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랜드 파리에서 열린 코페르니의 2025 S/S 패션쇼.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 90만 명, 유튜브 구독자 수 72.5만 명.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유튜버 중 한 명인 윤태하, 일명 ‘태요미’는 2021년생 만 3세 아가다. 인생 2회 차를 의심케 하는 여유로움과 또래에 비해 월등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가진 태하의 일상은 ‘랜선 이모’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인기의 비결은 영상 콘텐츠에 달린 대다수의 댓글에서 가늠할 수 있듯 사랑스러운 태하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는 것. 그보다 앞서 전 국민에게 힐링 테라피를 선사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판다 푸바오, 꿀떡부터 산호초까지 작은 존재들을 연구해 제작한 수공예 인형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채널 ‘미물즈(@mimools.kr)’의 인기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직관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도 귀여운 존재가 사랑받는 시대다. 대한민국의 소비 트렌드 전망을 다룬 책 <트렌드 코리아 2025>도 내년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무해력(無害力, Embracing Harmlessness)’을 꼽았다. ‘무해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해로움이 없다는 뜻. 작거나 귀엽거나 서툴지만 순수한 것들의 공통점은 해롭지 않고,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며, 굳이 반대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 사방이 나를 공격해오는 것만 같은 현실에서 작고 귀엽고 연약한 존재는 그 자체로 힘(力)을 갖는다.(저자는 무해함의 끝판왕으로 아기를 꼽기도 했다.)
무해한 것을 향한 갈망은 패션계에서도 감지됐다. 그리고 대부분이 일명 키덜트(Kidult, 키드와 어덜트의 합성어) 패션이라 불리는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보테가 베네타의 2025 S/S 런웨이 쇼 공간을 떠올려보라. “당신을 미소 짓게 하고 ‘와우(wow)’를 외치게 만드는 친근한 동반자들과 함께하는 곳, 경이로움이 가득한 즐거운 세상으로 쇼장을 꾸미는 건 디 아크(The Ark)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번 쇼의 시팅은 상징적인 사코(Sacco) 체어에서 영감을 받은 60마리의 동물들로 구성되어 있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의 의도대로 판다, 토끼, 코끼리, 여우, 고래, 공룡, 고양이, 무당벌레 등 15종류의 동물을 형상화한 귀여운 라운지 체어는 자리에 앉은 관객들을 자연스레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어진 쇼에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일깨우는 마티유의 상상력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쇼 자체를 파리 디즈니랜드에서 개최한 코페르니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어린 시절을 디즈니와 함께 보냈어요. 많은 프랑스의 어린이, 특히 지방에서 온 어린이들에게 파리로의 첫 가족 여행은 곧 디즈니랜드로의 여행을 의미했죠. 미키마우스부터 말리피센트까지 디즈니의 동화와 캐릭터는 우정, 사랑, 두려움, 용기, 변신 등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설명해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쇼가 끝난 뒤 세바스티앙 메이어와 아르노 베일런트 듀오가 덧붙였다. 그들의 말처럼 디즈니의 캐릭터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 세계 어린이에게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야말로 상상 속 친구 같은 무해한 존재였다. 2020년의 구찌, 2022년의 지방시, 그리고 올해 <라이온킹> 개봉 30주년을 맞이해 협업 컬렉션을 선보인 발망 등 디즈니와 함께 성장해온 디자이너들이 이와 같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 건 예견된 수순이었을 것. 다시 코페르니 이야기로 돌아가 그날의 쇼를 복기해보면, 동화 같은 성을 배경으로 등장한 모델들은 디즈니의 다양한 공주와 마녀들로 분하거나 캐릭터의 특징적인 요소가 담긴 아이템을 입고 있었는데 쇼를 보는 내내 이를 찾아내는 즐거움이 꽤나 쏠쏠했다.
의상과 액세서리 자체에 동심을 불어넣은 사례도 눈길을 끈다. 풍선을 연상케 하는 구름 같은 형태의 아방가르드한 룩을 선보인 구니히코 모리나가의 안리얼리지(Anrealage),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던 ‘I’m Just a Girl!’ 문구에서 영감을 받아 룩에 미성숙한 소녀의 요소를 주입한 애슐리 윌리엄스, 웨딩케이크, 뭉게 구름을 연상케 한 추상적인 피스들을 선보인 꼼데가르송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은 일본 만화 <세일러 문(Pretty Guardian Sailor Moon)>과 지미추가 함께한 두 번째 협업 컬렉션도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장 올겨울에 참고할 수 있는 유용한 사례도 있다. 2024 F/W 시즌 프라다에서 선보인 리본이 가득 장식된 드레스는 사랑스러운 데다 그 자체로 소장가치가 높고, 시몬 로샤 쇼에 등장한 다양한 프린세스풍 드레스를 비롯, 모델들이 강아지처럼 품에 안고 등장한 크리처(Creature)라는 이름의 클러치 백은 손에 드는 것만으로도 무해력을 상승시킬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트렌드 코리아 2025>에 따르면 귀여운 존재는 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인 옥시토신을 분비시키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는 낮춰준다고 한다. 무해력 트렌드가 떠오르게 된 것도 “자극이 난무하고 서로를 향해 날이 서 있는 갈등의 시대에 나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나의 생각을 정화해주는 존재에 대한 갈구”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울적한 기분이 들 때 사랑스러운 아기나 귀여운 동물 영상으로 힐링을 하고 있다면 자주 착용하는 패션 아이템을 ‘무해’하게 바꿔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작게는 가방에 다는 키링이나 머플러로 시작해 원피스, 코트 등으로 경계를 넓혀보길 권한다. “어린 시절, 우리의 일상 속 매일은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환상적인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을 느끼며, 통상적인 기대나 관습에 얽매이지도 않았어요. 기이한 현실과 경이로움, 그리고 환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불가능한 시나리오들이 이루어지는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 같았죠.”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며 보테가 베네타의 마티유 블라지가 전한 이야기다. 이에 보태어 “패션은 실재(Real)하는 양식이 아닌 상상(Imagined)의 양식”이라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된다. 귀여움이 곧 세상을 구할 것이며, 패션은 그를 위한 완벽한 매개체가 될 거라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