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돌체앤가바나이기에 가능한 이탈리아발 패션 카니발

성대한 이탈리아발 패션 카니발, 알타 모다 위크가 열렸다. 지구상 수많은 패션 브랜드 중 돌체앤가바나가 아니면 못할 유일무이한 축제였다.

프로필 by 황인애 2024.08.21
인류는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일까? 요즘 들어 ‘진보’라는 단어에 대해 그 뜻을 다시 정의해야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21세기 내내 신적인 믿음으로 발전해온 글로벌 시대의 성장에 제동이 걸리며, 우리 사회는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있다. 예컨대, 한창 도시로 몰리던 젊은이들이 지방으로 향한다는 뉴스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종종 나온다. 또한 사람뿐 아니라 글로벌을 외치던 수많은 산업도 돌연 ‘로컬 턴!’을 외친다. 이 현상에 대해 일본의 한 경제학자는 이렇게 분석한다. “젊은이들이 도시를 찾는 것은 자기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다. 자기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상대 비교할 수 있는 도시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일률적 평가 수단으로 등급을 판정받는다면 기업과 자본은 그들을 호환성 높은 부품으로 여길 뿐이다. 기업이 원하는 스펙의 일괄적인 기준을 따르다 보니 청년이 모두 서로 비슷해진다. 현대 일본 사회에서 활력이 사라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패션을 바라보면, 글로벌화로 인해 모두 비슷한 취향과 목표를 갖게 되고 이러한 일괄적인 상황은 그 문화 자체의 활력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그의 논리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24시간 연결되어 모든 문화와 정보를 공유하는 지구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평범함의 굴레에 갇힌 것 같다. 파리, 뉴욕, 도쿄, 서울 등 세계의 거대 도시들은 이제 거의 비슷한 의식주의 모습을 보인다. 비슷한 컬러와 실루엣, 디테일의 옷이 유행하고, 비슷한 먹거리를 먹고, 별반 다르지 않은 인테리어 취향을 공유한다.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상향평준화 되었지만, 우리가 원하던 그 ‘활력’이 사라졌다. 저마다 다른 환경과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보여주던 그 생기 넘치던 바이브가 그리워진다.
2024 알타 모다 여성 오트 쿠튀르 컬렉션.

그래서일까, 가끔 SNS를 뒤덮은 90년대풍의 슈퍼 모던한 옷보다 한 나라의 문화를 온전히 담아내는 패션이 더 진보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 전 돌체앤가바나가 장장 5일간에 걸쳐 벌인 축제와도 같았던 알타 모다를 보며 왠지 모를 흥이 났던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한 벌의 옷인가, 하나의 이야기인가. 옷은 천과 실과 바늘이 필요하지만 후자는 거기에 더불어 그 옷의 배경과 역사와 의미가 필요하다. 분명 돌체앤가바나가 만들고 있는 건 옷을 넘어선 한 편의 이야기다. 이를 증명하는 알타 모다가 지난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이탈리아의 섬, 사르데냐에서 열렸다. 여느 패션 하우스들이 세계 곳곳의 도시를 돌며 이국적인 스토리로 채워진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과 달리 돌체앤가바나의 알타 모다는 오직 이탈리아에만 집중한다. 창립자이자 디자이너인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2012년 시칠리아를 시작으로 베니스, 포르토피노, 나폴리, 코모, 피렌체, 시라쿠사에 이르기까지 단 두 번의 미국행을 제외하곤 모두 이탈리아의 상징적인 도시에서 알타 모다를 진행했다. 이탈리아라는 민족성을 바탕으로 한 돌체앤가바나에게 알타 모다는 일종의 책임감과 같았다. 이탈리아의 다름을, 더 깊이는 이탈리아 도시 면면의 다름을 찾아내 유일무이한 이탈리아의 문화를 지켜내는 것에 대해 돌체앤가바나만큼 진지한 하우스는 없다. 물론 그들이 만드는 게 우리가 소위 이야기하는 주류 혹은 글로벌 스탠더드한 옷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주류 담론에 반격을 가하고, 담론의 지형을 재구축한다는 면에서 돌체앤가바나가 패션계에 남기는 흔적은 깊고도 진하다.
2024 알타 모다 여성 오트 쿠튀르 컬렉션.

