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페이지 이하 책 추천 5권, 하루 만에 읽고 오래 남는 책
올여름 하루면 읽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더 오래 생각하게 되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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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페이지 안팎의 짧은 분량으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책 5권 소개.
- 소설부터 에세이, 인문까지 오래 곱씹게 되는 작품들.
- 읽는 시간보다 다 읽은 뒤의 시간이 더 길어지는 책.
200쪽도 채 되지 않는 책은 대개 하루면 읽는다. 하지만 어떤 책은 읽는 데 걸린 시간보다 다 읽고 난 뒤 머물게 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얇아서 쉽게 집었지만 오래 곁에 남게 되는, 단단한 책 다섯 권을 소개한다.
구병모, <단지 소설일 뿐이네>, 문학실험실 / 164페이지
사진/ 문학실험실 제공
2026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가장 열띤 반응을 얻었던 도서 중 하나는 구병모 작가의 <파과> 위픽 에디션이었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측은 본래 도서전 단독 한정 판매를 예고했다가, 조기 재고 품절 사태로 인해 행사 이후에도 구매가 가능하도록 해당 에디션의 추가 수량 제작을 결정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단지 소설일 뿐이네>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인 구병모 작가가 쓴 흥미로운 메타 픽션이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절창>을 비롯해 20여권의 책을 써온 그는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된 ‘중견 작가 S’라는 극중 인물의 입을 빌어 먼저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의식’의 적정 수치에 대해 자문한다.
“구체적으로는 구매자들이 참아주고 소비해줄 만한 한도 내에서, 말하자면 소비에 방해가 되지 않은 만큼만 작가가 자의식을 갖기를 바라는 걸 텐데 그 역치가 저마다 다르기에” 요즘 작가들은 ‘과잉 존재’라는 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책, 드라마, 영화를 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은 “첫 번째 댓글에 휩쓸리게 되어 있고”, 이는 달리 말하면 “남들과 같은 것을 느껴야 최소한의 포만감을 얻”을 수 있다는 세태를 반영한다. 이 이야기 중 구병모가 실제로 경험했을 실화 함량 농도를 추측하는 건 무용하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건 단지 소설일 뿐이다.
홍진기, <사고외주>, 어크로스 / 152페이지
사진/ 어크로스 제공
19세기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을 빚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 존재의 고뇌에 감응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는 사람의 곁에는 스마트폰이 있고 그는 비스듬히 몸을 뒤로 기대다 못해 눕기 직전의 상태다.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기를 파업해버린 것이다. <사고외주>는 학생들의 리포트와 보고서를 읽고 첨삭하는 게 주요 의무 중 하나인 화공생명공학과 홍진기 교수가 어느 날 감지한 작은 불편함에서 시작된다. 비문은 사라졌고 구조적인 오류는 없지만 ‘누가 이 글을 썼는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해서 오는 혼돈이나, 글쓰기 앞에서 찾아오는 막막함에는 단 10초도 내어주고 싶지 않아하는 AI 소비자만이 서려 있다.
홍진기의 지적처럼 수많은 텍스트 앞에서 사람은 점점 투명해져간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자기 이름을 결과에 붙이는 일을 잠시 미루어둔 시간”이다. 알고리즘의 빠른 연산과 인간의 책임감 있는 의사결정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법을 책에서 배울 수는 없다. 우리 인간들은 “매일의 작은 선택과 점검, 불편함을 통과한 시간이 한 겹씩 쌓일 때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원래 AI가 없을 때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비비언 고닉, <연애 시대의 종말>, 엘리 / 208페이지
사진/ 엘리 제공
미국의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 비비언 고닉이 <연애 시대의 종말>을 통해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책이 현지에서는 1995년에 출간 됐으며 당시 비비언 고닉의 나이가 60대 초반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동자계급 이민자들이 밀집해 있던 미국 브롱크스에서 성장한 그는 “사랑에는 사람을 바꾸어놓는 힘이 있다는 확신에 물든 문화”에 속해서, “여자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랑이야”라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으며 컸다.
