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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발레단이 택한 발레리노, 전민철의 꿈

5월 러시아로 떠나기 전 '바자'에 전한 진심이 담긴 인터뷰.

프로필 by 안서경 2025.04.26

Innocent


티 없는 마음. 맹목적인 사랑. 발레리노 전민철과 나눈 대화에서 내내 맴돈 단어들.


톱은 Loewe.


하퍼스 바자 지난 1년 동안 발레리노 전민철의 삶을 상상해봤어요. 바라던 걸 다 이뤘더라고요. 두 번의 전막(하나의 극을 이루는 모든 막) 공연을 치렀고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솔리스트로 입단을 앞두고 있죠. 군무 단원이 아닌 솔리스트로 발탁된 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예요.

전민철 삶에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언젠가 프로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제 스스로 어리다고 여겼는지 사실 이렇게 빠르게 다가올 줄은 몰랐거든요. 요즘은 무대 위 제 모습을 보고 절대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요. 무용수는 조금이라도 노력이 부족하면 무대에서 결과로 나오니까요. 어쩌면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 저에겐 좋은 긴장감이 되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출국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죠. 어떤 점이 가장 기대돼요?

전민철 공연 예술이 오리지널인 곳에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요. 러시아에 대가 선생님들이 많거든요. 그분들께 지도를 받을 기회가 생긴다는 것, 연습실을 사용한다는 것, 같이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모든 게 기대가 커요.

하퍼스 바자 촬영하면서 스태프들이 구소련 대표 발레리노이자 배우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주연인 영화 <백야>(1985)가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했거든요.(웃음)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꼭 배우고 흡수하고 싶은 점이 있나요?

전민철 표현법을 가장 배우고 싶어요. 러시아 무용수들 특징이 동작 구현이 굉장히 잘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감정을 표현할 때 되게 다이렉트로 해요. 연기가 관객들한테 바로 전달이 될 만큼의 에너지로. 사실 제 성격은 그렇게 하기엔 어색하거든요. 저는 대사를 해도 약간의 가림막이 있어요. “너 왜 그랬어?”가 아니라 “너… 왜 그랬어” 이런 식으로요. 제 생활이나 말투 자체도 표현에 반영된 거겠죠. 새로운 점을 흡수한다면 다양한 색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돼요.

하퍼스 바자 입단 소식이 정해지고 나서 방송이나 인터뷰 등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 없이 활동해왔죠. 전성기가 지난 후 대중적인 활동을 하던 이전 세대 무용수와는 꽤 다른 행보예요.

전민철 많은 선배님들이 얘기해주셨어요. 요즘처럼 춤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을 때, 제가 발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알려드리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기인 것 같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발레에 대한 마음을 얘기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발레 공연 하면 크리스마스 시즌 <호두까기 인형>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요즘은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로도 공연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잖아요. 무용수나 몸짓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 소설 원작의 발레 공연이 아니어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셔츠, 팬츠, 타이는 모두 Bottega Veneta.


하퍼스 바자 패션에도 관심이 많은 편이죠? 무용복 말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본 사복을 입은 사진은 딱 스물한 살 같던데요.

전민철 어릴 때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를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제 도파민을 자극했나 봐요.(웃음) 모델들이 정말 멋있게 보였고 한 사람의 멋을 옷으로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부터 겉모습을 꾸미는 데 있어 열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초등학생 때 아니었나요? 그 무렵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오디션을 보고 난 뒤 무용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던 어린 민철의 고집스러운 모습도 떠올라요. 왜 그렇게 춤이 좋았어요?

전민철 왜 좋았을까요? 저는 그냥 몸을 움직이는 걸 너무 좋아하던 아이였어요. 발레를 할 땐 집중해서 푹 빠져 무언가를 하는 게 좋았고 그런 제 자신이 색다르게 느껴졌어요. 발끝, 복근, 등의 힘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고 목의 각도까지 세심하고 예민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이 되게 흥미로웠어요. 그땐 발레가 너무 좋아서 토슈즈를 신고 잠들 정도였어요.(웃음)

하퍼스 바자 자신을 혹사시키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겠죠?