돌체앤가바나가 이번 알타 모다를 위해 탐구한 사르데냐는 지중해의 매혹적인 섬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어온 풍부한 전통과 독특한 유산을 간직한 곳이다. 여느 다른 지방 도시와 같이 본토로 이주하는 사람들로 인해 점점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지켜내야 할 것이 많은 보석 같은 도시다. 사르데냐를 생각하면 먼저 맑고 투명하며 수정 같은 바다가 떠오른다. 지중해의 중심에 위치한 사르데냐는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그 시기에 최초의 원뿔대형 탑 즉, 누라게(Nuraghe)가 등장했다. 이 절단된 원뿔 모양의 돌 구조물은 누라게 문명의 가장 상징적인 유물로, 문명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바람에 깎인 풍경을 지닌 이 험난하고도 관대한 지역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문명을 매료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먼 땅에서 온 새로운 문화들이 섬의 고유한 유산과 융합되며 그야말로 융성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해변과 다채로운 해저, 그리고 장엄한 산의 암벽, 유향나무와 향나무의 송진 향으로 대표되는 지중해 식물, 그리고 풍부한 향기의 머틀과 시트러스가 있는 극명히 대조적인 지형이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올리브나무, 딸기나무, 참나무들이 돌 구조물과 선사시대의 원형 탑, 누라게로 안내한다. 이러한 누라게들은 신비로 가득한 과거와 사르데냐에 전해지는 민속의 신화와 전설의 메아리를 담고 있다. 지역마다 문화가 다른 건 그곳의 땅과 바람, 햇빛,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나무와 작물, 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먹고 자란 사람들은 분명 타 민족과는 태초부터 다른 특징을 지니게 된다. 요즘 모든 것이 비슷비슷해지고 활력을 잃는 데는 이러한 다름의 뿌리가 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케이티 페리의 공연. 화려함 그 자체인 팝스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개막식 공연.

돌체앤가바나의 알타 모다 컬렉션이 공개된 노라(Nora)는 70미터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곳은 사르데냐에서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 중 하나로 바다 아래에는 고대 도시의 일부가 잠겨 있다. 뛰어난 자연 환경과 더불어 사르데냐의 공예품은 이 지역의 소중한 보물 중 하나다. 정교하게 짜인 바구니부터 조각된 목재, 나이프 제작 기술부터 도예에 이르기까지, 사르데냐의 공예는 섬의 정체성과 역사를 반영한다. 사르데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예에는 위빙과 카펫, 담요, 태피스트리가 꼽힌다. 양모와 면은 여전히 직조기 같은 고대 방식을 사용해 가공되며, 이는 진정으로 독특한 수공예 직물을 만들어낸다. 사르데냐의 민속을 탐험하는 것은 깊이 뿌리내린 장인정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맛을 음미하며,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 게스트들과 함께한 알타 모다 위크는 마을의 축제 같았다. 팝스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개막식 공연을 시작으로 하이주얼리인 알타 조엘레리아(Alta Gioielleria), 여성 오트 쿠튀르인 알타 모다(Alta Moda), 남성 오트 쿠튀르인 알타 사르토리아(Alta Sartoria), 그리고 팝스타 케이티 페리의 폐막식 공연으로 5일간의 위크는 꽉 채워졌다.
2024 알타 사르토리아 남성 오트 쿠튀르 컬렉션.

