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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카텔란, 바자와 단독 인터뷰하다

현대미술 아이콘, 카텔란이 내한한 이유

프로필 by 손안나 2026.10.26

CATTELAN, REALLY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과 인터뷰라는 행위, 브랜드와의 작업, 그리고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대규모 개인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논쟁적 작가’의 정체성 탐구 프로젝트, 그 일부가 되기.


며칠 동안 나는 책 두 권을 끌어안고 있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직접 인터뷰어가 되어 문화예술계의 숱한 창작자들(심지어 작고한 이들까지)과 나눈 인터뷰집인 <INDEX>, 그리고 카텔란이 지난 35년 동안 응했던 300여 회의 인터뷰를 모은 <Beware of Yourself>. 이 두 권의 책은 카텔란이라는 예술가의 문제적 면모가 이를테면 624만 달러에 판매된 바나나(<코미디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카텔란은 인터뷰어로도, 인터뷰이로도 온전히 그였던 적이 없었다. 중간중간 대리인, 중개인, 지인, 동료, 고스트 라이터들에게 인터뷰를 시켰거나 답했는데, 자신의 역할을 위임했으니 말하자면 ‘개념적 인터뷰’인 셈이다. “너 자신(카텔란)을 조심하라” 이르는 그의 ‘인덱스’들이, 예컨대 금칠을 한 변기(<아메리카>)나 자살한 다람쥐(<비디비도비디부>), 교도소 외벽에 그려 넣은 상처 입은 발(<아버지>)만큼, 아니 훨씬 거대하고 혁신적인 농담처럼 느껴졌다. 거짓말 같은 진실 사이에서 혼몽해진 나는 급기야 어이없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진짜 카텔란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리고 9월 중순의 어느 날, 카메라 앞에서 몸을 사리지 않던 맨발의 카텔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여전히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카텔란의 작업 세계를 관통해온 자본주의, 권력, 미술시장, 폭력, 죽음, 실패, 죄책감, 책임, 집단적 트라우마 같은 묵직한 주제가 그만한 충격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바로 자신의 정체성마저 논쟁으로 삼는 그의 태도 덕분이라 생각한다. 스스로를 현대미술의 제단에 올리고, 자기 존재를 모호함과 모순의 격전지로 둘 수 있는 자의 농담은 늘 냉소나 풍자를 뛰어넘어 저항과 성찰의 한 방식으로 거듭난다. 그래서, 이번에 카텔란이 현대카드를 디자인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정체성의 문제를 작업 소재로 삼았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가상의 국가를 상정했고, 신용카드에 ‘신분증’의 역할을 부여했으며, 미묘하게 닮은 ‘가짜 카텔란’들의 얼굴을 앞세웠다. 게다가 카드 이용자는 본인 얼굴과 ‘가짜 카텔란’ 얼굴들 중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다. 선택 가능한 가변적 정체성,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카드, 그러므로 완벽한 ‘레디메이드’로서의 예술. 이로써 카텔란은 (이 카드를 사용하는) 모두의 페르소나가 되고, 그 반대도 성립시킨다. 그렇게, 더 광범위하고 깊숙해진 카텔란식 정체성 탐구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만든다.


하퍼스 바자 솔직히 인터뷰를 준비하는 내내 의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진짜 카텔란’의 답을 받을 수나 있을지. 지금 이 질문을 읽고 있는 카텔란은 정말 ‘당신’이 맞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다. 내일이면 나는 그와 의견이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실제보다 더 일관된 사람인 척할 뿐이다.

하퍼스 바자 그럼에도 내가 질문지를 쓰고 있는 이유는 나도 ‘카텔란 작업’의 일부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도 인터뷰를 작업의 한 방식으로 삼고 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예전만큼 의도적으로 그러지는 않는다. 한동안 나는 인터뷰가 초상화를 만드는 이상한 방식이라는 사실에 매료되어 있었다. 충분히 많은 질문에 답하다 보면, 서서히 하나의 인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인물이, 그를 만들어낸 사람보다 더 설득력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 인터뷰도 그 일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도 관여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전적으로 내 잘못만은 아니다.

하퍼스 바자 다른 사람의 말을 ‘카텔란의 말’이라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내게 저자성(authorship)은 소유보다는 책임과 더 관련이 있다. 모든 물건을 내가 물리적으로 직접 만들었거나 모든 문장을 내가 직접 썼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 이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속한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이면 충분하다.

