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이 닿은 영화는 무엇인가요?
포스터 디자이너부터 독립·예술영화 배급사 대표, 영화 도서 편집자까지. 영화를 사랑해 영화와 관련된 일에 뛰어든 사람들에게 인생 영화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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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모든 영화들에게
영화를 사랑하여 영화와 연관된 이들의 마음에 닿았던 영화들.
<비정성시> 해외 포스터.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
지난 20년 동안 500여 개가 넘는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해왔다. <광해> <곡성> <마더> <하녀> 등 대표적인 상업영화를 비롯해 <꿈의 제인> <윤희에게> 등과 같은 독립영화까지. ‘스튜디오 빛나는’을 운영하고 있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계기와 작품 스무 살 때 가스 배달을 갔던 시네마테크에서 멋진 형, 누나들을 보고 나서 들락거리다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 영화 <비정성시>. 모든 장면이 아름답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의 매력 언저리지만 영화 산업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의 고자본 투자 시스템은 다양성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그런 면에서 독립영화나 아카데미 영화들이 없다면 산업의 다양성이 심각하게 편중되어 버린다. 뭐든 균형감이 무너지면 근본에도 타격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지지하는 이유도 있다.
영화와 맞닿은 장소들 대사관 열람실이나 비디오방. 좋아한다기보다 희한하게 이런 곳에서 본 영화가 오래 기억이 남는다.
기대작 <듄: 파트 3>. 가장 흥미진진한 클라이맥스가 될 것 같아서. 아주 잘 세공된 상품이자 작품이라 생각한다. 디자인이 좋은 제품을 보듯 이 영화의 프로덕션을 보고 있으면 즐겁다.
<펀치 드렁크 러브> 해외 포스터.
시네마토그래프 대표 이윤영
국내외 독창적인 시선을 가진 독립·예술영화를 유통하는 수입/배급사 ‘시네마토그래프’를 운영하고 있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해외 여러 시네 아티스트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는 기획 상영을 진행해왔고 지난 8월 27일, 아르헨티나 독립영화 <너는 나를 불태워>의 전 세계 최초 정식 개봉을 추진했다. 영화제 화제작인 한국 영화 <에스퍼의 빛>과 오다 카오리 감독의 <언더그라운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계기와 작품 첫 번째 영화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처음으로 영화가 ‘재밌다’라는 인상을 심어준 작품이고 이만큼 재밌는 영화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 또한 심어줬다. 그 씨앗이 줄기를 뻗어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펀치 드렁크 러브>로 닿았다. 이 작품을 통해 대안적인 영화의 방식, 그러니까 직설이 아닌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가능성을 목격했다. 더 열심히 집중한 결과 중국의 다큐멘터리스트 왕빙의 <철서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영화를 향한 생각과 철학이 뒤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철서구>를 접하기 전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라 생각했지만, 조악한 캠코더로 만들어낸 9시간가량의 생생한 기록을 목격한 뒤부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출자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영화 <철서구>를 보통 꼽지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열대병> 또한 인생 최고의 영화라 여긴다. 앞서 얘기한 ‘대안적인 영화의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이 정글로 들어간다. 정글에 들어가면서 열리는 원시적 감각과 사랑이 엮이며 황홀경이 펼쳐진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의 매력 거대 산업 혹은 금전적 원리에서 벗어난 작품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다양한 가능성이 암묵적으로 열려 있다. 그런 확장성을 지닌 작품이 독립·예술영화라 생각한다. 독립·예술영화를 소비하는 이유가 단지 고상한 무언가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닐까?
영화와 맞닿은 장소들 전주국제영화제를 정말 좋아한다. 대안영화의 중심지이고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작품을 국내의 스크린으로 소환한다는 것에 큰 가치를 느끼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도 활력으로 가득 차 있기에 더할 나위 없다.
기대작 개봉 예정작 중에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피어나는 이란 영화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아왔고, 이번 파나히 감독의 신작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듯 보인다.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해외 포스터.