전민철 사실 그럴 때가 대부분이었어요. 매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자고 새겼어요. 집에 갈까, 조금 더 연습을 할까, 이런 사소한 고민을 할 때도 판단을 현명하게 하려 했던 것 같아요.


베스트, 쇼츠, 롱 재킷, 슈즈는 모두 Rick Owens.


하퍼스 바자 예술 전공자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한 게 아닌 이상 “늦된 건 아닐까”우려하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민철 씨 또한 일반 중학교를 다니다 예중으로 편입했고 당시 남들과 비교하며 콤플렉스를 크게 느끼기도 했다고요. 그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요?

전민철 꿈을 찾은 다음부터 그런 고민을 뛰어넘었던 것 같아요. 그저 춤추는 게 좋아서, 행복해서 췄을 때는 남들과 비교도 많이 해서 괴로웠어요.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넘어갈 때 무렵이었을 거예요.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되어야겠다’라고 마음먹었거든요. 그때부턴 연습이 힘들든 지루하든 그냥 달려나갔어요. 더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도 안 했고요. 이 친구는 이 친구의 꿈이 있고, 나는 내 꿈이 있으니까, 우리는 비교할 인생이 아니구나. 멀리 있는 제 꿈을 따라가기 바빠서 눈앞에 보이는 건 다 지나는 과정이라 생각했거든요.

하퍼스 바자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되고 싶다는 꿈은 어떻게 꾸게 된 거예요?

전민철 꿈이 뭐냐는 질문에 늘 막연하게 대답하다가, 그즈음 어떤 무용수가 되고 싶은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자세하게 질문 받은 적이 있어요. “행복하기 위해 발레를 하는 건데, 왜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싶지?” 스스로 계속 질문했어요. 생생하게, 보다 구체적으로 꿈에 다가가려 해봤죠. 꿈은 누가 알아봐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것 같아요. 그전까진 유명한 무용수들의 영상을 보면 ‘그들만의 리그’ 아닐까, 했어요. 기민이 형을 보면서도 그렇게 느꼈고요. 그런데 그 뒤로는 무작정 열심히 하는 것보다 내 목표에 정확한 이유가 있는지 돌아봐왔죠. 발레단 입단을 지원할 때도 내가 왜 가야만 하는지 이유를 수도 없이 생각했어요. 저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지만, 다른 면이라면 그걸 깨달은 점인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인터뷰가 공개될 즈음엔 출국 전 마지막 국내 공연인 <지젤>을 막 마치고 났을 무렵일 거예요. 3분 만에 전석 매진된 공연이죠.(웃음) <지젤>은 남자 무용수들이 유독 돋보이는 공연이라 생각해요. 알브레히트가 선보이는 앙트르샤(제자리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라 두 다리를 앞뒤로 교차하는 동작)는 하이라이트로 꼽히기도 하죠. 이 극은 민철 씨에게 어땠나요?

전민철 제 성격과 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흥미로워요. 화를 못 내는 성격이라 어렵기도 했지만요. 연습할 때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구나, 싶었죠.

하퍼스 바자 아까 유튜브 촬영 때 요즘 동물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며 연습을 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에 남아요. 연기 워크숍에 가면 ‘동물 흉내내기’ 같은 훈련을 하잖아요.

전민철 자연스럽게 영상을 보다가 ‘아, 쟤네는 대사를 못하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용수도 대사를 못하고 몸으로만 표현을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저 친구들을 보면 영감을 많이 받을 수 있겠다, 싶었죠. 힐라리온에게 분노하는 장면을 연습하다가 그때 사자와 하이에나가 싸우는 영상을 봤어요. 제가 너무 얌전하고 곧았나 싶더라고요. 그때 느낀 걸 적용해보려 연습하고 있어요.