하퍼스 바자 <INDEX>를 읽다 보면, 다른 예술가들에게 던진 질문들이 동시에 카텔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인터뷰어를 자처한 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나,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 자신이다. 때로는 내가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행위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하퍼스 바자 그래서, 오랜 인터뷰 작업을 통해 원하는 답을 얻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니. 대부분의 경우 인터뷰는 내게 더 나은 질문을 주었다. 젊었을 때 나는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게 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 때로는 그 질문과 더 오래 함께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이해하게 된다. 여전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은 많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미 해롭다는 걸 알고 있는 일을 왜 반복하는가” 같은 질문도 아마 그중 하나일 것이다.

하퍼스 바자 <INDEX>를 재미있게 읽는 나만의 방법 중 하나는 당신의 질문들만 뽑아 읽는 것이다. 그게 바로 당신에게 중요한 화두였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반복되는 질문을 발견했다. 당신에게 돌려주고 싶다.

마우리치오 카텔란 (나는 누구인가?) 아직 확인 중이다. (페르소나가 지겹지 않은가?) 가끔. 불행히도 그는 나와 함께 다닌다. (무엇이 두려운가?)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것. (돈과 자유는 공존할 수 있나?) 그렇다. 항상 행복하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패란 무엇인가?) 매우 효율적인 스승. (왜 예술을 하는가?) 이쯤 되니 직업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작품을 만드는가?) 라벨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 (당신이 사라지면 무엇이 남는가?) 바라건대, 몇 가지 문제들.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구별하나?) 항상 아주 잘 구별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믿는 것은?) 의심.

하퍼스 바자 <INDEX>와 함께 <Beware of Yourself> 얘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뷰어로서의 카텔란과 인터뷰이로서의 카텔란. 정반대의 시도인 것 같지만, 결국 둘 다 ‘당신은 누구인가’로 돌아간다. 이 질문을 왜 그렇게 붙든 건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우리가 언제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당신의 부모는 당신의 한 버전을 알고, 친구들은 다른 버전을 알고, 같이 사는 사람은 또 다른 버전을 안다. 대중은 다시 또 다른 버전을 접한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가 고수하는 자신의 버전이 있을 텐데, 사실 그게 가장 정확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Beware of Yourself>는 내게 의미가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 혼란을 눈에 보이게 만들 뿐이다.

하퍼스 바자 언젠가 인터뷰에서 가족으로부터 생겨난 깊은 불안(insecurity)에 대해 얘기한 적 있다. 당신은 꽤 대담하고, 무서울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여전히 무언가를 증명하려고 하고 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덜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마도 인생의 아주 이른 시기에, (특히 가족으로부터) 내가 받았던 몇몇 평가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건 좋은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더 이상 그 방에 있지도 않은 사람들과 여전히 논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퍼스 바자 줄곧 타인에게 질문해온 당신은 지금 스스로에게 무엇을 묻고 싶은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나는 무엇을 그만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내 질문은 늘 “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였다. 이제는 무언가를 그만두는 일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퍼스 바자 ‘Beware of Yourself’에서 착안해, 가장 조심해야 하는 카텔란은 어떤 모습일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성공한 사람. 그는 이미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설득력이 있다. 그는 말한다. “이게 한 번 통했으니, 다시 해.” 바로 그때가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할 순간이다.

하퍼스 바자 이번 현대카드와의 협업은 <Beware of Yourself>의 논리와 꽤 유사해 보인다. 이 책은 본인 인터뷰 중 일부는 애초에 다른 사람이 카텔란이 되어 말한 것들이고, 그걸 카텔란의 시점으로 재편집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카텔란이 만든 카드를 사용할 텐데, 정작 그 카드에는 ‘가짜 카텔란’이 있다. ‘진짜 카텔란’과 ‘가짜 카텔란’을 이어주는 건 결국 카드 사용자라는 소리인데, 이들은 넓은 의미의 ‘관객’일까, ‘공범’일까?


<Novecento>, 1997, Taxidermied horse, leather saddle, rope. , 2001, Polyester resin, silicone rubber, pigment, natural hair, suit, boots / , 2007, Resin, clothing, natural hair, packing tissue, wood, screws, wooden anchors. , 2026, Solid lime wood, plywood, resin, paint, wood stain, wood oil, wax, metal brackets and fixings. , 2026, Taxidermied pigeons. © Neue Nationalgalerie – Stiftung Preußischer Kulturbesitz / David von Becker

마우리치오 카텔란 ‘공범’이 훨씬 낫다. 관객은 떠나버릴 수 있다. 공범은 이미 증거물에 손을 댔다. 누군가 그 카드를 지갑에 넣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 이미지는 이제 나와 거의 관계없는 자기만의 삶을 갖게 된다. 나는 그 사실이 맘에 든다.

