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작가 이민진이 새 소설 ‘아메리칸 학원’으로 돌아왔다
한국인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 ‘교육’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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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DUCATION
<파친코>의 저자이자, 이제는 문학계의 스타가 된 작가 이민진이 신작 소설 <아메리칸 학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가족과 소속감,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탐하는 데 따르는 대가를 탐구한다.
“찰스 국왕은 계단 아래쪽에 앉아 있었고, 카밀라 왕비는 그보다 몇 계단 위에 앉아 있었어요. 국왕이 왕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죠.”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이민진은 영국 왕실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두 사람을 전혀 모르잖아요. 그런데도 그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겠더라고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마음이 움직였어요.”
이건 이민진이 2024년 클래런스 하우스(Clarence House, 찰스 3세와 카밀라 왕비의 런던 거처)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의 소설 <파친코>는 카밀라 왕비가 문학의 효용을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만든 플랫폼 ‘퀸스 리딩 룸(Queen’s Reading Room)’에 소개될 예정이었다. 2017년 출간된 이 다세대 가족의 서사는 이민진을 단숨에 세계 문단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꼽았고, 27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책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후 애플 TV 시리즈로도 제작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왕실 거처에 도착했을 때 이민진은 약간의 경외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에겐 상대의 지위가 어떠하든 그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특유의 관찰력이 있다. 그보다 이민진이 영국을 방문해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건 자신의 삶을 일궈온 언어와 문학의 근원을 직접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민진에게 영어는 제2언어지만, 그는 영어가 지닌 정교함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영국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넓고 방대한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제가 사랑하는 이 위대한 언어의 고향으로 돌아와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건, 마치 모든 것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죠.”
이 일화는 그의 신작 소설 <아메리칸 학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30여 년에 걸친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인간의 도덕성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1992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고씨 가족(존과 헬렌 부부, 두 아들 보와 DH, 딸 미도)이 서울에 정착하면서 시작된다. 이 가족은 수년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아왔다. 일본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존의 직업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가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
저에게 있어 <아메리칸 학원>은 한 가정의 가장인 존의 이야기나 다름없어요. 존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야 했는지, 그럼에도 어떻게 사랑을 잃지 않는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미 게임의 규칙은 바뀌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존과 헬렌은 끊임없이 기준이 바뀌는 경쟁의 장에서 자신과 가족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애쓰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느 무책임한 동료가 자신의 불륜이 초래한 참담한 결과를 존의 탓으로 돌리면서 직장에서 해고되고, 가족의 형편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독자는 그때부터 이 가족을 단단히 묶어놓은 관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고씨 가족은 늘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민자라는 정체성이 그들의 위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서구에서 온 이방인으로, 미국에서는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나라 모두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교육 시스템을 헤쳐나가야 하고, 아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 속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이민진은 이를 통해 교육이 얼마나 엄격하고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는지 면밀하게 파헤친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이른바 한국의 ‘SKY’는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견줄 만한 궁극적인 목표다. 그 가운데는 한국 사회는 물론 해외 한인 사회에도 깊이 뿌리내린, 강도 높은 사교육을 제공하는 입시 기관 ‘학원’이 자리 잡고 있다. 존과 헬렌의 아이들 역시 학원에 발을 들인다. 종국에는 학원 사업이라는 모험에 뛰어들어 교육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소설의 중심에는 ‘교육이 자기계발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자리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사회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 자매 중 둘째인 이민진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뉴욕으로 이주해 미국의 명문 공립학교로 꼽히는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예일대학교에서 역사를,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변호사로 일했지만 스물여섯에 일을 그만뒀다. 건강이 크게 나빠진 데다 업무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작가가 되는 편이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렵고 고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과 <파친코>를 쓰는 데 각각 10년이 넘게 걸렸다. <아메리칸 학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소설의 씨앗은 그가 펜을 들기 훨씬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파친코>를 쓰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게 있어요. 제가 했던 거의 모든 한국 인터뷰에서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든 예외 없이 교육을 대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꺼냈다는 거예요. 한국은 교육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싶었죠. 물론 저도 그렇지만 그들은 교육을 단순히 사회적 이동의 수단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일종의 구원처럼 여겼죠.”
<아메리칸 학원>에서 언제나 고군분투하는 한 집안의 가장 존에게 가장 마음이 쓰인다고 말하자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저에게 있어 이 소설은 존의 이야기나 다름없거든요. 존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야 했는지, 그럼에도 어떻게 사랑을 잃지 않는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설의 도입부만 보면 존은 성공한 사업가다. 일련의 사건으로 경력이 망가진 뒤에도 그는 ‘슈림프 캐슬’이라는 패스트푸드점에 취직해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몫을 다한다.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것을 ‘성취’라 말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작품 속 다른 인물들은 존보다 훨씬 큰 물질적 부를 누린다. 존의 아이들 역시 그가 마련해준 토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며 아버지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고 산다. 존은 끝까지 사랑과 헌신으로 가족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길 자처한다.
