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재의 마이크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세련된 풍자 감각과 높은 인권 감수성을 탑재한 코미디가 절실한 시국이다. 한국에는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이 있다. 작가냐, 방송인이냐, 도대체 뭐 하는 인물이냐는 질문은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이크 앞에 선 유병재가 말한다. | 유병재,코미디언,스탠드업 코미디

수염은 언제부터 길렀나? 한 10년 정도 됐나? 의 모든 캐릭터 중에서 강백호 친구 노구식을 제일 좋아해서 그의 수염을 따라 해보고 싶었다.에서 노구식이 제일 좋다는 사람은 처음 봤다. 강백호도 있고 서태웅도 있는데. 노구식이 불량배한테 맞다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너네 참 나쁜 놈들이구나!” 그리고 나서는 또 맞는다. 너무 멋지지 않나?유병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신의 약점을 감추지 않는, 인간미 있는 사람. 화를 많이 내고 무서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겁이 많은 것 같다. 자신의 약점을 쿨하고 유쾌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좋아한다.본인은 어떤가? 나 역시 방어기제도 있고 약한 부분을 들키지 않려고 할 때도 많다. 그런데 직업이 코미디언이다 보니까 자기비하라고 해야 되나, 자학 코드라고 해야 되나, 이런 걸 즐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친구가 없다거나 여자한테 인기가 없다거나 낯을 많이 가려서 누구랑 있어도 다 어색하다는 ‘약점’들은 코미디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많을수록 좋은 거다.진짜로 타격이 되는 약점이 아니기 때문 아닌가? 맞다, 스스로 타격이라고 느끼는 건 거의 없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백수로 지내시다가 늦게서야 철들어서 취직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가끔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안 웃는다.나라도 웃지 않을 것 같다.(웃음) 농담에 실패했을 때의 대처법이 있나?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가끔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웃어주지 않으면 “이해 못했네” “수준이 안 맞네”라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다지 보기 좋진 않더라. 그래서 나는 그냥 조용히 있는다. 마치 처음부터 농담이 아니었던 것처럼.를 보고 유병재의 스탠드업 코미디를 지속적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형식으로든 이를 지속해나갈 계획은 없나? 작년 말부터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준비 중이다. 어디서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상반기 안에는 하려고 한다. 공연을 하는 것도, 준비하는 것도, 대본을 짜는 것도 진짜 쉬운 일이 아니더라. 에 두 번째 출연했을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하다가 들어가고 싶었다. 15분이라는 시간이 길고 괴롭게 느껴졌다. 외롭기도 하고.윌 페럴도 스탠드업 코미디를 두고 “어렵고, 외롭고, 잔인하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공연도 처음이고 사람들 앞에 선 경험도 많지 않아서 겁나는 부분은 있다. 그래도 하고 싶은 건, 스탠드업이 코미디라는 장르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가 좀 멋있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형곤 선배님 이후로 스탠드업 코미디의 맥이 끊겼으니까, 나름대로 프런티어 같은 자부심도 들기도 한다.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마음이 더 크다.좋아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있나? 너무 많은데, 요즘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미국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Trevor Noah)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2~3년 정도 뜨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가장 큰 뉴스쇼를 맡고 있는데 코미디를 되게 잘 짜더라. 기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본인이 흑인 혼혈이라 인종 개그도 많이 한다. 이를테면 그가 태어난 남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은 흑인 여자랑 백인이랑 결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고 말이다. 인종 개그 할 때 흑인들은 흑인이라 차별 받는 걸 많이 이야기하는데, 혼혈인 그는 흑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각을 잡아서 코미디를 한다. 그리고 스탠드업 코미디는 아닌데, 기본적으로 콤비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 일본 코미디도 되게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통하기가 너무 힘든 것 같다. 선수들을 위한 코미디랄까?유병재의 개그도 10명이 있으면 10명 다 웃을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걸 좋아하는데, 그렇게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1백 명이 모여 있으면 5~6명으로 시작해서 하하, 하하하, 이렇게 점진적으로 퍼져 나가는 웃음이 제일 좋다. 웃음도 전염이지 않나. 아, 이래서 웃는 구나, 하면서 따라 웃게 되는 것. 그렇게 웃겼으면 좋겠다.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니까 “박수 치지 말아 달라”고 말하던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시국 비판 코미디로 주목을 받자 “관심병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눙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을 워낙 못 견디는 것 같다. 자기 검열이 코미디에 도움이 되나? 효율성으로 따지면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사실 자기 검열이 없는 게 편하다. 코미디라는 게 과장이고 비약이지 않나. 화끈한 맛이 있어야 되는데,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거나 하는 것에 겁을 많이 내는 편이라 스스로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런데 내가 편하기 위해서 덜어버려도 되는 부분은 아니고, 코미디를 계속하려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같다.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할 것인가? 최소한의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 콩트와 달리, 이 이야기도 하고 저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매력이다. 아마 거의 다 내 이야기일 거다. 완전히 자의식 덩어리니까.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에서도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해놓고 시국 비판 코미디를 했다. “워낙에 정치적 농담을 좋아한다. 요즘 같은 시국에는 어떤 걸 이야기해도 다 재미있으니 코미디언 입장에서는 뷔페에 온 느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큰 주제로 보면 요즘엔 분노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많이들 화가 나 있지 않나. 