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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는 아닙니다만, 천우희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오후, 천우희가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작품을 맡기로 한 순간부터는 나만의 것이니까, 그때부터는 온전히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프로필 by 안서경 2024.03.20
하퍼스 바자 관찰하는 눈이 좋다고 하던데, 오늘 촬영장에선 무얼 봤나요?
천우희 분위기를 잘 캐치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오늘 음악은 이런 무드구나. 조명은 이렇게 달라지네. 긴장하면서도 설레었어요. 화보 촬영을 연기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려고 해요. 8개월 정도 계속 같은 인물로 지내다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좋았어요.
하퍼스 바자 보사노바가 흘러나오기도 했죠. 어제 새벽까지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촬영을 마치고 왔어요. 초능력을 잃어버린 남자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도다해는 어떤 인물인가요?
천우희 아빠가 지어준 도다해라는 이름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뜻을 지녔지만, 현실은 하고 싶은 걸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인물이에요. 일종의 부채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인데, 초능력 가족을 만나면서 생의 변화를 맞게 되죠.
하퍼스 바자 캐릭터를 선택할 때 ‘연민’을 본다는 말을 한 적 있는데, 다해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나요?
천우희 기준이 매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연민이라는 감정이 저를 끌어당길 때가 많아요. 소외받거나 자기만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 그런 인물을 보면 들여다보고 싶고, 탐구하고 싶어져요.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님께서 “인간 천우희로 놓이면 되는 거다”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하기도 하잖아요. 그때 천우희는 어떤 모습인지를 연기해달라 하셨는데, 그 점이 어렵더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고두심 선배님과 같이 연기를 하는 점도 기대됐고요.
베스트, 톱, 스커트, 브리프, 슈즈는 모두 Miu Miu. 양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촬영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달라진 점을 꼽아본다면?
천우희 무방비 상태로 나를 둔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극을 책임지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어요.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작품을 할 때 정말 영혼을 갈아 넣듯 임했거든요. 개인적인 생활이 거의 없이, 촬영을 하루 쉬는 날도 다음 날 촬영 준비만 하고.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현장에서도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려고 했어요.
하퍼스 바자 방금 대답을 들으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인터뷰에서 지쳤다는 말을 한 적 있어선지 오늘도 그렇지 않을까 추측했거든요.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드라마 <이로운 사기>와 곧 방영을 앞둔 두 시리즈까지. 코로나 기간에도 쉼 없이 달려왔잖아요.
천우희 제 안에 어떤 갈증과 갈급함이 있었어요. 지치더라도 현장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변태성을 갖고 있어서 집요하게 제 한계를 맛보고,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고, 제 존재를 확인하려 했죠. 이게 ‘해냈어!’ 하는 도파민 중독과는 달라요. 제 나약함을 여실히 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나라는 사람은 어떤 부분에선 약하고, 어떤 부분에선 단단하구나. 그걸 스스로 목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더 내동댕이치고, 가시밭에도 굴려보고 그랬죠. 이번 작품을 하면서 ‘조금 내려놓고 해봐도 나쁘지 않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퍼스 바자 자신을 다독이는 법을 알게 된 것일 수도 있고요.
천우희 제 안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아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걸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할까. 배우로서 작품을 통해 인정 욕구, 개인적인 성장, 영감 같은 것들을 얻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만, 하나에 얽매이기보단 제 시야가 좀 더 넓어졌다는 걸 느껴요.
하퍼스 바자 공교롭게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이 5월 방영하는데, 촬영을 먼저 마친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 역시 비슷한 시기에 공개를 앞두고 있어요. 아직 베일에 싸인 작품이고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았죠. 티저 이미지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 강렬하더군요.
천우희 배우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있잖아요. 제게 꽤 큰 도전이었어요.
하퍼스 바자 배진수 작가의 웹툰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을 각색한 극이자 ‘8명의 인물이 8층으로 나뉜 비밀스러운 공간에 갇혀 돈을 버는, 달콤하지만 위험한 쇼에 참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정보만 공개되었을 뿐이죠. 이 작품은 어떤 점에 이끌렸나요?
천우희 연민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겠는 인물이에요. 누군가 이런 얘길 하더라고요. 천우희는 ‘별의별 도라이’ 연기를 잘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그렇게 연기했을 때 어떤 쾌감이, 신선함이 생겨나지 않을까. 정반대의 접근으로, 무모한 선택을 해본 거예요.
톱, 팬츠는 Valentino.

