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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소설가의 여행책 4

뮌헨부터 도쿄, 홋카이도까지. 네 명의 소설가가 저마다의 시선으로 기록한 여행 이야기.

프로필 by 서해인 2026.09.22
10초 안에 보는 요약 기사
  • 천선란, 정보라, 양선형, 민병훈. 네 작가가 보여주는 4인 4색 여행 이야기.
  • 자신을 찾기 위해서, 변화를 목격하기 위해서, 작가의 발자취를 쫓기 위해서. 각자 다른 이유로 타지를 누빈다.
  • 여행 중 만난 누군가의 말에 위로를 받은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책 네 권을 소개한다.

소설을 쓰는 일과 여행을 떠나는 일은 얼마나 닮아 있을까. 천선란, 정보라, 양선형, 민병훈, 네 명의 소설가는 익숙한 일상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낯선 도시의 거리와 공원, 폭죽이 터지는 항구를 걸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기록했다. 자기만의 공원을 찾아 뮌헨으로, 세계 독자와의 만남을 좇아 열다섯 개국으로, 동의할 수 없는 타자의 삶을 좇아 도쿄로, 그리고 희망이라는 한마디를 얻기 위해 홋카이도로 향한 이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본다.




천선란 <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 달


천선란 <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

천선란 <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


“몇백 년 전까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너무도 많은 기대를 품고 사는 우리에게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이해 하루 일과 시간표를 그려야 할 때 우선 시작은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보는 것이었다. 거기에 ‘먹기’와 ‘자기’ 만으로 넓은 면적을 채우는 친구들이 있었는가하면, 아마도 화분에 물 주기, 심부름 하기, 학원 가기처럼 많은 의무와 과제만으로 하루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SF작가 천선란은 소설가로서의 사회적 가면, 투병중인 가족을 돌봐야 하는 자식의 가면, 단 두가지만을 번갈아 끼며 오랜 시간을 보내왔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뮌헨의 철도 종점인 파징, 유동인구가 적은 마을에 있는 레지던스에 머무르겠냐는 제안을 받은 후 거기서 “온전한 나로 존재해야 하는 나의 가면”을 써보게 된다. 그가 뮌헨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이스트와 물, 약간의 소금만으로 발표시킨 독일식 사워도우인 ‘로겐브로트’를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천천히 먹는 것이다. 천선란은 둥그런 로겐브로트를 바라보며 앞으로 한달동안 하루 일과 시간표를 어떻게 그리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을 것이고, 그러다 금방 그만두었을 것이다.


파징의 레지던스에서 머물던 한 기타리스트의 아내인 이주향 작가와의 만남이 이 책의 표지와 내지 일러스트 작업으로 이어졌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푸르른 뮌헨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천선란은 결국 쓰는 일상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매일 공원에서 농구하는 소녀를 보며 “그저 내가 나를 만족시킬 때까지 끝없이 하는것. 마음과 몸이 전부 다 쏠리는 것.”이 소설임을 다시 한 번 절감 하면서.




정보라 <저 지금 탑승합니다>, 위고


정보라 <저 지금 탑승합니다>

정보라 <저 지금 탑승합니다>


“말과 글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 그러니 외국에 나가 세상의 변화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주로 데모)을 열심히 할 것이다. 독자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고 싶고, 내 글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저 지금 탑승합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유명해지는 바람에 4년 동안 15개국 32개 도시에 불려 다닌 어느 한국 작가의 끝나지 않는 세계 출장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저 지금 탑승합니다>는 지금 소설가 정보라만이 쓸 수 있는 고유한 여행기다. 2022년은 정보라에게 있어 소설 <저주 토끼>가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개인적 경사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전세계적 비극이 교차하는 시기로 기억된다. 한편, 2024년 발리에서 열린 ‘우붓 작가독자축제’는 미리 예정된 일정이었다. 다만, 이 축제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직후에 열린 덕에 정보라는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실이 작가를 꿈꾸는 아시아의 모든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에 응해 축제 개막 기념 기자회견에 오르게 된다. 같은 해에는 제주항공 2216편 참사로 179명이 사망했다.


