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될 때, 작가 서이제
서른이 되기까지 한 여성의 마음 속에 남은 여러 여성들에 관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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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S STORY
서른 살을 맞은 <바자>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성 소설가 5인이 쓴 ‘바자’라는 여자의 이야기.
꽃을 사는 여자들
“찾으시는 꽃이 있나요?”
사장의 질문을 받고 나서야, 꽃을 사는 일에 익숙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껏 내가 샀던 꽃은 어버이날 카네이션 정도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언제부턴가 더 이상 사지 않게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꽃을 받았던 일조차 대학교 졸업식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쇼케이스에 진열된 갖가지 색의 꽃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골라야 하나 한참을 망설였다. 장미나 수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름을 모르는 꽃이었다.
“선물하실 건가요?”
“네, 친구한테요.”
짧은 한마디에 사장은 꽃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한 송이씩 꽃을 집으며 내게 설명해주었지만, 역시나 한 번 듣고는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여러 꽃의 이름이 귓가를 스쳐지나가자,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한 움큼의 꽃이 쥐어졌다. 꽃을 포장하는 그의 얼굴에서 선의가 느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리본을 묶으며 내게 물었다.
“친구분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적당히 둘러 말했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친구가 애인하고 헤어졌거든요.”
송은 어제 드디어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끝냈다고 했다. 아주 지긋지긋하고, 자기 파괴적인 그 관계를. 잘된 일이라 생각했지만 축하받아야 마땅할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어쨌거나 나는 한남동의 한 식당에서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처럼, 또는 고백을 앞둔 사람처럼.
평소에 꽃을 사지 않던 내가 꽃집 앞에 멈춰섰던 건, 언젠가 송이 내게 추천해줬던 책 때문이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꽃을 직접 사러 가겠다고 말했다”고 시작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사실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었던 소설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여자, 그러니까 댈러웨이 부인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가 불쑥 튀어올랐던 것이다. 처음 들어선 골목 한쪽, 그 꽃집을 지나는 순간. 나는 송에게 헤어진 걸 축하한다는 말 대신, 댈러웨이 부인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약속 시간이 되자, 송 대신 여자들이 왔다. 친구 사이로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 세 명이었다. 휴대폰을 보니 송으로부터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그럼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음식을 먼저 시켜놓는다고 문자를 보내는 사이, 여자들은 내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나를 등지고 앉은 두 여자 사이로 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세련된 뿔테 안경에 독특한 패턴의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얇고 날카로운 입매. 그 낯익은 얼굴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이내 스카프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 송도 기억할 것이다. 그 당시 같은 수업을 들었으니까. 매주 검은 옷에 스카프만 바꿔 매고 오던 선생님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강사 생활을 시작해 몇 년간 우리 학교에 머물렀던 분.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 죽음을 앞둔 어느 할머니 작가가 죽음이 두렵기는커녕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생각에 설레기까지 하다고, 언젠가 자신도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목소리.
마침 맞은편 테이블에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여자들은 케이크 라쟈냐 위에 초를 켜고 나직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창문에 비친 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초를 부는 한 여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선생님 같아 보이기도 하고, 젊은 시절의 엄마 같기도 하고, 얼마 전 육아휴직을 한 선배 같기도 하고, 댈러웨이 부인 같기도 하고, 얼핏 아직 오지 않은 송 같아 보이기도 한 얼굴들.
선생님은 서른 살이 되기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마음에 품었다고 했다. 나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내가 아는 여러 여자들을 떠올렸다. 초를 끄려고 크게 들이마신 숨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가 이따금 예상치 못한 순간 불쑥 튀어오를 그 여자들.
서이제
2018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0%를 향하여> <낮은 해상도로부터> <창문을 통과하는 빛과 같이>를 펴냈다. 젊은작가상, 오늘의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Credit
- 에디터/ 고영진
- 일러스트/ 진주희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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