하퍼스 바자 한 인터뷰에서 선이 부드러운 왼쪽 얼굴과 단단하고 강해 보이는 오른쪽 얼굴, 두 느낌이 달라서 그걸 선택해서 사용한다고 말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번 티저에서는 오른쪽 모습이 주로 잡혔던데.
천우희 많이 내려놨어요.(웃음) 이전에는 제 얼굴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연출자나 스태프 분들이 잘 담아주시겠지,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에 좀 자유로워졌어요. 곁에 분명 내가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편으론 진짜 별로면 편집하겠지, 란 생각도 하고요.(웃음)
하퍼스 바자 그동안 맡은 역할을 다시 보니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에서 한계 끝까지 몰아붙이는 역을 하거나 또는 <멜로가 체질>처럼 편안한 모습을 보여주는,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천우희 작품은 운명처럼 만나는 것 같아요. 배우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요. 캐스팅 후보 안에 있을 때는 제 작품이 아니지만, 소위 ‘도장을 찍었다’ 하는 순간부터는 나만의 것이니까, 그때부터는 온전히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 인물, 이 작품은 나밖에 할 수 없어’ 하는 자신감으로 임해야 하죠. 지금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분명하게 인지하려고 해요. 공동 작업이기에 결과나 흥행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단 내 자세와 태도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정하겠다는 마음인 거죠.
하퍼스 바자 인간 천우희는 일기장에 그날 대화를 곱씹으며 자기성찰을 자주 하는 사람이지만, 연기 안에서는 단단한 확신이 있는 사람 같아요.
천우희 그래서 연기를 좋아하는 걸 수도 있어요.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에 늘 놓이니까. 처음부터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어떤 힘든 역을 맡든 ‘이건 내가 아니야,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야’ 하고 접근하니 수월했어요. 작품 안과 밖, 온오프가 잘됐고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을 할수록 달라져요. 이 캐릭터가 나랑 달라서 연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를 더 알고 싶어서, 새로운 나를 계속 보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하퍼스 바자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이했죠. 물론 대중에게 각인된 <한공주>부터 보면 10년간 달려온 거지만, 숫자나 시간이 주는 특별한 감정이 있나요?
천우희 반반이랄까. 성향 자체가 워낙 양가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어떨 땐 숫자에 대한 거부감이 들다가도 한편으론 그 의미를 굉장히 소중하게 느끼고 싶기도 해요. ‘숫자가 뭐 그렇게 중요해’ 싶다가 ‘이 일을 10년이나 했다니!’ 대견하기도 하고. 이런 성향이 일을 계속하도록 균형감을 주는 것 같아요.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나태해지든 너무 몰아붙이든, 괴로웠을 거예요.
하퍼스 바자 최근 동료 배우들과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를 열기도 했어요.
천우희 류덕환 배우가 같이 하자고 했을 때 너무 기뻤어요. 배우들끼리 연기에 대한 생각을 영상과 퍼포먼스로 담아 보여주는 자리였어요. 저 역시 오랫동안 시도해보고 싶던 방식이었어요. 배우 말고 다른 예술가들은 협업을 자주 하잖아요. 왜 배우들의 연대는 잘 드러나지 않을까? 같은 작품을 맡아야만, 친한 사이에서만 교류하지 그 밖의 자리는 드문 게 아쉬웠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배우는 작품의 저작권을 가질 수 없는 건가. 자신의 이야기를 연기할 수는 없을까. 타인의 글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전시장에 쓰인 문구였는데, 너무 와닿았어요.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져서 다른 배우들의 생각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요.
카디건, 팬츠, 힐은 모두 Ralph Lauren Collection.

하퍼스 바자 연기 이외에 일상에서 요즘 천우희를 사로잡은 건 무엇인가요?
천우희 요가를 시작한 지 한 달 반쯤 됐어요. 소소하게 느끼는 건, 우리가 ‘숨’에 대해 너무 놓치고 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 기본적이고 누구나 다 하는 호흡이라는 행위에 대해서요. 숨 쉬는 일에 하나하나 집중하다 보니 마음이 평온해지고, 굉장히 즐겁다는 걸 느껴요.
하퍼스 바자 요가나 다이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호흡’에 집중하는 건 내가 원하는 삶의 속도를 인지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말을 하더라고요. 삶을 방향과 속도의 측면에서 보면, 배우라는 직업의 방향은 확고하지만 속도는 무척 빠르기도 하죠.
천우희 좋은데요? 오늘 가서 일기장에 써야겠어요.
하퍼스 바자 최근 쓴 메모 중 공개하고 싶은 게 있나요?
천우희 나누고 싶진 않지만(웃음) “돼도 좋고, 안 돼도 좋고.” 예전에는 이 말이 체념이나 포기 같아서 싫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구나’ 하고 이해가 되더라고요. 누구나 지난 노력과 상관없이 맞닥뜨리는 상황도 있잖아요. 그럴 때 이 말을 보는 게 불안이나 두려움을 줄여주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물론 최선을 다했다는 전제 하에.
하퍼스 바자 지금 무척 건강한 상태인 것 같아요.
천우희 이러다가 또 내일 ‘난 왜 이럴까?’ 하는 게 인생이죠.(웃음)

Credit

  • 사진/ 최문혁
  • 헤어/ 김예슬
  • 메이크업/ 이나겸
  • 스타일리스트/ 최아름(Intrend)
  • 어시스턴트/ 김지연(Intrend),조혜원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