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노벨문학상 수상자, 앤 카슨이 쓴 최초의 책에 대하여
1986년 쓰인 ‘에로스, 달콤씁쓸한’은 시인이기 전 고전학자인 이 작가의 특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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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TRACE
시와 산문, 고전 연구와 번역을 오가는 작가. 2026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앤 카슨이 1986년 썼고, 한국에는 작년 봄에서야 출간된 첫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으로 앤 카슨의 세계를 처음 열었다.
장르라는 고정된 영역에 갇히지 않은 채 아우르고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2026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앤 카슨 앞에 붙는 수식은 대체로 이렇다. 수상 소식을 전해 들을 당시 아이슬란드에서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일화마저도 이 작가의 성격을 드러내는 듯하다. 가르마를 탄 단정한 단발머리와 안경, 수수하고 지적이지만 전형적인 학자처럼 보이지는 않는, 어딘가 소년 같은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스타일도 그렇다. 자기만의 미감이 분명한 사람임을, 글에도 그런 면이 십분 반영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10월 8일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전까지 나는 앤 카슨의 어떤 책도 읽어보지 못한 채였다. 그럼에도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이 작가의 스타성에 매료되어 인터뷰나 어록 등을 강박적으로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건 올해 나온 신간 중 가장 좋았던 책을 묻는 질문에 대해 이런 답을 내놓는 장면이다. “그런 건 없어요. 나는 신간을 보지 않아요. 내가 읽는 책들은 다 기원전 500년의 책들이에요.” 시인이기 전, 고대 그리스 문학을 연구한 고전학자 앤 카슨은 동시대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을 만큼의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지금 어떤 책이 쓰이고 있는지엔 관심이 없다. 그 사실을 포장하려는 움직임도 없이 그저 수십 년간 좋아해오던 것을 앞으로도 묵묵히 좋아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인터뷰를 보고 바로 주문한 책이 있다. 1986년 쓰인 앤 카슨의 첫 책 <에로스, 달콤씁쓸한>이다. 사포의 시와 플라톤의 철학 등을 오가며 에로스와 인간 욕망의 본질을 탐구한 이 책의 한국어판은 작년 3월에 출간되었다. 국내 독자에게 닿기까지 거의 40년이 걸린 셈이다. 아마 출판사는 독창적인 문학성과 학술적 깊이를 함께 갖춘 이 작품을 독자에게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다음의 구절로 그 어려움을 헤아려볼 수 있다. “연인에게는 쾌락과 고통이 동시에 나타나는데, 사랑하는 대상의 욕망할 만함이 부분적으로 그 대상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중략) 에로스의 궤적은 연인에게서 나와 상대 연인을 향했다가 다시 튀어나와 연인 자신과,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연인 안의 구멍으로 향한다. 대부분의 사랑 시에서 진짜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상대 연인이 아니다. 그것은 그 구멍이다.”
나, 연인, 구멍. 세 관계에 대한 고찰. 이건 사랑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보단 사랑하는 사람이 왜 우리를 결핍된 존재로 만드는지 탐구하는 책이다. 그 ‘달콤씁쓸한’ 모순을 파고든다. 이것이 앤 카슨의 이야기 방식이다. 문득 수집해두었던 이 작가의 어떤 말이 스쳤다. “저는 제 목소리를 만들려고 애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다만 다른 누구와도 뒤섞이지 않으려고 하죠.” 그가 세상에 내놓은 최초의 책은 일찌감치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Credit
- 사진/ 난다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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