좋은 대화가 고픈 남자만 쓸 수 있는 묘사가 이어지는 <크로스웨이스의 다이애나>, 작가의 신경 말단에 깃든 통찰로 쓰인 <아들과 연인>까지, 충실한 로맨스물 독자인 비비언 고닉은 걸작과 싸구려 통속 소설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버지니아 울프, 이디스 워턴, 진 리스, 레이먼드 카버 등 총 25명의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는동안 그가 궁금해했던 건 사귀고 싶은 남자 주인공과 절대 상종하고 싶지 않은 남자 주인공 사이를 가려내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 때는 자신에게 사랑이 얼마나 중요했으며, 또한 어느 정도로 사소해질 수 있는지를 포착하는 데에 있다. 어느 날, <비탄의 시대>를 읽고나서 비비언 고닉은 소소하게 좋다는 느낌만이 남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정말로 한 시절이 지나갔음을 깨닫는 순간은 쓸쓸해보이지만 그 자체로도 힘이 있다.
최다은, <비효율의 사랑>, 김영사 / 208페이지
사진/ 김영사 제공
영화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이 종영을 예고했다. 필름클럽 제작자인 최다은 PD는 “어떤 영화음악이 독자적으로도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은 부산물에 가깝다. 모든 음악감독은 감독의 이상을 구현한다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라는 사실을 가장 쉽게 알려준 사람이다. 최다은 PD에 대한 첫인상은 SBS 라디오 <FMzine> 속 코너 ‘짜투리 영화음악실’이었다. 그는 광고 시간이나 노래 트는 시간을 제외한 남는 시간, 말 그대로 ‘짜투리’라는 변칙적인 속성의 러닝타임동안 영화에 삽입된 음악들을 소개해주었다. 입시 공부할 때 말고는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사회인은 내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때였고, 이것은 모범생의 DNA가 없다면 시작될 수 없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로 10년 가까이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그가 열어준 영화음악의 세계를 접하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동시에 듣는 일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을 것이다. <비효율의 사랑>에는 자신이 다치지 않으면서도 음악과 함께하고자 쌓아 온 ‘작곡과 출신의 라디오국 PD’라는 독특한 커리어, “노력이 최악의 대응인,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과제”처럼 다가온 반려병, 그렇게 잘 듣는 사람이 통과한 시간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턱괴는 여자들 외,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 TohPress / 176페이지
사진/ TohPress 제공
사진가 카로우 셰지아크는 5년간 매주 화요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양로시설 거주민을 대상으로 요가 수업 자원봉사를 진행했다. 고령화 시대에 갈 곳 없는 노인들이 머무르는 이 시설에는 긴 복도를 따라 1.5평 남짓한 방들이 마련되어 있다. 카로우 셰지아크는 그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함께 요가를 하자고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러다가 화사한 색상의 커튼이 드리워져있고, 추억이 깃든 오브제가 있으며, 소중했던 가족이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는 방들을 보게 된다.
<외로움을 끊고 끼어들기>는 누군가의 생애 마지막 사적 공간이 될지도 모를 양로시설 노인의 방을 촬영한 연작 사진 시리즈 ‘Possibly, Here’와 작가 노트를 중심으로, 여러 편의 사진과 글이 교차하는 책이다. 처음 이 연작 시리즈를 알게 된 인문학 프로젝트팀 ‘턱괴는 여자들’이 국내 전시를 주최했고, 그 전에 5명의 국내 작가(박초롱, 이훤, 이연, 김규진, 하미나)에게 전시에 걸릴 작품을 먼저 본 이로서의 감상을 한 편씩 청했다. 결국 모두는 남의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애써 가려두었던 외로움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으므로. 이 책에서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되는 사진에는 앉은키가 서로 다른 노인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 동그라미 대열이 가진 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여생은 편안하고, 또 행복에 가까우리라 짐작한다.
Credit
- 사진/ 각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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