법조계를 떠난 지 오래지만, 이민진의 집필 방식은 수년간 축적한 조사와 그 과정에서 모은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법조계의 일과 닮아 있다. 그는 조지 엘리엇, 토머스 하디, 찰스 디킨스가 써온 소설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으며, 가장 좋아하는 책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다. 그는 엘리엇과 디킨스처럼 글을 쓴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듯, 전지적 시점으로 아우르는 글을 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건, 이민진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제가 <아메리칸 학원>을 사회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이 담긴 책이라 말한다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개인의 주관적 생각을 넘어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책이라고 받아들일 거예요. 그렇다면 저는 분명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하냐?’는 식의 조롱을 듣겠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고요. 그럴 땐 내가 이 일을 스스로 선택했음을 되새겨요. 바꾸어 말하면, 저는 책을 위해 제 삶을 내어놓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다는 거죠.” 그의 말처럼, 작가가 책을 내는 일에는 분명한 위험이 따른다. <파친코>의 성공과 그에 따른 명성을 생각하면 와닿지 않는 얘기지만, 실제로 그는 영국에서 <파친코>를 출간할 때 출판사를 찾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 <파친코>는 문학의 정전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올해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아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가운데,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나는 속으로 이민진의 작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우리 주변 세계와 얼마나 깊이 관계 맺어왔는지를, 오랫동안 살아남을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그의 욕심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의미 있는 소설, 가치 있는 서사여야 하며, 인물들의 관계가 미국이 표방하는 가치들과 끊임없이 씨름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민진의 소설과 그가 대중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를 긍정하고 찬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시에 사람들이 공고하다고 여기는 사회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업의 일부이기도 하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뉴요커>가 ‘가장 좋아하는 미국인’을 한 명 꼽아달라고 했을 때, 그는 작가이자 활동가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를 선택했다. 그리고 로드가 쓴 어떤 문장이 자신을 말수 적은 이민자 소녀에서 미국인 작가로 바꾸어놓았다고 말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언어로 표현해 타인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았다. 행여 상처 입거나 오해받을 위험이 있더라도.” 오드리 로드의 에세이 <The Transformation of Silence into Language and Action>에 나오는 문장이다. 실제로 내가 본 이민진은 자신이 믿는 것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다. 의심스럽다면 그가 모교인 예일대학교에서 2026년 졸업생들에게 들려준 연설을 들어보길. “평범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고, 모르는 것이 있다면 계속 배우며, 자신에게 맡겨진 몫의 일을 해내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나가세요.” 이건 그가 늘 해온 일이다.
작가가 된 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에요. 바꾸어 말하자면, 저는 책을 위해 기꺼이 삶을 내어놓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일이 잘 풀린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뜻하죠.
이민진은 요즘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 할렘의 브라운스톤 주택 서재에서 다음 책을 구상하고 있다. 제목은 <마셜 플랜(Marshall Plan)>. 1947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당시 국무장관 조지 C. 마셜(George C Marshall)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을 재건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자 촉구했고, 실제로 그 계획은 실행에 옮겨졌다. “참혹한 파괴가 일어난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베푼다면 결국 우리 모두가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민진이 말한다. “저는 마셜 플랜이 20세기 미국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기꺼이 감수할 만한 희생이었고, 동시에 놀라운 투자이기도 했죠. 저는 지금 1960~70년대에 고국을 떠나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와 광부로 일하면서 그 돈을 한국으로 송금했던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그들이 보낸 외화는 한국의 재건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마셜 플랜>은 이민진의 디아스포라 4부작을 완성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 데 또 한 번 10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마 이 작품이 제 마지막 소설이 될 것 같아요.” 그가 조금은 태연하고 유쾌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쉴 수 있겠네요!” 이민진에겐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 이민진의 신작 <아메리칸 학원>은 10월 14일 국내 출간됐다.
HOW I WRITE 이민진이 자신의 글쓰기 방식과 창작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나는 꽤 사려 깊은 사람이고, 보통의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내가 모르는 것이 정말 많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세상에 수많은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잠시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만큼 충분히 알고 있는가?’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고 싶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 아주 많으니까.
내가 하는 일은 잘 다듬어진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유익하면서도 재미있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바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대략 10년에 한 권씩 책을 낸다. 2007년에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냈고, 2017년에 <파친코>를, 그리고 올해 <아메리칸 학원>을 냈다. 나는 확실히 생각을 빠르게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 그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대도 괜찮다.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내 의무를 회피한 적도, 한 번 내세운 입장을 마냥 고집하기만 한 적도 없다.
내 역할은 누군가를 무너뜨리거나 논쟁에서 이겨 우위를 점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결코 그런 것을 원한 적은 없었다. 중요한 건 온갖 방해와 불편함, 침묵 속에서도 묵묵히 머무르며 계속 쓰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태초부터 모든 창작자들이 해온 일일 것이다. 나는 때로 우리가 조용히 앉아 골몰해 무언가를 만들어낸 최초의 인류가 아님을 상기한다. 우리의 조상들도 자신만의 관점을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충분한 시간과 여유, 고요를 허락했다. 먼 옛날 동굴 벽화를 그리던 사람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좋다.
Credit
- 글/ Erica Wagner
- 사진/ Parker Woods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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