정보라가 세계 곳곳의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를 묘사해둔 지점을 읽을 땐, 한국문학과 K콘텐츠의 위상을 온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체류하는 도시의 거리에서 열리는 각종 소수자 권리 옹호와 정치적 시위 대열에 참여하는 걸 보면 ‘현지인이 되고 싶다’라는 이방인의 바람을 이보다 더 잘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정보라는 지구촌의 이웃들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저항하는 방식의 차이를 성실하게 눈에 담고 기록한다.




양선형, <미시마의 도쿄> 소전서림


양선형 <미시마의 도쿄>

양선형 <미시마의 도쿄>


“산책은 얼마든지 길을 잃어도 좋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나타난 예상치 못한 풍경을 긍정하는 일이 아닐까. 앞으로 떠날 산책이 내게 미시마로 향하는 비밀스러운 오솔길의 입구를 열어 주지 않을까. 나는 결국 미시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바로 그 장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만이 찾아난 미시마의 한 조각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미시마의 도쿄>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의 집필 스타일에는 혹평을 하고,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는 밑도끝도 없이 신뢰를 보낸 독자. 동시에 16세때 데뷔작을 발표하며 당대 문인들 사이에서 '조숙한 천재가 나타났다'는 극찬을 받았으나, 자신이 유작이라고 명명한 작품의 마지막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긴 후 극적인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미시마 유키오'라는 이름이 낯설다면, 우선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캐릭터 파악은 충분할 것이다.


<미시마의 도쿄>는 "소설가가 걸어 본 소설가의 도시"라는 콘셉트를 가진 소전서가 출판사의 도시 산책 시리즈 중 하나다. 한국의 소설가 양선형이 일본의 가장 문제적인 소설가로 손꼽히는 미시마가 평생 나고 자랐던 도쿄의 학교, 공원, 책방을 충실히 따라가는 여행길에 오른다. 양선형이 처음 도쿄에 갔던 20대 중반에는 관광 책자 <도쿄 제대로 즐기기> 속 여행 루트를 착실하게 밟았지만, 다시 방문한 도쿄에서는 자신이 한 인물을 중심으로 지극히 편협한 지도를 그려나간다. 양선형의 말처럼, 한국 독자 입장에서 절대 천황제의 부활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미시마의 행보에 공감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동의할 수 없는 타자의 생애와 죽음을 서술"하기 위해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한 사람의 여정을 따라 읽다보면 지적 즐거움이 솟아난다.




민병훈 <지나간 계절 모두, 북해도>, 안온북스


민병훈 <지나간 계절 모두, 북해도>

민병훈 <지나간 계절 모두, 북해도>


“앞으로 희망을 갖고. 별안간 폭죽이 터져 이어진 말은 들리지 않았다. 부부는 폭죽이 터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가게를 나섰고 나는 그들의 등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희망. 여행 내내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지나간 계절 모두, 북해도>


훗카이도 동남쪽 항만 도시인 구시로에는 세계 3대 일몰 명소로 알려진 누사마이 다리가 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민병훈 소설가가 구시로를 찾았을 땐, 해무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에 취약한 여행자들에게는 저마다 영원히 늘어놓을 무용담이 남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순간에는 세상이 원망스러워진다. 민병훈 소설가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보음을 자장가처럼 듣고 뾰족한 마음을 억지로 둥글게 다듬는 시절”에 일본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거의 무언가를 쓰거나 읽는 일을 하지 않는 그는 악천후를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숯불가게에서 우연히 한국인 부부를 만나게 된다. 가게 문을 나설 때쯤 구시로의 축제 기간에 맞춰 터지는 폭죽. 그 부부 중 한 사람이 건넨 덕담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매일 문장을 완성하는 게 소설가의 일이지만, 가끔 사람은 조각난 말만으로도 여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지나간 계절 모두, 북해도>“는 훗카이도를 가고 싶은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책”에 가깝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유동인구가 최소한인 곳, 한적하다 못해 텅빈 곳, 그로부터 몸과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여정이 달갑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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