하퍼스 바자 카드에 인쇄된, 카텔란을 묘하게 닮은 이들이 각각 이름과 사연을 갖고 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딱히 그렇지는 않다. 나는 그들에게 약력이 없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현대카드는 내 아이디어를 가져가 실제 신분증과 운전면허증의 언어로 작업했다. 내게는 그 부분이 중요했다. 나는 우리가 어떤 공상과학적인 신원 체계를 만들어 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익숙하게 느껴지길 원했다. 그러다 다시 보면 뭔가가 아주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할 법해 보인다. 어쩌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퍼스 바자 그동안 매거진부터 패션, 가방, 접시, 가구, 캔, 냉장고 등 사물의 표면에 이미지를 옮겨왔다. 특히나 신용카드는 ‘아이디어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적인 물건이다. 이 매체의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회화는 어딘가에 머물면서 당신을 기다린다. 신용카드는 어디든 간다. 당신과 함께 저녁을 먹고, 휴가를 가고, 호텔비를 내고, 당신에게 필요한 몇몇과 필요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산다. 아마 대부분의 예술작품보다 더 바쁜 삶을 살 것이다. 바로 그 이동성이 좋았다.

하퍼스 바자 가능한 한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려 한다는 당신이 욕망을 소비로 전환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모순도 재미있다. 이번에 만든 카드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쪽과 그 욕망을 들여다보게 하는 쪽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둘 다인 것 같다. 신용카드는 이미 그 자체로 놀라운 물건이다. “저걸 갖고 싶다”를 3초 만에 “저건 내 것이다”로 바꿀 수 있다. 거기에는 거의 마법 같은 무언가가 있다. 혹은 위험한 무언가. 대개는 둘 다다.

하퍼스 바자 신분증 형태의 카드는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정체성을 확인하는 이미지로 오히려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셈인데, 이를 의도한 건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신분증 사진은 대화를 끝내기 위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이다. 끝.” 하지만 그 형식 안에 나처럼 보이지만 내가 아닌 사람을 넣으면, 갑자기 이미지는 정반대의 일을 한다. 정체성을 입증하는 대신 의심을 만들어낸다. 그 모순이 진짜 출발점이었다.

하퍼스 바자 앞의 인터뷰 프로젝트에서는 버질 아블로에게 “당신 자신이 하나의 로고인가” 물었다. 현대카드라는 브랜드와 협업한 당신은 일찌감치 스스로는 물론 상상력, 예술에 대한 생각까지 모두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마우리치오 카텔란’ 역시 로고가 되었을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마도. 그리고 내가 그중에서 가장 알아보기 쉬운 대상인지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바나나는 분명 나보다 더 유명하다. 어쩌면 히틀러도 그럴 거다. 이미지가 일단 독립하고 나면, 그걸 다시 집으로 데려오려고 애써봐야 별로 의미가 없다.

하퍼스 바자 앞의 두 책을 보면, 당신은 ‘창작적 자아(creative ego)’에도 관심이 많다. 미술관, 갤러리, 매거진, 패션 브랜드, 기업 등과 협업을 지속해온 예술가로서, 이번에 당신의 ‘창작적 자아’는 안녕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중요한 것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자아는 필요하고, 동시에 다른 더 좋은 아이디어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자아가 작아야 한다. 그게 언제나 협상의 지점이다. 이번에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이 이미지들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에서 나왔다는 느낌이었다. 공식 사진, 신원 확인 체계, 익숙한 시각적 코드들. 그 다음, 현대카드가 그 모든 걸 자체의 기술과 경험을 통해 가공했다. 내가 1밀리미터까지 전부 통제하고 싶었다면 협업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퍼스 바자 “왜 현대카드와 협업했나?” 하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 반대로 그들이 왜 하필 당신과 협업하고 싶어했는지 혹시 물어본 적 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건 그들이 답하게 두는 게 좋겠다. 어차피 나는 칭찬을 완전히 믿는 편이 아니다. 아마 내가 얌전히 굴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하퍼스 바자 자, 이번에는 베를린으로 가 보자. 질문지를 쓰고 있는 오늘, 마침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의 전시 «밤(NIGHT)»이 개막했다. 전시가 실제 관객을 만난 후, 상상했던 것과 달라진 점이 있던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스케일이 달라졌다. 오프닝 전까지는 사물, 건축, 거리, 빛에 몰두한다. 무언가를 고작 20센티미터 옮겨놓고는 그게 중대한 사건이라 여긴다. 그러다 사람들이 들어오면 갑자기 공간 안에 수백 개의 몸이 생긴다. 전시는 훨씬 덜 통제된 것이 된다. 대개는 그 편이 좋은 일이다.