영화 도서 전문 편집자 임유청
영화와 책의 언저리에서 일한다. 요즘은 책과 영화를 중심으로 창작자와 애호가의 드물고 귀한 만남을 기획하는 ‘인터뷰&레터’ 시리즈(@interview.and.letter)에 몰두하고 있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계기와 작품 홍대 인근 커피숍에서 과외를 했다. 재수생을 가르쳤다. 수업이 끝나면 홍대 상상마당 시네마에 가서 혼자 영화를 봤다. 그러다 트위터에서 상상마당 영화팀 채용 공고를 봤다. 지원했고 합격했다. 일을 잘하고 싶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인생 영화 상황과 기분에 따라 바뀐다. 오늘은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로 하겠다. 내가 본 첫 왕빙 감독 영화다. 그때는 왕빙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제목이 맘에 들었다. 중국 시골 정신병원 풍경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러닝 타임 3시간 47분의 영화를 보러 간 거다. 영화가 끝나고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이 있었다. 길기로 유명한 그의 강연도 그날 처음 들었다. 3시간 47분만큼 이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2015년,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에 있던 시절이었고 한겨울이었다. 영화에는 스펙터클도 드라마도 반전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내내 경악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조용한 멸망처럼 충격적이다. 한 남자가 정신병원을 탈출했다. 텅 빈 도로를 따라 한없이 걸어간다.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간다. 한참을 따라간다. 계속 따라간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뒷덜미라도 잡아챈 양 덜컥 멈춰 선다. 그 멈춤에서 우리는 카메라로 찍고 있다 하여, 혹은 극장에 앉아 마치 하나님처럼 한 사람을 보고 있다 하여 그의 인생을 이해한다 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점점 멀어진다. 카메라의 유한함, 영화라는 몰이해, 혹은 이해의 가능성에 관해 오래 생각하게 되는 엔딩이다. 그날 이후 허리가 굉장히 안 좋아졌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의 매력 불균질함. 이해받으려는 의지로 매끈하게 만든 영화는 플라스틱처럼 지루하다. 허점과 빈틈은 영화의 약점이 아니다.
영화와 맞닿은 장소들 정동길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 지금 내가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극장.
기대작 박세영 감독의 <누가 내 십자가를 훔쳐갔나?>의 가편집 본을 볼 기회가 있었다. 완성되지도 않은 이 영화와 배우 정회린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는 맹목적이고 머물지 않는 진짜 방랑자다. 영화도 그렇다. 구축하고자 하는 스타일과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하다. 그런데 목적지는 없다. 나아갈 뿐이다. 그 점이 나를 사로잡는다.
<여행과 나날> 일본 포스터.
<동경 이야기> 스틸 컷.
영화 프로그래머 박혜진
영화사 ‘엣나인필름’ 극장사업부 팀장으로 외화 수입과 한국 독립영화를 배급마케팅하고 있으며,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의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 엣나인필름에서 일하면서 <마미> <레토> <어나더 라운드> <가가린> 등의 외화를 수입하고 <벌새> <메기> <너에게 가는 길> <성적표의 김민영> <비밀의 언덕> 등의 한국 독립영화를 배급마케팅했다. 매년 좋은 영화를 찾아 칸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는 물론 국내 영화제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계기와 작품 중학교 때 영화 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를 보다가 잡지에 나오는 영화들에 관심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꽤 먼 강남의 브로드웨이극장에서 <중경삼림>을 봤다. 이게 대체 무슨 영화인지, 그래서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다는 건지,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왠지 멋있는 영화 같았다. 몇 달 뒤 <중경삼림>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아, 봐두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중경삼림> 같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들도 많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영화에 조금씩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생 영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노부부가 동경을 바라보며 도시가 너무 넓어서 “잘못하다 헤어지면 평생 찾아 헤매도 못 만나겠다”라는 대사를 한다. 이 영화를 처음 영화관에서 본 어느 11월의 쓸쓸한 바람과 함께 아직도 그 말이 감각적으로 남아 있다.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의 매력 요즘은 영화를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야구, 페스티벌, 전시 같은 문화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혹은 영화제에 열광하기도 한다. 독립·예술영화만이 줄 수 있는 감각적인 자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나 직접 경험할 수 없었던 세계를 영화를 통해 더 넓힐 수 있다는 것이 이런 영화들을 아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와 맞닿은 장소들 아무래도 영화관. 어느 나라에 가든 어느 도시에 가든 영화관을 꼭 찾는다. 상영 중인 영화 포스터만 봐도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막연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조금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아, 이곳도 똑같이 이런 영화들을 상영하고 사람들이 보러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금세 낯선 도시가 익숙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리고 도시마다 다른 영화관 풍경을 채집하는 것이야말로 그 도시를 제대로 즐기고 오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대작 미야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함께 현재 일본 영화 신이 가장 주목하는 미야케 쇼의 신작이다. 더 큰 영화를 찍기 전 마지막으로 찍는 독립영화일 것 같아서 더욱 기대가 된다. 게다가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카리스마가 남다르다 느껴지는 카와이 유미, 꾸준히 일본 영화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심은경의 만남 또한 기대가 된다. 어떤 소식도 없지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사프디 형제가 연출(조시 사프디 혼자 연출하지 않고 형제가 함께 연출)하는 작품 중 <굿 타임>과 <언컷 젬스>를 이을 작품을 언제나 기대하고 있다.
박의령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영화를 보는 일이 가장 손쉬워 꾸준히 영화를 봐오니 어느새 영화는 특별한 것이 되었다.
Credit
- 글/ 박의령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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