재킷, 셔츠, 팬츠, 레이스 장갑, 손에 든 백은 모두 Valentino.


하퍼스 바자 제일 좋아하는 동작은 뭐예요?

전민철 파드되(두 사람이 추는 동작)를 할 때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애절함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파워풀하기보다 물 흐르듯, 공중에 떠다니듯 표현해야 하고요. 보는 사람들도 같이 춤추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특히 2막 첫 번째 파드되에서 지젤이 꽃을 들고 독무를 하는데 저는 알브레히트의 시선에서는 세상을 떠난 지젤 대신 오직 꽃만 보일 거라 해석했어요. 나무에서 꽃이 떨어지면서 지젤을 대신해 꽃잎이 얘기해주는 게 아닐까, 이렇게 해석해 표현하려 했어요. 예를 들어 무덤 앞에 갑자기 나비가 날아오면 그 영혼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객석의 관중분들도 제 해석을 오롯이 느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하퍼스 바자 섬세한 감정 표현을 배우기 위해 영화도 즐겨 보나요?

전민철 <라이즈>라고, 파리 오페라 무용수였던 분의 실제 삶을 표현한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가 있어요. 발레 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공감할 수 있고 눈물의 의미가 뭔지 너무 알 거예요. 아버지가 딸의 공연을 보며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엄마도 내 공연을 보고 저렇게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을까’ 생각했어요. 공연을 앞두면 저절로 예민해지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민함을 표현하게 되니까 후회가 많이 됐어요. 요즘은 <폭싹 속았수다>도 즐겨 보고 있어요.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는 감수성 짙은 이야기를 좋아해요. 힘든 일이 있을 때 일부러 영상 매체를 보고 우는 편이에요. 어떤 걸 보고 공감해서 울면 ‘난 이거 보고 운 거야’ 하고 끝내버리게 돼요.

하퍼스 바자 지난해 처음 전막 주연을 맡았던 <라 바야데르>와 비교해본다면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나요?

전민철 음…. 그때는 처음이라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처음인데 누가 100% 잘한다는 평을 듣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 말이 듣기 싫었어요. ‘이 정도면 잘한 거야’ 하는 말 말고, 그냥 ‘너무 잘한다’라는 말이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대를 즐기지 못한 것 같아요. 무대를 즐긴다는 것부터 욕심이겠지만요. 뭘 하고 내려왔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과 떨림 속에 무대를 마친 것 같아 좀 아쉬워요. <라 바야데르>가 무용수 전민철의 젊은 패기를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알브레히트의 인생을 보여주자, 그의 삶을 살자, 이 생각이 커요.

하퍼스 바자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가 온다 리쿠의 소설 <스프링>을 보면“무대 위의 예술가들은 관객을 대신해 살아주고 있어.”라는 문장이 나와요. 방금 말한 답도 그런 마음으로 읽혀요.

전민철 타인이 되어서 춤으로 얘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인생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져요. 그래서 클래식 발레가 좋아요.

하퍼스 바자 발레리노 전민철에게 무대는 어떤 의미인가요?

전민철 원동력이요. 연습실에서의 시간으로만 무용수의 삶을 보면 굉장히 빨리 지치고 많이 힘들 거예요. 그렇지만 무대라는 곳은 배역이 작든 크든 그 환호와 박수 소리를 들으면 내가 이걸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답이 나와요.

하퍼스 바자 그 순간이 정말 찰나라도?

전민철 네. 1분의 작품을 추고 박수를 받아도 다 보답이 되는 것 같아요.

하퍼스 바자 전민철의 삶에서 춤은 뭘까요?

전민철 내가 존재하는 이유.


코트, 쇼츠, 부츠는 모두 Gucci.

Credit

  • 사진/ 강혜원
  • 헤어&메이크업/ 장해인
  • 스타일리스트/ Bebe.Kim
  • 세트 스타일리스트/ 황서인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