하퍼스 바자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만든 모더니즘의 신전 안에 또 하나의 교회 같은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위계와 경계, 시작과 끝을 최대한 없애려 했던 건물에 당신은 강한 수직의 축과 새로운 입구를 만들었다. 그의 건축에 대항하고 싶었던 건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미스와 싸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봤자 바로 질 테니까. 그 건물은 거의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다. 숨을 곳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그곳이 동시대의 교회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 생각은 건축물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이끌었다. 문턱, 중심축, 매달린 몸들, 심지어 두 개의 물품보관소조차 각각이 작은 예배당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축소한 <연옥(Purgatory)>은 거의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건물 안에 아주 명시적인 입구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당신 말이 맞다. 어쩌면 미스와 의견이 다른 지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중을 담은 의견 차이다.

하퍼스 바자 “교회는 보이지 않는 것에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발명”이라고 했다. 이번 전시가 종교나 신앙에 대한 전시가 아니라는 건 분명하니, 그렇다면 형태를 부여하고 싶었다는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두려움. 기억. 죄책감. 권력. 어쩌면 희망도. 어차피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종교는 수세기 전에 그걸 이해했다. 정치도 아주 잘 이해한다. 예술도, 가끔은 해낸다.

하퍼스 바자 작금의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이번 전시는 숱하게 겪었다 여겨온 것들이 부활해 엄습하는 느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밤’은 앞을 볼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일까, 아니면 그것들이 사라진 적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상태일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이상한 점은 그것이 새롭고도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잘 알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미 다루어졌다고 믿었던 생각과 두려움들이 다시 돌아오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전시장에 이런 문장이 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기억력은 아주 좋다.” 그것이 내가 ‘밤’이라고 말할 때 뜻하는 바에 상당히 가깝다.

하퍼스 바자 30여 년간의 작업 가운데 <코미디언> <아메리카> <블라인드> <일요일> 등 유명 작품들도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웃음기까지 싹 뺀 느낌이다. 전시 자체가 진지해진 걸까, 이제야 원래 존재하던 당신의 진지함을 발견하게 된 걸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내가 갑자기 진지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오히려 수상하겠지. 내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불편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유머는 종종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었지만, 그 문 뒤의 것들이 반드시 웃기진 않았다. 어쩌면 이번에 우리는 이를 더 빨리 알아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퍼스 바자 이제껏 당신은 실패와 위험을 작업의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지금의 카텔란은 실패조차 작품의 일부 혹은 제스처로 해석되고, 심지어 제도 안에 흡수시킬 수 있는 위치의 작가다. 그런 당신에게 진짜 실패가 가능했을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물론이다. 어쩌면 지금은 실패가 성공으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험한지도 모른다. 젊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상황이 매우 분명한 실패의 한 형태다. 나중에는 단지 당신의 이름이 무언가에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작품이 진짜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당신의 이력이 그 작품을 살려두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 한다. 특히 나는 이번 전시에 그 질문이 아주 강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건물은 당신을 별로 도와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퍼스 바자 이번 전시작들은 공통적으로 죄책감, 폭력, 역사, 기억처럼 개인을 훌쩍 넘어선 집단의 문제를 다룬다. ‘나의 문제’는 언제 ‘우리의 문제’가 될까? 작가가 그 경계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다른 누군가가 이를 알아볼 때. 그걸 작가가 미리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만들어놓고 이제 이것은 보편적이라고 선언할 수는 없다. 나는 당신의 문제를 공간 안에 놓는다. 그러고 나서 또 누가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를 본다. 다만 나는 작품들이, 적어도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 건물에 들어오기 전에는 각자 별개의 삶을 살았다는 걸 잊기를 바랐다.

하퍼스 바자 미술관 전체를 비우고 <그>, 즉 무릎 꿇은 히틀러 한 작품만 두는 방안을 고려했다가 마음을 돌렸다고 들었다. ‘그’를 혼자 두지 않음으로써 히틀러에게서 무엇을 빼앗고 싶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빈 공간이 너무 많으면 그 자체가 존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미술관 안에 작은 인물 하나가 완전히 홀로 있다면, 거의 기념비적이거나 혹은 성스러운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히틀러를 위한 예배당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작품들 사이에 놓이면 그는 특권을 잃는다. 훨씬 더 큰 문제 안에서 그저 하나의 요소가 된다.

하퍼스 바자 브란덴부르크 문을 축소하고, 히틀러는 작은 아이 같은 몸으로 만들었다. 실제 조각의 물리적인 크기를 작게 만드는 행위가 권력을 축소하는 일종의 방식인 건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반드시 그렇진 않다. 때로는 무언가를 작게 만들면 사람들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 기념비는 당신과 그것 사이의 거리를 통제한다. 작은 몸은 당신을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권력을 축소하는 일보다 그것과 마주치는 거리를 바꾸는 데 더 관심이 있다.

