 황금알 낳는 거위를 어떻게 개발할까보다 이토록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공간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충분한 고민이 우선해야 합니다.” 영상에서 본 바, 승효상의 의견은 DMZ가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연구할 만한 대상이라는 최재은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지난 66년 동안 자연이 일구어온 위대한 과정이 담긴 이곳을 우리 인간이 개발할 능력이 있을까 생각하면 매우 회의적입니다. (중략) 전 영구적인 설치물을 반대합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허물어지고 사라져 기억만 남는 장치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1988년 백남준이 ‘무제(DMZ는 호랑이 농장이 되어야 한다)’를 내놓을 때, 이렇게 DMZ를 둘러싼 ‘위태로운’ 국면을 앞질러 걱정해야 하는 오늘을 예측했을까? “DMZ는 호랑이 농장이 되어야 한다. 1.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2. 생태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 3. 침입자를 먹어치우기 위해.”라는 백남준의 제안은 우리에게 꽤 뼈아픈 농담이다.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 때문에 종종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최재은이 각국의 학자, 예술가, 문인에게 받은 짧은 문장 중에서도 단연 젊은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국가와 자연’이 인상적이다. “자연은 국가를 모른다. 나의 이름도 모른다. 다만 그 큰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삼키고, 하나의 자연으로 만든다. 지구가 탄생한 지 46억 년이 지났다. 나는 수만 년의 엇갈림으로 눈앞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나무를 만지고 있다. 왜 그 46억 년의 시간 속에서 나는 이 나무와 같은 순간에 존재하는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글이 최재은을 울릴 수 있었던 건 그녀 자신이 지난 30년 넘도록 자연, 시간, 우주 등 세상을 구성하는 절대적 요소, 그 유구함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의 땅에 종이를 묻고 지질학적 연대기를 탐구한 , 최초의 인류 화석이자 여성 ‘루시’를 통해 현 시대를 회고한 , 미래를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아소카 왕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 우주에서 대지로 연결되는 시간을 노래한 등 최재은은 존재를 관통하는 ‘오래된 시간’에 몰두해왔다. 그러므로 무한한 시간 속 유한한 인간을 살피며, 예술의 시선으로 삶의 본질을 응시해온 그녀에게 은 필연적인 작업이자 ‘라이프워크’다. 그녀는 “전쟁과 파괴로 얼룩진 한국의 DMZ가 6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름다운 자연으로 환원된 건 바로 우주의 본성이 생명과 미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믿는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무한히 연속되는 것’임을 피력해온 그녀에게 DMZ 역시 과거에서 미래로 가없이 연속되는 대상이며, 이 프로젝트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누군가의 도움 없이 하나하나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작품 하나 팔리면 한 발 더 나아가는 식이었죠. 모든 과정에 작가의 신념과 어쩌면 그 이상이 필요한 실로 에너제틱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각오를 했었어요.” 그리고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한 뼘 더 솔직해졌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될 때 그곳에 있었어요. 자의도 타의도 아닌, 형언할 수 없는,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거대한 환희와 감동이었죠. 매일 베를린 시내를 걸으며 울었어요. 그러한 감동을 내 나라에서 재현하고 싶다는 강한 무언가가 내 안에 깊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걸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통독의 현장을 경험하고, 평생을 일본에서 이방인을 자처하며 긴장감으로 스스로를 벼린 그녀는 여전히 고국을 바라보고 있다. “정치와 예술의 영역은 엄연히 달라요. 우리가 정치를 할 수도, 현실을 쉽게 바꿀 수도 없겠지만 다른 차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공유할 수는 있다고 봐요. 그래서 예술이 중요한 거겠죠?” 지난 4월 말 하라 미술관에서 열린 의 기자간담회에는 현지 기자 70여 명이 참석했다. 첫 주 일요일에만 5백여 명의 관람객이 찾았다. 도쿄대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토론을 했다. 신문은 모국에 대한 어쩌면 슬픈 이야기를 절제해 펼쳐 놓은 이번 전시를 두고 “증오를 극복하는 강한 의지, 조용한 기도, 한반도 사람들의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는 평을 썼다. DMZ와 같은 해 태어나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 최재은은 그렇게 오늘이라는 시대를 산다. 세상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숙명처럼 떠안은 작가로서, 작품이 잘 팔리고 아니고를 떠나, 유명하거나 무명이거나 하는 경계를 초월해 자신이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영상 속 시게루 반의 말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최재은의 굳은 비전은 나를 항상 감탄하게 하고 큰 영감을 선사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녀의 모국에 대한 마음, 평화 그리고 인류를 향한 희망을 바탕으로 해요.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최재은은 한결같이 견고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나를 움직입니다. 당신도 그녀의 아름다운 비전과 개념에 매혹되고 동요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이날 최재은은 일본의 현대 사진계를 일군 85세 노장 가즈미 구리가미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녀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하라 미술관을 등지고 걷는 골목길, 빛도, 물도, 바람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