첫날인 7월 1일에 공개된 돌체앤가바나의 하이주얼리 알타 조엘레리아는 사르데냐의 수공예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기후변화와 이로 인해 야기된 팬데믹은 인류 문명에게 더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팬데믹을 겪으며 국가나 인종, 더 나아가 빈부의 격차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류가 맞닥뜨릴 수 있는 공공의 적의 존재를 확인했다. 효율성만 쫓던 자본주의 시대에서 다시 리턴해, 자연과 노동과 예술적 생산이 하나로 연결된 공예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번 컬렉션은 수작업으로 금실을 뽑고 엮는 사르네냐의 전통적 공예 기술 필리그리(Filigree)가 주인공이다. 필리그리는 레이스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하는 투명한 구조가 특징이다. 고대 누라게 문명의 전설에 따르면, 사르데냐의 신화적인 요정인 자나스(Janas)는 귀금속을 마치 천처럼 엮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금과 은 실을 수놓고 엮어 보석을 세팅했는데, 그 숙련된 작업에서 ‘프렌다스’라는 사르데냐 보석이 탄생했다. 프렌다스는 이중 돔 형태의 금 단추로, 이는 전통 의상을 장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펜던트나 귀고리로도 사용할 수 있다. 그 형태가 여성의 가슴을 닮아 여성성과 다산을 상징하며 풍요롭고 생산적이며 행복한 삶을 기원하기 위한 부적으로 여겨졌다. 여기에 바구니 모양의 수공예품 ‘사 코르불사’, ‘수 콕코이’라는 실제 빵 조각 등 사르데냐의 전통을 한데 버무려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주얼리가 탄생했다.
7월 2일에 이어진 여성 오트 쿠튀르인 알타 모다는 미국 설치미술가 필립 K. 스미스 3세가 만들어낸 장엄한 무대에서 펼쳐졌다. 1972년 캘리포니아 출생인 그는 빛을 매개로 사용해 시각적으로 변화하는 조각과 특정 장소에 맞춘 설치작품을 만들고 있다.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가 직접 선정한 필립 K. 스미스 3세는 노라의 매혹적인 아름다움과 컬렉션의 형이상학적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아 ‘노라 미라지’라는 설치작품을 탄생시켰다. 푸른 바다와 태양빛을 투영하는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름다움이 뭔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30여 분이나 이어진 장대한 런웨이에서는 모든 순간 사르데냐 공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필리그리에서 영감을 받은 3차원 자수와 수작업으로 제작된 망토들은 고대 사르데냐 직조 예술과 장인들의 양모 공예를 떠올리게 한다. 이 걸작들은 광채와 질감, 독특한 장식을 활용해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엮어냈다. 몸을 자연스럽게 감싸면서 비밀과 드러남, 세련미와 대담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DSL 스튜디오가 장식한 풍요로운 알타 조엘레리아의 무대. 2024 알타 조엘레리아 하이주얼리 컬렉션. 샤르데냐의 전통적인 빵 조각 ‘수 콕코이’와 이를 담은 알타 조엘레리아.
다음 날 공개된 알타 사르토리아는 사르데냐의 민속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오프닝으로 시작되었다. 사르데냐는 수많은 종교 축제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칼리아리에서 열리는 산트에피시오 축제가 단연 대표적이다. 매년 5월 1일부터 4일까지 이어지는 산트에피시오 축제는 성인의 동상이 금박 마차에 실려 거리를 행진하는 종교 행렬로, 꽃과 전통 농기구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소가 그려진 마차 트라카스가 등장한다. 수백 명의 사르데냐 마을 사람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축제를 즐긴다. 산트에피시오 축제 동안 거리에 장미 꽃잎을 뿌리는 인피오라타 전통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소재의 꽃무늬 자수부터 일부 창작물은 전통적 직조 기술인 피비오네를 사용해 제작되었다. ‘손으로 만든’이라는 의미의 ‘Fatto a Mano’는 알타 사르토리아 철학의 중심에 있다. 컬렉션의 각 작품은 장인들이 모든 디테일을 손으로 정교하게 제작하는 데 헌신과 기술을 쏟아부은 결과물이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깨달은 바는 인류가 나아갈 수 있는 건 과거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활력을 잃은 이 글로벌 시대의 다음은, 아마도 과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그 어떤 브랜드도 할 수 없는 일, 오직 돌체앤가바나 만이 할 수 있는 일, 알타 모다 위크가 우리에게 남긴 건 사르네냐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Luigi & Lango, Alex Dobe’, Cynthia Parkhurst, Marco Pionato, DSL Studio, Marco Pionato, © Dolce & Gabbana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