하퍼스 바자 전시 중심에 <새벽(Dawn)>이 놓였는데, 운송 상자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여성의 형태다. 당신이 말하는 ‘아침의 가능성’과 <새벽>은 연결되어 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맞다. 다만 너무 문자 그대로 연결하고 싶진 않다. 우리는 새벽을 깨끗하고 낙관적으로 여기지만, 밤에 일어난 일을 지워주는 건 아니다. <새벽>에는 이미 상처와 훼손이 있다. 그 몸은 무언가를 지닌 채 존재한다. 그게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시작은 좀처럼 완전히 새롭지 않다.

하퍼스 바자 박제된 동물, 시체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작업에 등장해왔지만, 특히 <먼지(Dust)>에는 세상을 떠난 친구의 실제 유골이 들어 있다. 재현된 죽음과 실제 죽음에는 동일한 아이러니가 작동할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완전 그렇다. <먼지>는 죽은 사람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가까운 친구였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면 흥미로울지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러니 그 작품은 그가 죽기 전부터 시작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후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 관여한 셈이다. 이 사실이 모든 걸 바꾼다. 죽음의 이미지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다. 여기에는 그런 게 없다. 누군가가 죽었다고 해서 아이러니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삶의 일부다. 물론 그 온도는 달라지지만.

하퍼스 바자 천장에 앉은 비둘기도 다시 등판했다. 1997년 베니스에서 비둘기들은 <관광객>이었고, 이번에는 <사람들(People)>이다. ‘관광객’는 어떻게 ‘사람들’이 되었나?

마우리치오 카텔란 비둘기들은 거의 매번 정체성을 바꿔왔다. <관광객>에서 <그들> <유령> <이방인>, 그리고 이번에 <사람들>이 됐다. 비둘기 자체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바로 우리다. 그들을 둘러싼 장소도 변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제목은 공간과의 관계,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관람객과의 관계를 바꾼다. 베를린에서는 <사람들>이 맞다고 생각했다. 새 자체에서 벗어나 집단이나 군중 같은, 장소를 함께 차지하고 있는 우리 모두로 관심을 옮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올려다보지만, 물론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퍼스 바자 예술이 더 빠르고 더 시끄러운 것과 경쟁해서는 이길 수 없다고 쓴 당신의 글을 봤다. 하지만 카텔란이야말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사진 찍기 좋은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온 작가다. 이번 전시는 주로 다뤄온 ‘즉각적인 이미지’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도인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아니, 난 여전히 바로 도달할 수 있는 이미지를 좋아한다. 진짜 질문은 그 첫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다. 우리는 관심을 끄는 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효율적이지만, 그 관심을 견뎌내는 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들은 빠르게 도착하고, 그보다 더 빠르게 사라진다. 나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부러 어렵거나 느린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이미지가 당신의 관심을 끈 뒤에도 갈 곳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하퍼스 바자 평생을 ‘용인받은 아웃사이더’로 살았는데, 이제야 스스로를 ‘진짜 예술가’로 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를 받아들이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것이 다음 장이라고 말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이를 받아들인 뒤에도 여전히 카텔란은 카텔란일 수 있을까?

마우리치오 카텔란 어쩌면 마침내 변명거리가 다 떨어진 것 같다. 나는 삶의 대부분 동안, 원래는 들어와 있어서는 안 되는 방에 어쩌다가 들어와버린 사람처럼 스스로를 느껴왔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나가달라고 할 거라 생각했다. 그 느낌은 유용했다. 그 직업 안에 있으면서도 나를 약간은 그 바깥에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어쩌면 나를 내쫓으러 오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진짜로 예술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일이 더 쉬워지는 건 아니다. 그저 새로운 문제들이 생길 뿐이지.

하퍼스 바자 내가 아는 어느 작가는 “감히 좋은 사람이 되고자 욕심내지 않는다”고 말한 적 있다. 당신은 어떤가, ‘좋은 사람’인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약간, 지나치게 야심 차게 들린다. 나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이들을 의심하기도 한다. 대개는 다른 누군가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냐 묻는 거라면, 정말 모르겠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쁘다.

하퍼스 바자 마지막으로,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이 기나긴 질문지에 답한 당신은 정말 카텔란인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인터뷰 초반에는 훨씬 더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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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윤혜정(문화예술 기획사 윤원 대표, 작가)
  • 사진/ 이준경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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