이 분노를 어디에 표출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를테면 가끔 웹툰이 늦게 올라올 때, 댓글창을 보면 별의별 욕이 다 있다. 물론 욕먹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더 크게 잘못된 일과 비교해봤을 때 분노의 세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오르는 거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설렁탕집 주인에게만 옹졸하게 욕을 하는가...’ 쓰고 있는 책을 2년째 못 끝내고 있는데, 얼마 전에 이 구절을 이용한 글을 썼다.코미디를 통해서 분노의 방향이 바뀌길 원하나? “이렇게 가자”, 이거는 절대 아니다. “이런 게 있는데, 재미있지 않냐?”, 이쪽이 나한테는 더 맞는다. 투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정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거니까. 공연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진짜로 아직 모른다. 대본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데 대본이 나왔어도 말하지 않았을 거다. 웃기려는 의도를 미리 들키면 웃기기가 너무 힘들어지니까.웃긴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은 좀처럼 웃지 않는 것도 더 잘 웃기기 위해서인가? 그럴 수도 있다. 두리뭉실한 충청도 출신이어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있다가 툭 던지는 개그 스타일을 좋아했다. 아닌 척하면서 ‘맥이는’ 것. 웃길 의도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잘 안 웃다 보니 성격도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손해를 많이 보고 있다. 크게 화나는 일도 없고, 크게 즐거운 일도 없고, 감정의 변화가 많지 않다.얼마 전 경향신문에서 본인이 인터뷰어가 되어 만나고 싶은 인물들을 인터뷰하는 코너 ‘유병재의 성덕일기’ 연재를 시작했더라. 현재 팟캐스트 진행자이자 래퍼 UMC,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웹툰 작가 이무기와의 인터뷰까지 진행되었는데 인터뷰이 선정이 흥미로웠다. 워낙에 좋아했던 분들이다. 혼자만 좋아하다가 일을 핑계로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고 있다. 섭외 문제가 있지만 만나고 싶은 분들이 많다. 드라마 을 쓴 김운경 작가님도 만나고 싶고, 드라마 의 박경수 작가님도 만나고 싶고. 근데 인터뷰라는 게 어렵더라.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보다 물어보는 게 훨씬 더 어려워서, 공부가 된다.미국에서는 코미디 작가가 ‘힙’한 직업이고, 1인 코미디 쇼의 인기도 높다. UMC는 인터뷰에서 “유병재는 주류의 트렌드에서 딱 반 발자국 앞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동의하나? 과거에 코미디언 시험을 본 적이 있다. 일종의 자격증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물론 실력의 문제로 떨어졌지만 어딘가에 소속되는 게 싫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한 것도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면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보다는 내 스타일대로 하는 게 낫겠다는, 같잖은 생각이었다. 그때의 선택이 나에게 좋게 작용했는지, 아닌지 아직은 판단이 좀 어렵지만 일단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내가 만들고 싶은 코미디에 대해서, 크게 관여 받지 않는다. 그래서 만족하고 있다.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즐겁나? 연기를 하는 것과 대본을 쓰는 것, 둘 다 좋지만 하나를 꼽자면 내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좀 더 즐겁다. 그런데 사실 대본도 쓰고 연기도 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가 아니라, 코미디언이면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이다. 나는 작가 타이틀이 더 앞에 있게 되어서, 그걸 색다르게 봐주시는 것 같다.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병재를 만날 때, 슬쩍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국적 예능 프로그램보다 유병재가 가진 것들을 더 잘 보여줄 매체가 있을 것 같아서다. UCC를 만들다 방송으로 넘어가고, 이제 공연을 준비하고 있으니 다양한 매체를 경험한 셈이다.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매체는 뭘까? 아직 공연 경험은 많지 않으니까 크게 보면 인터넷하고 TV인데, 일장일단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뿌리는 인터넷인 것 같다. 아직 젊으니까, 인터넷이 주 매체인 세대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 제한되는 영역이 크지 않은 것도 편하다.“아프면 환자지 뭐가 청춘이냐?” “어느 날 운명이 말했다. 작작 좀 맡기라고.” 등 주옥 같은 말들을 많이 남겼었는데, 요즘에는 왜 SNS를 안 하나? ‘유병재 어록’이 돌아다니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게 싫어서 안 한다기보다는 요즘에는 딱히 아이디어가 없다.(웃음) 책을 쓰고 있다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으면 거기에 쓴다.싫어하는 것, 엄청 많다. 죄다 싫어한다. 그게 좀 동력이 된다. 옛날에 좋아하는 걸 따라가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걸 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싫어하는 것들이 살아가는 자세나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됐다.YG에 들어간 이후에 “좋은 집에서 사니까 좋은 생각이 안 난다”라는 농담도 했는데 실제로 달라진 부분이 있나? 잘 모르겠다. 연예인으로서의 생명력이 길어지고 ‘회사빨’을 받는 부분이 있겠지만 사실 나의 생활은 비슷하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좋은 집에 살긴 하지만 돈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풍족해지지도 못했고, 딱히 돈 쓸 데가 없기도 하다. 아직까지 한 번도 돈 때문에 움직인 적은 없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가식이지만 조금 더 벌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을 하기보다는 지출을 줄이는 쪽이다.유병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잘난 척하려고’가 가장 큰 동기부여였던 것 같다. 나 이만큼 만들어냈어, 이만큼 웃길 수 있어, 하면서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직 경력은 짧지만 이제는 직업으로서 받아들이게 된 부분이 있다. 즐거운 것도 굉장히 많지만, 싫어도 해야 된다는 의무감이 있다. 개인적으로 ‘하기 싫어야 직업’이라는 직업론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싫어하는 것이 많은가? 엄청 많다. 죄다 싫어한다. 그게 좀 동력이 된다. 옛날에 좋아하는 걸 따라가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걸 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의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싫어하는 걸 피해온 것이 살아가는 자세나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